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의 추억, <섬머타임 킬러>
<섬머타임 킬러>는 동네 친구들과 같이 보러 간 영화다. 동네 친구라고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한두 해 선배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초등학생 그리고 중학 초년생이었다. 우리보다 조금 위 선배들이 보고 와서 얼마나 법석을 떠는지 궁금하다 못해 참을 수 없어서 시도한 일탈이었다. 첫 장면을 보면서부터 여태까지 보던 영화와는 다르구나, 라는 충격으로 시작한 영화이기도 했다.
<섬머타임 킬러>는 우리나라에서는 대단한 흥행 성공작이라고 들었다. 동네 꼬마들에게까지 여파가 미친 걸 보면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장면 장면마다 요즘 시쳇말로 임택트 있다, 라는 이야기로 들끓었다.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는 영화에 대한 호기심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었다. 물론 그때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 – 허시라는 표기도 있지만 예전부터 쓰던 표현이라서 - 나 크리스토퍼 미첨(Christopher Mitchum)이란 배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이미 이름이 알려진 올리비아 핫세였지만 열두서넛 또래 남자애들에겐 미지의 여인이었기에 오히려 까만 선글라스를 걸치고 킬러로 등장한 금발 청년의 액션이 화젯거리였다. 열 살을 넘긴 정도의 머슴애들을 동네극장으로 끌어들이는 시발점은 바로 그곳이었다.
<섬머타임 킬러>의 이야기는 두서너 살 많은 정도의 동네 형들로부터 심심하면 들었다. 잔혹한 장면이 많다는 얘기와 오토바이 액션이 대단하다는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남자주인공이 참 멋있다는 얘기도 많이 했었다. 금발에 앳된 얼굴이란 외모부터 주의를 끄는 데에다 능수능란하게 모터사이클을 몰고 다니는 퍼포먼스에 반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남자주인공의 매력에 그 정도로 붙잡히지는 않았지만, 모터사이클로 벌이는 액션 장면은 그런 걸 처음 봐서인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런 탓에 그의 액션을 기대하고 보러 갔던 영화였지만 거기에 더한 감상적인 분위기에 묘한 매력이 느껴졌던 영화였다.
<섬머타임 킬러>는 관객의 흥미를 끄는 데는 성공한 영화였지만 평단의 관심을 끈 영화는 아니었고, 스펙트럼 넓게 마음을 울린 영화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한동안은 잊고 지냈다. 어느덧 세상이 변하여 비디오테이프라는 매체로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조악한 화질 때문이었는지 그때는 그냥 다시 봤다는 정도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DVD라는 매체로 다시 만났을 때가 돼서야 그 영화가 이런 영화였구나, 라고 생각하며 보았으니 그제야 헤어졌다 다시 만난 반가운 느낌이었다.
<섬머타임 킬러>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줄리엣이었던 올리비아 핫세라는 배우가 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로미오와 즐리엣>은 명성이 제법 따랐던 영화이기에 본인의 특별한 의지에 기대지 않더라도 볼 기회를 잡기 쉬운 영화다. 하지만 <섬머타임 킬러>는 그만큼의 명성을 가진 영화가 아니기에 스스로 작정하지 않으면 동기 부여가 쉽지 않았는데 줄리엣의 타계라는 슬픈 이유로 그 기회를 잡은 셈이다. 미모로 유명했던 올리비아 핫세의 이십 대 초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 <로미오와 줄리엣> 외에 우리나라에 알려진 영화는 <섬머타임 킬러>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크게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오랜만에 작정하고 영화를 보고 있다 보니, 이 영화가 당시에 그만큼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예쁘고 잘생긴 청춘 배우들의 인기 덕분이었을 거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때 크리스토퍼 미첨은 전혀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고 올리비아 핫세는 어린 줄리엣으로 알려져 있었을 뿐 소위 돈이 되는 배우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그래서 제1 주연으로 이름을 내세운 배우는 칼 말덴(Karl Malden)이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조역으로라도 유명한 배우여서 그랬겠지만, 그 역시 이름으로 관객을 동원할 배우는 아니었다. 이름이 알려진 배우를 들자면 타냐(올리비아 핫세)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던 이탈리아 배우 라프 발로네(Raf Valone)와 <007 썬더볼 작전 (1965)>에 본드걸로 등장했던 클로딘 오제(Claudine Auger) 정도를 들 수 있지만 그들 역시 이름으로 관객 동원에 공헌하기는 어렵다. 그런 걸 보면, 이 영화는 배우에게 관객 동원을 책임 지우겠다는 기획으로 시작된 영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지나도 당시 주연을 맡았던 두 청춘 남녀 배우에게만 눈이 갈 수도 있다.
영화를 다시 보니 역시 베테랑의 역할이란 무시할 수 없다는 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허투루 보았던 칼 말덴의 역할 카일리가 극의 중심을 잘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섬머타임 킬러>는 촘촘하게 잘 짜여 있는 서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복수를 실행에 옮기는 래이(크리스 미첨)와 그 상대편 사이의 균형을 조율하듯 극의 전개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역할을 카일리(칼 말덴)가 해내고 있다. 최종적으로 래이와 타냐의 사랑을 이어준 대가까지 본인이 치르면서. 즉 이 영화의 시작부터 대단원의 막이 내릴 때까지 필요할 때 나타나서 할 일을 해냄으로써 첫 번째 주연으로서의 이름값을 제대로 해낸 것이다.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던 올리비아 핫세의 역할이었던 타냐도 시대를 생각하면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는 캐릭터였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주연이라고 하더라도 여성이 해내는 역할의 폭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타냐는 선생과의 사랑에 이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려는 킬러와의 사랑도 불사하는 여성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타냐라는 캐릭터에 초점이 맞춰진 내러티브는 아니었지만 예쁘고 순종적인 인물로만 등장하기 쉬웠던 전형적인 여주인공과는 분명히 다른 면이 있었다. 하지만 래이와 타냐의 사랑은 납치범과 피랍자라는 극단적 관계 간에 벌어진 것이어서 타냐라는 캐릭터가 보여줄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올리비아 핫세라는 배우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것이다. 캐릭터는 분명했지만 그리 많은 여백이 주어지지 않았던 게 지금 보니 아쉬운 면이다.
당시로는 생소한 배우였지만 로버트 미첨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었던 크리스토퍼 미첨이 이 영화에서는 세 번째로 이름을 올린 배우였다. 영화 <섬머타임 킬러>는 단적으로 범죄 액션 장르로 분류할 수 있는데, 거기에 들어있는 단어 ‘범죄’와 ‘액션’을 해내야 하는 역할이 그의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미 배역에서부터 <섬머타임 킬러>는 래이(크리스 미첨)가 활약해야만 하는 구도의 영화였던 셈이다. 여기서 래이는 사람을 단번에 죽이는 킬러로 등장하기에 범죄 캐릭터 그 자체였고, 액션은 총격전 그리고 모터사이클 레이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건플레이(Gunplay) 액션이라면 터무니없이 화려한 스파게티 웨스턴 스타일과 무자비하게 강력한 더티 해리 스타일을 들 수 있는데, 이 영화에 나오는 건플레이는 그것에 비할 바는 못된다. 하지만 초점은 수줍은 듯한 미소와 슬픈 듯한 눈매를 가진, 금발의 앳된 청년이 그러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 동기는 너무도 뚜렷하고 충분히 공감하고 싶은 데에 있었다. 아버지를 잔혹하게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니까. 거기에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며 같이 놀아주는 다정한 면을 오프닝 타이틀에서부터 보여주며 시작했으니, 관객들은 그가 비정함에만 충실한 인간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묘기를 부리듯 모터사이클을 몰고 다니는 재주까지 겸비하였으니 금상첨화일 수밖에. 어쩌면 연기의 설익음이 수줍음의 연기로 보였을지 모를 정도로 래이라는 캐릭터는 크리스 미첨에게 어울린다.
그때 보나 지금 보나 <섬머타임 킬러>의 성공은 크리스 미첨이 래이 캐스터라는 주인공 캐릭터에 딱 맞아떨어진 결과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섬머타임 킬러>를 다시 보면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의 복수도 그들의 사랑도 거기까지만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런 결말을 시쳇말로 열린 결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미적지근한 마무리로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 아쉽다. 나름의 지점까지는 엮어서 내놓는 게 더 속이 찬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은 죽고 살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같은 상황적 결말을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영화가 얼마나 고민했는지에 따라 관객의 마음에 더 큰 흔적을 남길 것 같아서다. 세상의 빛을 본 지 반세기 가까이 지난 영화를 두고 새삼스러운 생각이 드는 건 생뚱맞기도 하다. 하지만 그 속에 있었던 배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다시 보니 획이 분명한 마무리였더라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슬그머니 기어 나오는 걸 느꼈다. 괜한 아쉬움까지 토로하는 걸 보니, 이번에야말로 추억에만 기대지 않고 좀 더 진지하게 <섬머타임 킬러>를 보았나 보다.
<섬머타임 킬러>에서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주제곡이다. 당시에 발매되던 모음곡 음반 – 빽판으로 부르던 음반 – 에는 빠지지 않고 실렸던 ‘Run and Run’이란 제목의 노래다. 1998년에는 제대로 된 OST 음반으로 정식 출시된 기사도 보인다. 최근에는 그때와는 다른 이미지의 재킷으로 꾸며진 LP로도 발매되었다. 잊어버리기 힘든 영화로 자리 잡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