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이 두 개로 보이는 아이] 2화 - 약시
다래끼가 나본 적 있나요? 눈병에 걸려본 적은요? 보통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한쪽 눈을 가려요. 영화에 나오는 해적처럼요. 학창시절엔 소위 '노는 애들'이 렌즈를 끼다가 눈병이 나서 안대를 꼈던 것 같아요. "한쪽 눈을 가린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라고 묻는다면, 아마 다들 궁예를 생각하겠죠? 해적, 노는 애들, 궁예... 그닥 좋은 이미지는 아녜요. 어린 시절의 저도 한쪽 눈을 가리고 사는 게 싫었나봐요.
안대를 낀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가 있는 눈을 가려요. 보기 흉하니까 덮어두는 거예요. 그런데 약시가 있는 아이는 좋은 눈을 가려야 한대요. 아이가 약한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해서 그 눈을 쓰게 만들려구요. 스포츠 선수들이 훈련하는 거랑 비슷해요. 못 하는 걸 더 열심히 연습시키기. 너는 왼쪽 눈으로 세상 보는 걸 못 하니까, 그것만 계속 연습해라. 음, 저는 스포츠 선수가 될 재목은 아니에요. 연습에 매진하기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연습은 왜 해야 해요? 그냥 살면 안 돼요? 스포츠맨십이 있는 선수란 자고로 공정함에 자제력에 끈기에 용기까지 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넷 중에 하나라도 갖고 싶어요.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려면 제가 지금 선수가 돼야 한대요. 그것도 스포츠맨십을 갖춘 선수라나. 공정함이나 용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제력이랑 끈기는 필요하대요. 거 참, 여섯 살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거 아닌가몰라.
제 세상은 부족한 눈으로도 충분했어요. 간판이 두 개로 보이던 여섯 살은, 유치원에 입학해서 새로운 걸 많이 배운 시기였거든요. 단짝 친구도 생기고, 바이올린도 켜 봤어요. 제일 재미있었던 건 역시 한글 읽기랑 단어 배우기! 어딜 가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글자가 많았어요. 간판도, 광고 전단지도, 책도, TV 자막도... 집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었어요. 창고에 굴러다니는 제품 사용설명서, 엄마가 사놓고 안 읽어서 먼지가 쌓인 책, 할머니가 읽어달라시던 복지회관 안내문의 깨알같은 글씨... 화장실 변기에 앉아 샴푸통 뒤에 적힌 정체모를 글자를 소리내 읽노라면 시간이 참 잘 흘러갔는데! 요즘엔 모두가 화장실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것 같아요.
하루아침에 좋은 눈을 뺏겼어요. 아니, 나보고 안대를 끼고 책을 읽으라잖아요! 누군가를 답답하게, 찝찝하게, 짜증나게, 신경질적이게 만들고 싶다면, 그 사람이 누리던 가장 큰 행복을 뺏어가면 돼요. 저는 책 읽는 게 정말 좋았어요. 책은 뭐가 철쭉이고 뭐가 진달래인지 알려주거든요. 사전이랑 책은 이렇게 말해요.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야, 왜냐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기 때문이야. 진짜 쉽죠! 그런데 안대를 끼고 책을 읽자니 이거 원, 글자를 볼 수가 있어야죠. 약시는 시력이 없는 거라서, 글자는커녕 멀리 있는 물체도 잘 안 보여요. 저처럼 한쪽 눈만 약시고, 다른 한 쪽은 시력이 괜찮으면, 약시인 눈은 자연히 게을러진대요. 한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으니까. 저는 태생적으로 눈부터 게을러터진 인간인가봐요.
제가 자란 도시엔 한국에서도 성격 급한 사람들이 많아요. 빨리빨리 물질이 공기를 타고 흐르는 게 분명해요. 손에 든 동화책을 얼른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고 싶은데,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니까 너무 갑갑하지 뭐예요. 스포츠 선수들은 원래 모두 답답하고 찝찝하고 짜증나고 신경질적인 상태로 살아가는 걸까요? 가끔은 엄마 몰래 안대를 떼고 책을 읽었어요. 들키면 엄마한테 혼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시력이 없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건, 그러니까, 어제까지는 최신 휴대폰 카메라로 세상을 보다가, 갑자기 오늘부터 2000년대 초반 폴더폰으로 돌아가라는 것과 비슷해요. 밝고 생생한 세상에서, 어둡고 칙칙한 세상으로의 이유없는 몰락. 이 흐릿한 몰락을 버텨야 앞으로의 내 세상이 선명해질 거래요.
제가 쓰는 안대는 해적 안대처럼 끼웠다 빼는 게 아니라 뗐다 붙이는 접착식 안대예요. 테이프 만드는 회사에서 제조하는 건데, 피부색이랑 비슷해서 붙이고 있으면 오른쪽 눈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요. 기왕 만들 거면 좀 예쁜 분홍색이나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주지, 왜 이런 식으로 만들었나몰라. 밴드같은 안대를 붙이고 밖에 나가면 누군가는 꼭 눈병 걸렸냐고 물어봐요. "이쪽 눈이 약시라서 가림치료 해야 돼요"라는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주 못 봤어요. 기대하던 답이 아니었나봐요. "시력이 안 좋아서요" 같은 설명도 도움은 안 됐어요. 급행 버스를 타고 다니는 쾌속 도시의 시민들은 대번에 납득 가능한 설명을 원해요. 그래서 여섯 살의 저는 여섯 단어짜리 거짓말을 배웠어요. 다래끼 났어요.
가림치료를 처음 시작하는 아이는 눈을 뜨고 있는 내내 안대를 붙이고 있어야 해요. 거기다가 안경도 껴야죠. 안경을 안 끼면 가림치료를 하는 의미가 없다나 뭐라나. 안경도 끼기 싫은데 안대까지 쓰라니까 죽을 맛이에요. 엄마가 그러던데, 할머니도 제 눈이랑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본대요. 약시는 아니지만, 나이가 들면 원시가 된다고 했어요. 저는 여섯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할머니 눈이잖아요. 갖고 태어난 눈인데 어쩌겠어, 같은 체념이나, 열심히 눈을 훈련해서 시력을 향상시켜야지, 하는 의지는 여섯 살짜리에겐 너무 고차원적인 얘기예요. 외눈 6세는 그저 궁금할 뿐. 내 눈은 왜 다를까?
저는 운 좋게도 멀쩡한 집에서 자랐어요. 유치원 숙제로 가계도를 그려 본 적이 있거든요.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이모, 삼촌, 외삼촌, 그리고 수많은 사촌들... 제가 그린 가계도엔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가로세로 선을 따라 이어져 있어요. 성격이 좋다곤 할 수 없지만 특출나게 모난 구석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요. 사촌들은 제 눈을 보고도 놀리지 않았고, 어른들은 안경 끼고 책을 잘 본다며 칭찬해주셨어요. 사람을 외모가 아닌 행동과 말로 판단하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요. 우리 아빠의 누나, 그러니까 제 큰고모는 신을 믿지 않아요.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데 누굴 믿겠냐고 하세요. 하지만 저는 신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세상을 만든 사람이 있다면, 제 눈이 왜 이렇게 됐는지도 알려주실 거니까요. 기왕이면 제조물책임 좀 져 주세요. 빠른 AS 부탁드려요.
눈이 두 개가 있는 건 원근감이랑 입체감 때문이래요. 한 눈으로도 살아갈 순 있지만, 세상을 3차원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해요. 어둡고 칙칙하고 흐릿한 평면적인 세상에서 밝고 생생하고 선명한 입체적인 세상으로 가는 건 분명 좋은 일인데, 그 과정이 험난해 보여요. 가시밭길은 아니라도 레고 깔린 복도 정도는 될 것 같아요. 레고를 치우면 평평한 바닥만 남겠죠. 레고가 재밌긴 한데, 만들기 귀찮단 말예요. 바닥 같은 평면에서만 존재할 순 없을까요? 스포츠맨십 같은 거 모른 채 그냥 게으르게 살면 안 되나요? 하나님의 도성에 닿지 못한 질문들은 여전히 머리 곳곳을 헤매요. 모두가 3D 세상을 살아갈 때 나 혼자 2D 생활하기, 유튜브 소재로 딱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