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이야기, <망각의 여로>
<망각의 여로>를 처음 접했을 때는 무조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그레고리 펙, 잉그리드 버그만, 알프레드 히치콕이라는 이름 정도는 알만한 때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뭉쳐서 만든 영화라면 무조건 봐줘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었던 셈이다. 그런데, 보다 보니 "세상에! 이런 영화도 다 있네." 신기해하면서 점점 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던 매력적인 영화였다.
처음으로 TV에서 이 영화를 만났을 때의 제목은 <백색의 공포(白色의 恐怖)>였다. 그때 영화를 소개하는 글에는, “존 브라운(그레고리 펙 분)은 백색만 보면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심리 소유자로 살인 용의마저 받게 되는데...”라고 적혀 있으니 상당히 무서운(?) 영화일 거라고 각오하지 않았을까 싶다. 정신과 의사, 살인 충동, 살인 용의자라는 말로 영화의 내용을 상상하자면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 그려지는 데, 거기다 백색이라고 하니 우리나라에서는 귀신이 연상되는 색깔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백색의 공포>는 제법 무섭게 느껴지는 제목이긴 하다. 하여튼 우리나라에 개봉될 때의 제목은 <망각의 여로>였지만, 일본에서는 <하얀 공포(白い恐怖)>라는 제목으로 상영했었다. 그 영향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TV에서 처음으로 방영할 때 <백색의 공포>라는 제목을 사용하는 바람에, 이 영화에는 ‘망각의 여로’, ‘백색의 공포’에 DVD 등을 출시하면서 붙인 제목 ‘스펠바운드’까지 세 개의 제목이 붙게 되어버렸다. 어떤 게 히치콕 감독의 심리스릴러 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제목일까.
개인적으로 <망각의 여로>라는 제목이 제일 좋다. 우리나라에서의 첫 제목이기도 하고, 내용으로 봐도 어떤 사실을 잊어버린 ‘망각(忘却)’ 때문에 주인공들이 걷게 된 ‘여로(旅路)’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니까.
어릴 때는 ‘심리(心理)’라는 단어가 뭔지 모르게 고상하게 들렸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알기 힘들다는 얘기를 엄청 많이 들었던 만큼 그런 걸 과학으로 풀어낸다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그랬던지 <망각의 여로>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모양 자체가 색달라 보였다. 뭔가에 홀렸는지 자신의 정체조차 잃어버린 남자(그레고리 펙)가 헤매고 있는 미로를 정신분석학이나 꿈의 해석이란 용어를 들이대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모양은 신비스러우면서도 과학적이라는 느낌에 대단히 멋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때는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할 때였지만 사람의 꿈을 묘하게 나타내는 장면 또한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나라에서 개봉 당시 <망각의 여로>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 당시에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했었는지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
... 1940년 후기에 한창 유행하던 이른바 "뉴로틱 스타일"의 이상심리를 소재로 한 스릴러인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방법을 응용한 것과 한창때의 버그만의 마스크를 보는 맛이 각별한 흥미. (신영화, 1959년 6월 12일 동아일보)
'뉴로틱(Neurotic) 스타일'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심리적 긴장이나 불안이 드러나는 태도나 표현 방식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신문의 기사를 보면, <망각의 여로>를 시대적으로 유행했던 방식을 따라간 영화로 정신분석도 고급지게 보이려는 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데이빗 O. 셀즈닉의 제작으로 1945년에 감독한 작품으로 당시에 유행하던 이상심리를 다룬 정신분석학적 심리 스릴러. (중략) 이상심리를 다룬 영화를 많이 보아온 이즈음에 와서는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중략) 히치콕 감독의 유희성을 별로 느낄 수 없는 정신분석학의 초보적 해설을 겸한 고급오락영화. (영화장평, 1959년 6월 15일 조선일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영화 <망각의 여로>를 “정신분석 비슷하게 포장한 또 하나의 범인 잡는 영화”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정신분석이니 뭐니 하는 건 그리 쉬운 얘기가 아니니 그런 잣대로 영화를 평가하려 드는 건 사양하겠다는 의도로 들린다. 서사나 이론 전개의 부족에 대한 지적에 에둘러치려고 꺼낸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정신분석을 주제로 영화 만들 생각을 했다는 점만 하더라도 용감한 거 아닌가. 그럴싸하게 보였다면 그걸로도 성공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나저러나 <망각의 여로>는 비평에도 흥행에도 성공한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닫혀버린 인간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심리적으로 접근하려고 애쓰는 모양새에 빠져서 넋을 잃고 봤던 영화였다.
<망각의 여로>를 처음 봤을 때 살짝 아쉬웠던 부분은 그레고리 펙의 역할이었다. 에드워드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다른 영화에서 '고상한 신사'답게 '서부의 사나이'답게 '정의로운 법조인'답게 행등했듯 여기서는 '날카로운 의학자'다운 역할인가 했었다. 그런데 잉그리드 버그만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시름시름 앓는 모습을 보이더니 괴상한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 불안한 모습까지 보이다가 결국 그녀의 헌신적인 도움에 의존하여 자신을 되찾게 된다는 수동적인 역할로 끝나버린다. 예전 영화의 남자 주인공으로서는 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1959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할 때 신문광고를 보면 “과거를 잊은 사나이가 더듬는 사랑과 스릴의 연쇄”라는 문구가 걸려있는 점도 재미있다. 잉그리드 버그만의 이름을 더 위에 더 크게 걸어놓고도 선전 문구에는 남자 주인공을 주어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에도 이름이 위에 걸려있고, 나이도 경력도 위였던 잉그리드 버그만이 실제적인 주인공이었다.
어릴 때지만 이미 그레고리 펙이란 이름을 알고 있을 때, 남자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허약한 모습이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보니 그 자체가 그레고리 펙의 캐릭터였다. 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허덕이며 고생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고, 더 액티브하게 활약해야 하는 역할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것이었다. 관객들이 보기에 더 주인공다운 역할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기도 하지만, 보면 볼수록 <망각의 여로>는 잉그리드 버그만의 영화다. 우리나라 신문광고에서처럼 당시로서는 앞장서는 역할을 주로 해냈던 남자 주인공에게 기대를 걸어보려는 심리가 있었을 뿐 실제적인 주인공은 잉그리드 버그만이 맡았던 콘스탄스 피터슨 박사였다. 의학자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존 발렌타인(그레고리 펙)을 도우려고 애를 쓰는 콘스탄스의 행보를 따라가며 지켜보는 <망각의 여로>였다. 과거도 잃어버린 데다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존 발렌타인의 역할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스는 처음부터 그의 행동거지를 주시하는 역할이었다. 에드워드라는 이름으로 병원에 처음 나타났을 때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하여, 애정을 느끼게 되어 그의 방에 갔던 일, 떠나버린 그를 호텔에서 찾아냈던 일, 치료를 위하여 옛 스승의 집에 데려갔던 일, 기어이 그의 꿈을 해석하여 스키장으로 데려갔던 일, 마지막에 증거를 포착하여 범인과 대적했던 일까지 모든 게 콘스탄스가 해낸 일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콘스탄스 피터스의 활약에 의존하는 서사였으니 존 발렌타인이 희미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그레고리 펙이 존 발렌타인에 어울리는 연기를 잘 해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아쉬웠다는 얘기가 남아있다. 감독 그리고 배우 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볼수록 진하게 느껴지는 구석이 또 하나 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영화의 중심은 “사랑”에 두었다는 생각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정신분석으로 포장한 범인 추적 스릴러라고 얘기했었지만, 아무리 봐도 이건 궁극적으로 사랑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선 두 사람이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점부터가 그렇고, 그런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란 생각에서다. 특히 정신적으로 허약한 존을 지키려는 콘스탄스의 힘은 사랑으로부터 생긴 것이지 의학적 호기심이나 연구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분위기는 콘스탄스가 그녀의 스승인 브룰로프 박사에게 갔을 때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과학을 알 뿐 사람은 모른다. 마음을 읽더라도 진실은 모른다. 말보다 느낌을 믿어달라. 진실은 깊은 곳을 볼 수 있게 만든다. 그는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것이 과학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간단히 말하자면, 과학적 데이터로 관객을 설득하는 이야기가 아니란 것이다. 이미 첫눈에 반했다는 상황부터가 축적된 데이터가 전혀 없더라도 느낄 수 있는 게 사랑이라는 모티프로 시작하겠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기억상실증, 죄책감 콤플렉스, 심리학 등 정신분석학과 연관 짓기 쉬운 용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영화지만, 히치콕 감독의 얘기처럼 그것은 포장을 위한 것이지 정신분석적 결론이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게 아니었다. 학술적 이론이 아니라 영화의 사건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었다는 얘기다. 정신분석학이란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한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존과 얽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리나 꿈을 해석해야 하는 복잡한 면이 보이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항상 순방향으로 쉽게 흘러가는 면만 보인다. 한 사람은 자신이 위험한 살인자일지 모르니까 연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 곁에서 떠나려는 존 발렌타인이다. 또 한 사람은 살인자일지도 모르는 연인을 믿으며 끝까지 곁에서 도우려는 콘스탄스 피터스다. 그런 두 사람의 행동거지를 보고 있으면 여지없이 답이 나온다. 자신의 희생도 불사하는 애틋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어릴 때는 과학적이고 신비스러운 이야기로 보았다가 늦게서야 사랑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처음부터 관객에게 그렇게 선전하고 있었다. 영화 포스터에 큼지막하게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제야 그걸 알아차린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라도 변명해 보고 싶다.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사랑'을 몰랐던 어린 시절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This is Love! Complete... Reckless... Violent!
이것은 사랑이다! 완벽하고... 무모하고... 격렬한!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콘스탄스에게 딱 걸린 범인은 그녀에게 겨누었던 총구를 자신에게 돌리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이다. 흑백인 이 영화에 딱 한 컷 있는 컬러장면이 여기서 사용된다. TV에서 봤을 때는 당연히 몰랐다. 색깔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흑백 화면만 존재하던 흑백 TV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