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결핍에 관한 성장 보고서
'은중과 상연'이라는 넷플의 15부작 드라마를 이틀 만에 끝냈다. 마침 감기에 걸려서 침대에 누워있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드라마는 은중과 상연, 절친이었던 두 여자의 10대부터 40대를 흐르는 긴 시간 동안의 우정과 사랑 미움과 원망 동경, 질투의 서사를 두 번의 절교와 다시 만나서 죽음의 여정에 함께 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담아 섬세하고 디테일한 심리 묘사와 함께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두 여자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와서인지 학창 시절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여자들의 다툼 화해 우정 등 소소한 에피소드들에 공감이 가기도 하고, 다른 드라마였다면 빌런으로 등장해야 마땅할 상연이란 캐릭터를 선 악의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미워할 수만은 없는 입체적인 인물로 그린 것에 흥미가 가기도 하는 웰 메이드 작품이었다.
은중의 첫사랑이자 두 여자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는 상연의 오빠인 천상학의 죽음이 '성정체성으로 인한 고민'이라는 키워드가 좀 진부하긴 했지만 그것이 밝혀짐으로써 은중의 남친이 상연의 아픔에 동감하게 되고 마음이 흔들리는 큰 비밀의 열쇠가 된다는 점에서, 드라마의 충격적인 소재를 찾으려니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단순히 스토리를 따라가면 이 드라마는 여자들의 선망과 동경 그 안에 숨어있는 질투와 열등감을 아우르는 우정과 사랑, 애증의 얘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이 이야기를 바라보고 싶다. 그것은 바로 관계와 결핍에 관한 얘기이며 그것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성장 보고서라고도 볼 수 있다.
드라마의 두 축을 담당하는 주인공 중 한 명인 은중은 어릴 때 아빠가 사고로 돌아가셔서 단칸방에서 편모슬하에 어렵게 자랐기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만 밝은 성격의 평범한 아이다. 오히려 은중이 그렇게 부러워했던 (다른 한 축인) 상연은 할아버지가 장관인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뛰어난 머리와 예쁜 외모 다재다능한 재능까지 다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은중을 향한 질투에 시달려서 자기 파괴적으로 살아간다.
극은 은중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고 그녀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끌고 가기에 우리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인 은중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볼 수밖에 없다. 은중은 어려운 환경에서도 너무도 밝게 자라나서 상연을 끝까지 도우려 하고 이해하려고 했던 긍정적이고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그와 대비된 상연은 절친의 남친을 뺏으려 하고 그녀의 작업물까지 가로채서 성공에 이르는 천하의 ㅆㄴ(이름도 발음이 비슷한 상연이다 ㅎ)으로 나온다.
물론 작가는 상연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감정선까지 디테일하게 따라가도록 전개시키기에 무조건 그녀를 나쁜 년이라고 욕할 수만은 없게 만든다. 그것이 이 드라마만의 강점이기도 하고..
그러면 은중과 상연이 그렇게 다른 성격으로 자라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상연은 자존심도 세고 남에게 도움받는 것도 싫어해서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타고난 기질일 것이다.
그런 그녀와 대비되는 여린 은중의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반장인 상연이 아이들 앞에서 손바닥을 때려서 억울하게 맞은 것을 항의하는 은중에게 그럼 너도 때리라고 말하며 리코더를 내미는 부분이다. 은중은 '리코더는 나무보다 딱딱해서 그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아냐'며 차마 때리지 못한다.
그때 상연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은중을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연의 심리 안쪽에 자리 잡은 깊숙한 열등감의 뿌리에서 모든 얘기가 발화된다. 자신과 너무도 다른 은중, 그런 너그럽고 관대한 성격으로 인해 모두에게 (하다못해 자신의 엄마와 오빠, 가장 사랑했던 첫사랑까지) 사랑받는 그녀를 향한 열등감과 결핍이 상연을 자기 파괴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이끌어 낸 것이다.
은중의 그런 성격은 아마도 타고 난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두 아이의 엄마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 은중은 하루 종일 쫑알거리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엄마에게 털어놓는다. 엄마는 일을 하는 바쁜 와중에도 그 말들에 판단을 하지 않고 응 그랬구나.. 힘들었겠구나 하는 식으로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그에 반해 은중이 가장 존경하는 상연의 엄마인 윤현숙 선생님은 교육자로서 자기 아이들에게 조차 사사로움이나 치우침 없이 공정하고 명백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공명심이 강한 분이었던 것 같다.
은중이 떠들었다고 오해해서 매를 든 상연의 손바닥을 때리며 너도 얼마나 아픈지 맞아보라고 하는 모습을 보며, 정말 좋은 분이지만, 선생님이 시켜서 그랬다며 억울해하는 딸에게는 가혹한 엄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님으로서의 그녀는 아빠 없는 은중이 학교에서 놀림받고 슬퍼할 때 결정적인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녀가 내성적인 성격에서 탈출하여 밝고 긍정적인 아이로 자라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한다.
아빠가 없어서 생긴 텅 빈 부분을 너만의 것으로 채우면 그로 인해 결국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조언해 준 덕분에 은중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상연의 오빠인 은중의 첫사랑이자 짝사랑 상대인 천상학도 친동생이 본 평소의 과묵하고 말이 없는 성격과는 달리 은중에게만은 따뜻하고 다정하게 대해준다. 자신의 가난한 집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 은중에게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본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친밀해야 할 가족인 상연에게는 다가갈 수 없이 차가워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한 두 사람으로 인해, 은중은 세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솔직히 상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불행으로 치닫는 환경과 비극적인 처지는 상연과 비슷해서(아빠와 오빠의 죽음과 암에 걸린 것까지) 그녀에게 감정이입 되기 쉬웠지만 오히려 난 은중과 비슷한 성격이기에 상연이 왜 굳이 저렇게 자존심을 부려가며 자기 파괴적으로 미워하고 질투하며 살아야 했을까 그냥 은중이라는 좋은 친구를 곁에 두고 서로의 성공을 응원하며 살 수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피상적인 관점이 아닌 상연의 입장에서 더 깊숙이 들어가 보니 은중은 절친이자 평생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사랑을 다 가지고 있는 선망의 대상이면서 또한 지독한 열등감을 안겨주는 양면성의 존재였기에 그녀는 더 괴로웠던 것 같다. 은중의 따뜻한 성격으로 인해 밉지만 미워할 수도 없어서 차라리 싫어할 이유를 억지로 찾아내고 그녀에게 위악을 부리며 자기를 미워하게 만드는 상연이 안타깝고 불쌍하게 느껴진다.
오빠가 가장 아끼는 라이카 카메라를 자살하기 전에 유서처럼 동생이 아닌 은중에게 남겨준 것도, 무엇보다 일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마저 은중에게 빼앗겨 버렸던 것이 상연에게는 커다란 상처였다.
상연이 느끼기에 학교 친구들, 엄마와 오빠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김상학이라는 첫사랑마저 은중은 다 가지고 갔다. 모든 문제의 원인과 답은 지독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깟 남자가, 사랑이 뭐라고 그렇게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단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마저 배신하고 홀로 고립되었던 것일까..
상연에게 김상학은 그냥 단순한 첫사랑의 존재가 아니었다. 자신을 죽음과도 같은 어둠에서 끌어낸 사람, 가장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손을 내밀어준 구원과도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비록 김상학은 온라인 속에서 그녀의 존재조차 모른 채 단순히 채팅으로 만났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렇게 서로 존재의 의미가 각자 다른 층위에서 자리 잡게 될 때 비극이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업을 핑계로 밖으로 돌고 결국 망해서 부모님의 이혼이라는 아픔을 주었다. 그 후에도 상연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 돈을 뜯어가는 나쁜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엄마는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지만 자신보다 오히려 은중을 더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빠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많이 외로웠을 것 같다. 오빠가 죽고 난 후 유일하게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 상학마저 잃었으니까..
마지막에 은중이 어떻게 엄마가 너가 아닌 날 더 예뻐하시는 줄 알았냐고 물으니 상연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냐고 반문하는 은중에게 상연은 '아이가 한번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그렇게 돼버리는 거야'라고 말한다. 난 이 대답이 상연의 모든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을 설명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나는 엄마가 아픈 오빠와 차별하며 많은 상처를 주었을 때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물론 그에 반해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며 너무나도 희생적인 엄마의 모습들은 이율배반적이어서 내 논리의 모순 속에서 혼란스러웠던 아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자신의 핏줄이어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닌 누구라도 엄마의 자식이라면 대체될 수 있는 거고 만약 산부인과에서 자식이 바뀐 걸 알았다면 엄마는 언제라도 날 버릴 사람이다. 왜냐하면 엄마는 '엄마의 딸'이 아닌 나란 사람 자체를 싫어하니까.. 어떤 노력을 해도 엄마에게 난 사랑받을 수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핏줄이기 때문에 할 수없이 주는 동정 같은 사랑은 나 스스로 거부하고 싶었다.
이것이 얼마나 짧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는 내가 훗날 아이를 낳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이 아이들이 단지 내 핏줄이라서 사랑하는 것일까.. 아이들을 내 품에 안고 키우고 눈과 입을 맞추고 한없이 사랑을 쏟아붓고 교감하며 아이들에게 준 아낌없는 사랑과 오히려 그 아이들을 통해 내가 받은 무한한 사랑을 어떻게 핏줄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갈음할 수 있을까.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상연은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은중의 프로젝트를 훔쳐 간 상연에게 은중은 '누가 널 끝내 받아주겠니' 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저주와 같은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그 말이 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연은 1년 만에 파탄 난 결혼도 그 후로 6년을 끌어가며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다고 얘기한다. 아이를 통해 채우려 했던 결핍도 끝내 이룰 수 없었다.
상연은 강한 자존심에 비해 내적인 불안과 열등감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목말라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은중을 좋아하면서도 밀어내고 더 위악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자기 같은 사람은 언젠가는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일지도 모른다. 강한 척하면서, 버림받기 전에 자신이 먼저 버리는, 아니 버림받을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도망가 버리는 자기혐오일지도..
상연은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진실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고 은중에게 사과하며 서로 화해한다. 만약 이 죽음이란 과정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아이가 그렇게 바라본 세상이 결국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어쩌면 상연은 모든 좋은 조건들을 외면하고, 가질 수 없었던 첫사랑인 상학만을 바라보며 스스로 파괴적인 운명의 길을 걷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외로움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 시절 화장실이 두 개나 있는 아파트에서 재래식 변소가 딸린 월세 8만 원의 단칸방으로, 최상의 위치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처지보다 그녀를 외롭게 만든 것은 의지할 수 없는 아빠의 존재, 충족되지 않는 엄마의 사랑, 오빠의 죽음 앞에서 오직 하나의 구원이라 믿었던 사랑마저 빼앗겼다는 상실감이 아니었을까.. 그 결핍을 채우려 친구가 가진 것을 빼앗고 다시 높은 꼭대기에 오르지만 끝내 채울 수 없었던 것은 사랑받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랑은 은중과의 진실한 우정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성연은 은중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너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은중과 상연 두 여자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삶은 어디에서부터 달라진 것일까
은중은 어린 시절 상연의 집에 '너는 참 좋겠다'란 스티커를 붙여 놓았지만 동경하고 선망하되 원망하지 않았다. 은중의 성격이 좋아서 그녀의 운명을 밝게 이끌어간 것도 있겠지만 상연의 말대로 은중은 운이 좋았을 수도 있다. 상연과 같은 불행과 고통을 겪지 않았고 그녀의 곁에는 항상 따뜻한 엄마와 응원해 주는 친구들 그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상학이 있었다.
그에 비해 먼저 사랑했던 사람마저 친구에게 뺏기고(사실 은중이 뺏은 건 아니지만 상연은 은중이었기 때문에 포기했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상학을 가졌을 거라고.. 아마도 은중이 아니었다면 상연은 분명히 상학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상연이 뺏겼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상학은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상연이 먼저 고백하면서 매달리기도 하고 은중에게 제발 그를 만나지 말아 달라고 울면서 억지를 부리게 만드는 그녀의 인생에서 유일한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런 사랑을 잃어버리고 불행의 연속인 상연의 삶은 연민이 간다. 하지만 사랑받기 위해 그토록 사랑을 주는 친구마저 밀어낸 상연의 모순적인 태도는 그녀 곁에 아무도 남겨놓지 않았다. 결국 그녀를 받아준 것은 그녀가 배신하고 그토록 밀어내었던 은중이었다. 상연은 은중에게 말한다. '네가 날 받아주는구나 끝내 네가..'
우리는 심연에 있는 외로움과 결핍으로 인해 상연처럼 가질 수 없는 사랑을 갈구하며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밀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중한 것은 주위에 있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은 은중이 상연의 집에 붙여놓은 스티커처럼 '너는 참 좋겠다' 한마디로 가볍게 두고 내 길로 일어서 가야 한다. 선망이 원망이 되지 않게.. 그것은 각자 선택의 몫이다.
은중과 상연 두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지나온 삶과 나를 돌아본다. 스위스로 가서 조력사망을 택한 상연과 그 곁을 지키는 은중을 보며 죽음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암이란 병이 남일 같지 않기에 더 깊이 와닿았던 것 같다. 상연과 같은 고통 속에 있다면 크리스천이라 결코 내 손으로 삶을 단축시키진 않겠지만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기도보다는 평안히 데려가달라고 기도할 것 같기도 하다. 그 끝에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였으면 좋겠다.
짧은 생애 뭘 그렇게 집착하고 가지려고 아웅다웅 하나.. 세상 것들은 떠나버리면 그만인 것을.. 이런 초월자적인 생각이 들다가도 한번뿐인 삶이기에 더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 밤이다. 죽음이 바로 코 앞에 이르면 상연처럼 결국 그것조차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겠지만..
결국 사랑이 답이 아닐까.. 남녀 간이든 부모 자식 간이든 친구들의 우정이든 사랑을 주고받을 때 우리 삶은 의미 있어지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은 열심히 사랑을 주고받으며 살아야겠다.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내 주위에 있는 평범한 일상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다 보면 상연과는 달리 결국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