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불을 피해 대피한 날

캘리포니아 역사 상 최악의 화재를 겪으며..

by 유리

새벽 5시에 'evacuation warning'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커다란 창문이 어찌나 덜컹거리는지 깨질 수도 있다는 걱정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밤이 이틀이나 지속된 상태였다. 오리 두 마리가 살고 있는 케이지도 날아가버릴까 봐 두렵고 백 야드의 펜스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몇 년 전 몰아친 강풍에 시부모님 댁 정원에 있던 어른의 팔로도 다 안을 수 없을 만큼 두터운 기둥의 무성한 잎으로 뒤덮인 커다란 나무가 쓰러진 적도 있어서 어머님댁은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다.


며칠 동안 무섭게 불어대던 바람이 결국 일을 내고 말았다. 바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작게 시작되었던 화재가 세찬 강풍을 타고 하루 만에 엄청난 속도로 번져서 결국 이곳까지 대피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지대가 높고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는 늘 산불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이번에도 겨울마다 연례행사처럼 지나가는 작은 화재인 줄 알았다. 그 산불이 1분에 축구장 5개 면적을 태울 만큼 무서운 속도로 번져서 캘리포니아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었다. 산에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이 우리 집에서도 보일만큼 가까워졌다.


대피를 위해 귀중한 물건들을 여행 가방에 담기 시작했다. 그이와 연애 때 주고받던 편지들과 선물들은 슬프게도 얼마 전 집안 대청소 중 우리 아들이 실수로 버렸기에 남아있지 않았고 아빠의 유품과 가족사진이 보관되어 있는 external hard drive와 여권을 비롯한 각종 서류들.. 결혼 패물, 그이가 사준 다이아몬드 목걸이들과 돌에 받은 금반지들 그뿐이었다.


평소에 하고 다니던 액세서리들보다 아이들이 어릴 때 내게 선물해 주었던 장난감 같은 가짜 반지 목걸이 등이 눈에 띄었다. 가지고 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것만 챙겼다. 추억은 돈으로 살 수 없으니까.. 비싼 것도 별로 없지만 옷 명품백 구두 화장품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집안에 쌓인 물건들은 많은데 막상 가지고 나가는 것들은 단출했다. 우리가 필요도 없는 것들을 많이 소비하며 살았구나 느껴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와서 길 건너 시부모님 댁으로 가니 바람에 기둥이 꺾인 정원의 나무들이 지난밤의 혼란을 말해주는 듯했다. 시부모님과 함께 옆동네인 막내 시누이 집으로 대피했다. 그곳도 전기는 끊겼지만 아직 대피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고 매캐한 연기로 뒤덮인 공기를 우선 피할 수 있었다.


솔직히 불이 우리 집까지 내려올 거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우리 집은 산 위가 아닌 아래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산 위에 사는 집들을 동경하기도 했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그 꿈은 접는 게 나을 것 같다.


한국의 산동네와는 달리 미국은 높은 곳에 살수록 산꼭대기에 가까울수록 몇 밀리언달러의 저택들이 가득한 부촌을 이룬다.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 동네인 La Canada는 백 야드에 테니스 코트와 수영장 농구장을 가진 집들이 즐비하다. 우리 집은 산 아래에 있어서 피해가 없었지만 아이들 학교 친구들 중에 집이 전소된 애들도 있어서 너무 충격이었다. 그중 한 명은 키오니와 함께 노는 친한 그룹의 일원이었다.


부자라고 해서 집을 잃은 슬픔이 없는 것은 아니기에 키오니 친구들이 돈을 모아서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고 한다. 몇 밀리언달러 홈을 잃은 상처에 그 돈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함께 하려는 마음이 기특해서 우리도 많진 않지만 어머님과 함께 약간의 성의를 보탰다. 몇백 불로 치유될 수 있는 아픔은 아니지만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시누이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어제는 시부모님께서 온 가족 모두 버뱅크에 있는 호텔을 예약해 주셔서 그곳에서 잤다. 시누이 가족들과 함께 대가족이 호텔에 머물고 다 같이 식당에 가니 마치 여행 온 것 같기도 한데 기분은 완전 달랐다. 피해 입은 사람들 걱정에 침울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틀을 예약했는데 다행히 라카나다에 전기가 들어왔다는 기쁜 소식이 들렸다. 곧바로 하룻밤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인터넷은 되지 않고 백 야드의 펜스는 강풍에 무너져버렸다. 그래도 집에 오니 마음이 놓인다.


타오르는 불길에 살아갈 터전이 한 줌 재가 되어버려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남자가 우리 집은 괜찮은지 안부를 물었다. 그는 집을 잃었다고 했다. 'I'm so sorry..'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떤 말로도 그 비통한 마음을 달랠 수 없을 것이다. 부디 신의 가호가 있길.. 주님께 기도할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꿈꾸는 자와 막아서는 사람들과 꿈을 잃어버린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