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와 불신에 가득 찬 정의?

영화 속의 이야기, <탐정 야화>

by 김밥


처음으로 <탐정 야화>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는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사립 탐정 얘기인 줄로만 알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찰을 탐정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으니까. ‘탐정’ 뒤에 ‘야화’라는 단어까지 따라붙으니 더 그랬다. 1956년에 개봉된 작품인데, 왜 ‘경찰’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탐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지 궁금했다. 억지로 추정하자면 역시 흥행 때문이었을까? “탐정이 밤에 벌이는 이야기”라면 더 흥미로워 보이니까. 막상 영화를 보니, 밤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굳이 탐정스럽게 보일 얘기는 전혀 아니었는데 말이다. 탐정 이야기처럼 미스터리 요소가 있거나 흥미진진 위주로 진행되는 서사는 아니었지만, 경찰이 주인공인 이야기로는 그런 느낌 처음이었던 영화였다.


19710703 탐정야화_편성표_1 (경향).jpg 프로그램 편성표 (1971년 7월 3일, 경향신문)


19770319 탐정야화 (조선).jpg 주말 TV (1977년 3월 19일, 조선일보)




탐정 야화 (Detective Story, 1951)




어린 마음에 별생각 없이 봤던 탓인지 <탐정 야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적인 영화였다. 경찰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영화라면, 우선 상상이 되는 건 악에 대한 선명한 응징과 거기에 따르는 액션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그런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 건 여전하다. 현재라면 <범죄도시> 같은 영화가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고, 고전 할리우드 영화의 대표적 예라면 <더티 해리> 시리즈가 바로 그런 경우겠다. 배보다 배꼽이 커 보일 정도로 과도한 액션이 난무하는 영화들도 많다. 범죄에 대한 응징이라기보다는 그냥 죽도록 패는 게 경찰의 업무라는 듯. 그런데 <탐정 야화>에서의 주인공 경찰은 죽도록 패기는커녕 화가 나서 몇 대 때리다가 잘릴 뻔하질 않나, 범죄자는 나쁜 놈이라고 이를 갈더니 결국 사랑하는 아내가 엮인 일 때문에 고민만 실컷 하다가 다른 이의 실수 때문에 안타까운 최후까지 맞게 된다.


그런 면에서 정말 파격적으로 안타까운 영화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경우야, 라는 생각에 영화가 끝이 났는데도 그놈의 결말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는 너무너무 아쉬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안타까운 장면 때문에 미국 영화의 검열제도까지 바뀌었다고 하니, 영화 제작 당시로서도 파격적인 장면이긴 했나 보다. 그것은 바로 “경찰 등의 법 집행관이 범죄자에게 살해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영화에서 그런 장면은 금지하고 있었는데, 줄거리 전개에 절대 필요한 것이라면 그런 장면을 허용하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영화의 그 장면 덕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제작된 지 20년이 지난 뒤에 보긴 했지만, 그때까지 그런 장면을 접해본 적 없었던 초등학생에게는 여전히 파격적인 장면이었다. 물론 그 안타까움은 미국에서 금지했던 장면 - 경찰이 범죄자에게 죽었다는 사실 -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보더라도 불의(不義)에 맞서는 데 거침이 없는 충직한 경찰이 총격전 도중도 아닌데 불의(不意)의 사고로 최후를 맞는 게 너무 허무하게 느껴져서였다. 그래서 <탐정 야화>는 두고두고 안타까운 결말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던 영화였다.





<탐정 야화>는 참으로 생각할 게 많은 이야기였다. 순간적 기분에 물건을 훔친 아가씨, 화려한 여자 친구 수발 때문에 횡령한 청년, 불법 낙태 수술로 돈을 번 의사, 강도짓이 몸에 밴 놈팡이, 온갖 이웃에 대한 음모론으로 정신없는 중년 부인, 용의자를 지목하러 온 목격자, 용의자와 타협하러 온 피해자... 하룻밤만 하더라도 경찰서에 들락거리는 사람은 많다. 그 모두에게는 사연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연에 애써 귀를 기울여주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선 중요한 것은 그 사연이 아니라 그 일이 처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경찰서에서, 업무부터 처리하고 싶은 경찰관과 사연부터 들려주고 싶은 연행자 간에는 얼마나 많은 말이 오고 가겠는가. <탐정 야화>는 기본적으로 그런 구도를 중심으로 연행자 간 혹은 경찰 간의 ‘밀당’ 상황까지 겹쳐서 전개되는 서사다 보니 생각하자면 생각할 게 너무 많은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해는 1956년이었는데, 당시 신문에서는 <탐정 야화>에 대하여 어떻게 소개하고 있는지를 찾아보았다.


... 악과 범죄를 증오하는 나머지 인정마저 잃어 냉혹하기 짝이 없는 형사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명장 윌리엄 와일러의 손에 의해 숨이 가쁠 정도로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더욱이 주연에 커크 더글러스와 엘레나 파커 등 일류의 배우를 얻은 것은 더욱 이 영화를 빛내주고 있다.

(신영화 소개, 1956년 10월 14일 경향신문)



첫 개봉한 해의 신문 광고 카피를 읽어 보는 것도 재미있다.


범죄를 대하면 인정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사나이!

... 그러나 그도 인간이기에 사랑과 눈물은 있었다.

이토록 박력 있고... 이토록 인간심리를 뼈저리게 해부한 영화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영화 광고, 1956년 10월 9일 조선일보)


19561009 탐정야화 (조선).jpg



또 당시 ‘탐정 야화’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었는지 한번 살펴보니 자주 사용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자석”이라는 제목의 칼럼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게 보였다. 그 사용된 예를 들어보면,


... 언제나 당내에 암울한 성곽을 구축하고, 심심할라치면 한두 토막의 탐정야화를 제작 발표하던...

... 집에 괴한이 침입해서 독약을 뿌리고 갔는데 신고받은 경찰은 오지도 않았다는 탐정야화 같은 이야기는...

... 이쯤 되면 쌍방의 술책은 탐정야화를 연상시킬 정도인데...

... 탈당한 시의원들의 신변에는 가지각색의 탐정야화가 따르게 되고 돈에 관한 이야기와...


기자석 칼럼 (경향신문)


대부분 명확한 근거는 내놓지 못하면서 비공식적 뒷이야기나 가십성 폭로 같은 이야기를 ‘탐정야화’라는 단어로 빗대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면 좋은 상황에 사용되는 표현도 아니고 경찰이나 형사와 관련된 단어도 아니었던 걸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경찰’이나 ‘형사’라는 정식 명칭이 있는데, 영화 내용과도 상관없는 탐정’이란 단어를 고집하여 “탐정 야화”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특별한 사유가 없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도 되고 그렇다면 무성의하게 붙인 제목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근거는 있다. 우리나라보다 3년이 빨랐던 1953년에 이 영화를 개봉했던 일본에서의 제목이 <探偵物語 (탐정 이야기)>였다는 점이다.






어릴 때는 짐 맥클로드(커크 더글러스) 형사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다른 이유 없다. 그가 주인공이니까.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주인공으로 보이니 충직한 민중의 지팡이 같다는 생각에 그의 시선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로지 악을 응징하려는 경찰 주인공을 열심히 응원했다. 그런데 그의 아내 메리(엘리너 파커)의 과거사가 드러나면서부터 상황이 복잡해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즈음부터 그들 부부간의 일은 그저 잘 풀릴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기대를 하는 걸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정직한 경찰과 착한 아내 간에도 다툼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뭔 큰일이 나겠나 하는 생각에. 솔직히 짐과 메리의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마지막의 장면만 열심히 기억하고 있었을 뿐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따로 고민하지 못했다는 핑계다. 세월 지나 다시 보면서는 엄청난 사연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과연 당시 TV에서는 그들의 대화를 어떤 느낌으로 처리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미국에서 영화가 제작될 당시에도 원작보다 순한 드라마로 만들었다고 하는 만큼, 세월이 좀 흘렀다 한들 우리나라의 TV에서 그런 상황을 전달하는 데에는 녹녹하지 않은 면이 있었을 것 같아서다.


미국에서 <탐정 야화>의 홍보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슬로건 문구를 보면 이 영화의 부부 갈등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The love story of a man whose wife was more woman than angel!

천사이기보다 여자였던 아내를 둔 남자의 러브스토리!


짐 맥클로드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경찰로만 본다면 그런대로 봐줄 만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틀만 굳건히 지키려는 완고함으로 본다면 요즘 말로 ‘꼰대’ 소지가 다분하다. 범죄에 연루된 자에 대해서는 무조건 처벌을 주장할 뿐 그 사람의 상황 즉 사연에 대해서 귀 기울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거기다 범죄를 저지른 자는 모두 죽일 놈이라는 생각에 폭력도 불사하며, 세상의 온갖 일에 냉소로만 일관하는 면도 있다. 그렇다면, 제법 심각하게 생각될 소지가 있는 캐릭터 아닌가. 아내에게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 캐릭터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 인간에게 천사와 같은 순결함만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겠다는 건 가당찮은 욕심인데, 인간의 삶 속에서 한 조각의 흠집도 보기 싫다면 엄청난 오만이 아닌가. 불의에만 치를 떠는 경찰로 보이던 맥클로드가 아내의 과거에 대하여 “쓰레기(trash)”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 걸로 보였다. 좋은 방향으로 진전될 구석마저 지우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래서 청교도 정신을 내걸어야 했던 미국 영화로서는 그런 마지막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나름 자신의 영역에서 깨끗하게 살고자 애썼던 경찰의 위치에서 허무하고 안타깝게 퇴장을 시키는 것만이 그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지켜주는 길이 되니까. 성장해서 다시 보았을 때 짐 맥클로드 형사의 마지막은 여전히 안타까웠지만 자신이 놓은 덫에 자신이 걸린 셈이었기에 처음 보았을 때만큼 허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탐정 야화>에 나오는 인간 군상의 묘사가 서사의 흐름을 이끄는 게 이 영화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들은 범죄를 저질러서 혹은 그것을 목격했기에 혹은 그것을 처리하기 위해 경찰서에 모여든 사람이다. 경찰서란 그들의 문제를 정리하여야 할 곳으로 생각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각자의 위치에서 업치락뒤치락 뒤엉켜 갈등을 재생산하는 상황도 보여주고 있다. <탐정 야화>에 나오는 조역 배우들이 그런 상황을 잘 뒷받침하는 연기로 영화의 흥미를 돋우는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형사(윌리엄 벤딕스), 순진한 처녀 좀도둑(리 그랜트), 전쟁에서 돌아온 청년 횡령범(크레이그 힐), 범죄로 살아갈 작정인 룸펜(조셉 와이즈먼), 불법 불임 수술 의사(조지 매크레디), 언니의 연인을 사랑하는 소녀(캐시 오도넬)... 여러 캐릭터들이 그들의 사연을 실감에 정감을 더한 모양으로 전달하다 보니 인간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보다 가까이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그것은 주인공 짐과 메리의 변방 이야기라기보다는 법과 범죄라는 것이 인간의 삶 속에 어떻게 다가서는지를 폭넓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과연 완고하고 냉소적이고 불신에 가득 찬 경찰이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믿는 정의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폭력적이고 무책임한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혹독하게 당하기만 하다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부터 온 트라우마가 기반이었다. 아버지처럼 굴기 싫었고, 어머니처럼 당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런 기반 위에 정의란 개념을 제대로 쌓아 올릴 수 있었을까. 그렇게 비롯된 정의감이라면 어떤 패턴으로 분출시키고 싶었던 걸까. 자신이 판단한 불의라면 무조건 냉소를 머금고 분노를 표출하며 적대시하는 식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어찌 되었건 <탐정 야화>에서의 짐은 한 방에 무너져 버렸다. 가장 간단하게 해석하자면, 영화의 슬로건에서 보듯 아내에게 입혀두었던 천사 무늬로 치장된 옷이 벗겨지면서다. 유부남과의 연애에서 비롯된 불법적인 낙태라는 건 천사표 아내가 걸어온 길에서는 절대로 마주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렇게 무너져 버린 짐은 사랑하는 아내만이 아니라 정신 줄까지 놓쳐버렸다는 점이다. 단단히 지키고 있던 정신의 기반이 무너져 내리니 가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그것으로부터 이어진 결과는 정말로 허무한 것이었다.





주인공만 보고 있자면 허무했지만, 희망의 끈은 놓지 않으려는 영화로 보였다. 검열제도까지 바꾸면서 범죄자의 손에 경찰을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제일 마지막에는 어둠 속의 빛 같은 걸 스치듯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다. 이 영화에서 희망을 내포한듯한 캐릭터는 분명히 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모범 청년 아더와 드러나지 않게 사랑을 간직해 온 소녀 수잔이다. 아더와 수잔은 세상의 허세적 잣대가 아니라 순수한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됨으로써 사랑을 확인하게 된 커플이었다. 아더가 횡령으로 연행된 덕(?)에 경찰서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경찰서에서 풀려나온 그들이 밤이 되어 어두워진 경찰서 앞 도로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빠르게 걸어가는 장면이 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방금 얻어진 자유와 사랑을 만끽하듯 발걸음을 재촉하며 경찰서 밖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듯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세상의 복잡한 사연을 다 끌어모은 듯 혼잡스럽고 혼란스러운 경찰서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한 사람의 경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옳고 그름을 논하고자 하는 그림은 아니었다.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반성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사연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사연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일인 만큼 짧은 시간에 많은 고민을 던져 준 영화였다.



Detective.Story.1951.1080p.BluRay.H264.AAC-RARBG.mp4_20260118_152234.331.jpg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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