Part 5. 희생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기쁨에 가득 차 인간 어머니에게 내려오는 예수. 이 같은 자발적인 희생양 테마가 불교에서는 보살(보티사트바)의 모습으로 구현된다. 그는 삶 속에서 해방된 자로서 그의 본질은 깨우침이다. 슬픔의 세계로부터 자기 자신의 해방을 사양하고,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위안하고 해방시키기 위해 세상에 남는 보티사트바는, 수도승으로 그려지는 붓다와 달리 세속적인 옷을 입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보티사트바는 가르침을 전할 때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고 한다. 그의 메시지는 각자의 내면에 있는 ‘지혜의 자아’에게로 전해져, 그 자아를 깨우고 삶으로 불러낸다. 일깨우는 자인 보티사트바는 아픔과 슬픔을 고통을 통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상 세계를 긍정하는 모든 것 안에 있는 의식의 이미지이다. 그는 ‘현재의 신’이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조건적인 자비다.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고통스러운 기쁨과 기쁨에 찬 고통이라는 이 세상의 소용돌이를 피하고 않고, 더욱 열심히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이 자발적인 희생양의 태도는, 은둔자나 낙원을 바라는 의지보다 오래된 것이다.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이런 ‘희생되는 신’이라는 테마에 대한 전 세계적 예를 보여주었다. 그중에는, 조각나고 흩어진 신의 사체에서 인간의 삶을 지탱시키는 식용 식물들이 자라거나 신의 희생을 통해 우주가 움직인다는 사고방식이 들어 있다. 인간 희생도 바쳐졌는데, 특히 아즈텍인들 사이에 막대한 인간 희생이 있었고, 마야인이나 나머지 종족들에 의해서도 빈번히 행해졌다. 이것은 태양을 계속 운행하게 만들고 자연의 은혜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된 바위그림에서는 나무 밑에 여자가 눕혀져 있고, 한 남자가 두 손을 올리고 서서 기도를 하거나 하늘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있다. 하늘에서는 더 커다란 다른 여자가 그 아래 땅을 소생시키고 비옥하게 한다. 프레이저는 종교를 초인적인 힘에 대한 회유나 위무로 정의한다. 신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어떤 행위를 할 때만, 그것을 종교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제3의 층위인 신비주의자나 시인의 층위가 덧붙여져야 한다. 이는 신이나 인간을 궁극적 경계로 간주하지 않고 법신(法身, 다르마카야)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의 범주를 확장하려 노력하면서, 존재의 경이에 대한 경외감으로 자기-변형이라는 과업에 몰두하는 자들의 층위이다.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과의 자기 동일성이라는 신비를 인식하는 한, 그는 단지 믿음이 아닌 경험 속에서 모든 존재들과 동질성을 분유(分有)하고 있다는 감각을 얻을 것이며 이는 자기 복종의 바탕이자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종교적인 것(the religious) ’과 ‘신비적인 것(the mystical)’, 이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읽히는 공통된 상징을 공유해 왔다. 종교적 인간들에게 신은 회유 하거나 기쁘게 해야 하는 ‘저 바깥’의 존재와 관련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죽음에 순종하고, 그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발적 희생양은, 궁극적으로 내면적 변형을 향한 도전을 의미한다. 이것은 개인적 건강, 부, 장수, 자손의 번성, 전쟁의 승리 등을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올려지는 기도나 향불, 한 생명체의 살을 태우는 냄새라고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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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에 관한 의례의 전승과 신화는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오세아니아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멧돼지는 내세의 신비에 관한 전승이며, 고인들은 의례적으로 양육된 멧돼지(자신의 ‘죽음의 돼지’)와의 영적 동일시를 통해서만 내세로 입장할 수 있다. 점점 값비싼 제물이 죽음의 돼지에게 바쳐지는 동안, 그 돼지는 그 주인의 수호정령의 힘과 동일시되고 마침내 그 돼지를 희생시킬 때 그 힘은 돼지 주인에게로 전해진다.
말레쿨라의 소년들은 대 여섯 살쯤에 처음 가축용 멧돼지를 희생시킨다. 그와 동시에 어머니와의 식사를 그만두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소년들과 함께 돼지를 기르면서 그렇게 기른 돼지를 희생시키는 일을 반복한다. 이런 의례의 효과는 남자아이가 성장하면서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유아기적 성향을 극복하기 위한 것인데, 소년의 의존성과 애착의 감정은 어머니로부터 점차 멧돼지들에게 전이된다. 스스로 소중히 키운 돼지를 잡을 때 그의 정신적 의존 체계는 극복되고 초월되며, 돼지의 영혼과 정신은 그것을 잡은 소년에게로 들어가 그의 내부에서 통합된다고 믿는다.
엄청난 노동과 끝없는 보살핌으로 훌륭한 곡선을 그린 엄니를 가지게 된 돼지는 “의례에서 도살되어 한 사람에게 죽음 뒤의 삶을 주는 희생 동물이 된다.” 빛나는 엄니는 차오르고 이지러지는 달을 나타내며, 돼지의 검은 몸뚱이는 보이지 않는 달에 상응한다. 돼지는 남성이면서 여성인데, 성장하는 소년은 성인이 되기 위해 ‘어머니 극복하기’라는 모티프로 첫 번째 돼지 희생을 행하는 전통이 계속되는 것이다. 사랑하고 보호하며 지켜주는 유년기의 ‘먹을 것을 주는 어머니’는, 궁극적이고 우주적인 죽음의 어머니인 밤으로 합병되고 초월되어야 한다.
어떤 동물을 신이라고 하거나 반대로 어떤 신을 동물이라고 상상한 이후에, 종종 신이 동물의 형상을 벗고 순전히 사람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처음에는 신과 동일시하며 살해했던 동물을, 신에게 적대적이라며 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삼게 된다. 결국 신은 자기 자신의 적이라는 근거로 스스로에게 제물로 바쳐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은 그리스에서 디오니소스와 데메테르에게서도 일어났다. 프레이져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된다.” 이런 신화적 죽음은 부활의 전조가 된다. 육체적 죽음 뒤에 오는 생명의 부활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정신적 자기 박탈의 행위를 통해 불멸에 눈뜨게 된다는 밀교적 의미에서도 그렇다.
신비적 차원에서의 하나란, 시공간적 차원에서는 둘이며, 우리의 ‘지식’ (신비적 용어로 하자면 우리의 ‘무지’)의 형식으로 보자면 다수이다. 깨어있는 의식의 장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 즉, A는 not A가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자의식에 고착되어 있는 한, 이것이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무지’의 분리를 보상해주는 것은 ‘희생’이다. 희생한 자의 자기 양도와, 분리된 신을 온전한 하나의 전체로 다시 세움으로써 다수의 자아들은 하나의 원리로 응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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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신화 속 창조주 브라흐마가 비슈누의 세계 꿈속의 연꽃 위에 앉아 그의 오랜 밤의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온통 허공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는 연꽃 위에 앉아 혼자 떠다니고 있었다. 허공 속에 차 있는 물속에는 대지가 가라앉아 있었는데, 브라흐마는 거기에 다시 광명을 비춰주려는 욕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콧구멍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아주 작은 멧돼지가 나와 바로 자라나 거대하게 부풀어 어마어마한 크기로 자라났다. 그 거대한 멧돼지는 우주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곳에 있던 대지의 여신은,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밤의 바다를 헤치고 온 멧돼지에게 경배드리며 신을 찬양했다.
“만세! 만물의 신이여! 나를 이곳에서 끌어올려 주소서. 나는 당신에게서 나왔습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만들어졌고, 하늘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알지 못합니다. 신들조차도 당신이 취한 형상을 통해서만 그대를 숭배할 뿐입니다. 정신으로 이해한 모든 것, 감각으로 인식한 모든 것, 지각으로 알아낸 모든 것은 단지 당신의 이름이자 형상일 뿐입니다.”
그는 우주적 밤의 바다를 통과하여 빛나는 모습으로 다가왔고, 강력한 멧돼지의 모습으로 돌진했다. 그의 눈은 빛나는 연꽃처럼 반짝였으며, 우주 산만큼 거대한 그의 몸은 연잎처럼 검었다. 그는 거대하고 빛나는 흰 엄니로 그의 꿈속의 여신을 그 어두운 곳에서 들어 올렸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그의 이마에서 물이 떨어져 사방으로 튀면서 천상세계에 사는 위대한 현자들을 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