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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승영 Oct 08. 2024

걸어다니는 굴절이상

복시랑 약시랑 원시랑 사시랑 근시랑 난시

이 모든 사건은 문화예술회관 계단에서 시작됐어요.


그날도 여느 주말과 같이 평화로웠답니다. 엄마랑 문화예술회관에 소풍을 갔어요. 제가 태어날 때 지어진 문화예술회관은 동네 주민들의 만남의 광장이에요. 햇볕이 내리쬐는 예술회관 계단 위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저마다의 추억을 쌓고 있었어요. 아마 제가 여섯 살 때였거예요. 어른 세 명이 간신히 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돗자리 위에서 세상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요. 주6일제 7to7의 살인적인 스케줄 속에서 딸과 함께 모처럼의 휴식을 만끽하던 엄마는, 갑작스레 이런 말을 듣게 돼요. "엄마, 나 저기 간판이 개로 보여."


그 순간 엄마의 세상이 두 번째로 무너졌대요. 엄마는 수소문 끝에 지역에서 제일 가는 안과의사를 찾아내셨어요. 저는 영문도 모른 채 미로 같은 대학병원에 끌려가서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죠. 의사 선생님께서는 제 왼쪽 눈을 '약시'라 이름붙이셨어요. 엄마, 약시가 뭐야? 약시는 시력이 약하다는 말이야. 시력이 왜 약해? 음, 엄마도 잘 모르겠어. 안과 용어가 참 신기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나요. '약'자가 들어갔는데 약도 주사도 필요가 없다니. 대신 가림치료라는 것을 해야 한다나? 양눈 시력이 차이나는 엄마가 남몰래 눈물을 훔치셨다는 이야기를, 스무 살이 넘어서야 전해 들었답니다.


아차, 엄마의 세상이 첫 번째로 무너진 날은 언제냐구요? 지역에서 제일 가는 소아청소년과 교수님이 저를 두곤 "이 아이는 커봐야 140대 후반 정도 될 거예요"라고 말씀하신 날이래요. 아이를 멀쩡하게 키우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뭐, 요즘 세상의 잣대를 들이민다면 멀쩡하다는 표현이 멀쩡하게 들리지 않을 것 같긴 해요. '멀쩡하다'는 건, 흠이 없고 온전하다는 뜻이니까요. 세상에 결함 없는 사람이 존재하겠냐만, 그래도 내 아이가 대한민국 성인 평균 키에, 평균 시력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게 부모 마음 아니겠어요. 키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엄청나게 많지만, 여기서는 눈 이야기만 할 거예요. 약시 말고도 뭔 이상한 ''자가 증식하는 곰팡이마냥 생겨났거든요.


아까 제가 간판이 두 개로 보인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물체가 두 개로 보이는 건 '복시'라고 한대요. 약시복시사시가 보통 짝지어 다니는데, 뭐 때문에 뭐가 생기는지는 까먹었어요. 제 눈에는 무슨무슨 가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종종 헷갈려요. 복시약시원시사시근시난시랑.. 더 있었나? 써놓고 보니까 참 귀여운 단어를 모아둔 것 같아요. 제 눈은 이 모든 걸 버티며 기어코 살아남은 생존자, 아니지, 생존안(眼)! 멋있지 않나요? 가로길이가 삼 센치도 안 되는 이 작은 기관이 수많은 난관을 헤쳐나가다니. 그래서 지금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제가 지나온 수많은 이상, 그러니까 복시약시원시사시근시난시라는 굴절이상에 관한 이야기예요. 몇 개는 여전히 진행중이구요. 비행기 조종은 금지된 눈이지만 자동차 운전은 무리없이 할 정도의 시력이 되니까, 어느 정도 극복한 셈이지 않나요? 세상이 기대하는 영웅적인 서사는 아니지만요.


간판이 두 개로 보인 날로부터 이십 년이 지났어요. 지금 제 두 눈은 교정 시력이 0.8 언저리에 있어요. 왼쪽 눈은 복시약시원시인데 사시수술을 했고, 이제 복시는 사라졌어요. 오른쪽 눈은 근시난시가 세트로 있어요. 아마 왼쪽 눈에도 난시가 있을 거예요. 어찌 됐건 뭐가 뿌링클이고 뭐가 황금올리브인지는 구분할 수 있는 눈이에요. 모두 이 정도 문제는 안고 사는 거 아니겠어요? 치아교정을 하던 친구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너는 치과 안 다녀서 좋겠다." 맞아요, 저는 눈에 상당히 많은 골칫거리를 몰아넣은 탓에 이빨은 고르게 잘 자랐답니다. 사랑니도 없어요. 부럽죠? 어금니가 한 개 부족하긴 한데 이빨은 고르게 났으니까 이정도로 만족할래요. 안과로 충분해요.


의학 용어를 죽 늘어놓긴 했지만, 저는 안과의사가 아니라 20년째 안과를 다니는 환자일 뿐이랍니다. 문과 수능을 보고 대학에선 경영학과를 전공했어요. 부동시성 약시니 안검내반이니 하는 용어는 여전히 무슨 소린지 감도 안 와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게 내 눈인걸. 잘 관리하지 않으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질환에 속한대요. 저, 액티비티 활동 정말 좋아하지만 사격장엔 발도 안 들여요. 한 곳만 집중해서 보다가 사시가 재발할까봐요. 유난스럽죠? 그렇게라도 해야 미래의 내 눈에 조금이나마 떳떳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살아요. 안경 끼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 이제는 나름 잘 끼고 다녀요. 어른스럽죠? 고백하자면, 엄마랑 이것 때문에 많이 싸웠어요. '공부해라'도 아니고, '안경껴라', '양치해라'라는 잔소리를 하는 엄마의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기도 해요.


제가, 자랑은 아니지만, 남들보다 안과는 좀 자주 가봤어요. 2주에 한 번 가던 게 한 달에 한 번, 반기에 한 번... 가림치료를 나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눈이 꽤 좋아지고 있었거든요? 이제는 멀쩡한 눈이 될까 하는 기대도 잠시, 열네 살 이후론 병원에 갈 때마다 눈이 나빠지더라니까요. 보건복지부 산하의 무슨 기관이 그러던데, 눈은 우리 몸에서 가장 빨리 노화가 찾아오는 기관이래요. 어휴, 이빨은 임플란트라도 되지, 100세 인생에 눈은 어떡하란 말인지 원. 안구를 틀니처럼 자유자재로 갈아끼울 수 있는 세상은 언제쯤 오려나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제부터 간판이 두 개로 보이던 아이가 멀쩡하게 세상을 보게 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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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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