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속에 역동적 댄스와 코믹 퍼포먼스가 있었다!

영화 속의 이야기, <비는 사랑을 타고>

by 김밥

<비는 사랑을 타고>는 어릴 때로서는 보기 어려운 장르의 영화였다. 사랑의 이야기라면 일단 거르고 보겠다는 편향된 선택밖에 할 줄 몰랐던 때였기에. 친구 집에서 친구 부모님과 함께 보았기에 보게 된 걸로 기억한다. 그때까지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생각나는 건 단 한 편이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뮤지컬 영화라고 하면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비는 사랑을 타고>를 보면서 전혀 몰랐던 형태의 뮤지컬을 만나게 되었던 셈이다. 기본적으로는 춤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 어린 눈으로는 그들의 춤은 묘기였다. 발레처럼 잘난 척하듯 진지한 분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즐겁자고 마음대로 흔들어 대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려운 기술의 퍼포먼스를 보여 주면서 보는 사람을 흥겹게 만들어 주는 대단한 댄스라고 느꼈다. 춤이 있어서 로맨스 영화가 재미있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그런 춤과 그런 노래가 딱 어울리는 흥겨운 뮤지컬이 있다는 사실도 <비는 사랑을 타고>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1972년 3월 18일 경향신문


1972년 3월 18일 조선일보







비는 사랑을 타고 (Singin’ in the rain, 1952)




<비는 사랑을 타고>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우선 로맨틱 코미디를 떠올리게 된다. 남녀주인공이 서로 티격태격하며 밀고 당기는 싸움을 하지만 사랑이 이루어져야 하는 결말이 꼭 필요한 장르다. 그런 영화 중에 처음 본 게 무엇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릴 때라서 그런 장르도 몰랐고, 사랑 이야기라면 오글거린다며 감상 리스트에서 밀어내기 바빴으니까. 그래서인지 <비는 사랑을 타고>가 로맨틱 코미디란 장르를 알게 된 첫 번째 영화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도 재미있다고 느꼈던 영화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다. 사랑 얘기 빠진 영화가 있겠나 싶지만, 어쨌든 티키타카 사랑싸움이 보이는 이야기로 내 마음에 들었던 첫 영화가 아닌가 싶다.


로맨틱 코미디라 하면, 주인공들의 오해가 풀리고 사랑이 이루어지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는 게 일반적인데 <비는 사랑을 타고>는 그렇지 않다. 처음 만나고 나서 잠시 밀당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게 된 후에는 별다른 트러블이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 커플이 서로 맺어지게 되는 게 결말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훈훈한 결말을 볼 수 있었던 데에는 1등 공신이 있었다. 마지막까지 트러블을 일으키며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캐릭터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커플 돈 록우드(진 켈리)와 캐시 셀던(데비 레이놀즈)의 상대편에 존재하는 끔찍한 악연이자 악역이었던 리나 라몬트(진 헤이건)가 바로 그 인물이다. 사랑의 커플 두 사람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 커플보다 리나 라몬트의 임팩트가 더 컸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어릴 때 봐서 더 그랬겠지만, 저 인간이 제대로 골탕 먹는 장면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기대대로 그런 장면을 보게 되어서 속 시원한 엔딩이었기에 더욱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나 라몬트 역할을 맡은 진 헤이건의 공로는 컸다. 선하디 선한 주인공들을 괴롭히다 제 꾀에 빠져서 폭삭 망하는 역할을 기막히게 해냈으니까.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리나의 약점인 나쁜 목소리는 물론 캐시가 대신한 걸로 나오는 좋은 목소리까지 모두 진 헤이건 본인의 목소리였다고 하니 정말로 그녀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징악(懲惡)’의 캐릭터가 리나 라몬트라면, ‘권선(勸善)’의 캐릭터는 도널드 오코너가 맡았던 역할 코스모 브라운이다. 누구라도 <비는 사랑을 타고>를 보고 제일 재미있는 캐릭터를 꼽으라면 코스모 브라운을 지적할 것이다. 얼굴을 마음대로 찌그러트리는 재주도 대단했고, 춤을 비롯한 몸의 움직임으로 코믹하게 보이는 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오는 장면마다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영화 최고의 조력자였다. <비는 사랑을 타고>에서 코스모 브라운 역할이 없었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도널드 오코너만큼 해내지 못했다면 과연 영화가 성공할 수 있었을지 묻고 싶을 정도다. 어릴 때는 물론 지금도 이 영화를 재미있게 만든 최고의 캐릭터가 코스모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세월이 갈수록 리나 라몬트와 코스모 브라운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은 더 크게만 느껴진다.





1954년 10월 20일 경향신문


영화가 개봉되었던 1954년의 신문 광고 카피는 그 시절의 한글 표현이 어땠는지 볼 수 있는 면이 있어서 재미있었다.


흐르는 메로듸(멜로디)와 은빗(은빛) 가튼(같은) 구슬 진주를 발브며(밟으며) 어엽분(어여쁜) 아가씨와 갓치(같이) 사랑의 노래를!

신문 광고 (1954년 10월 20일, 경향신문)


<비는 사랑을 타고>가 개봉한 후,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고 있었는지 신문에서 찾아보려 했으나 딱히 그런 비평 기사는 찾기 힘들었지만, 그 당시 미국 뮤지컬 영화를 거론한 기사는 찾아볼 수 있었다.


1959년 11월 9일 동아일보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서부극의 액션 드라마와 더불어 뮤지컬 영화는 미국영화의 3대 특색이다. 가수, 무용가, 보드빌리언 등의 탤런트들의 범람과 거대한 제작 자본을 구사할 수 있는 강점이 뮤지컬의 융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나 역시 낙천주의적인 미국 국민성에 뮤지컬이 압도적으로 어필하고 있는 원인을 무시할 수 없다.

뮤지칼스 영화 (1959년 11월 9일, 동아일보)


위의 기사에서는 미국 뮤지컬 영화를 제법 자세하게 다루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비는 사랑을 타고>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진 켈리를 뮤지컬 스타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면서, 그가 주연했던 <춤추는 대뉴욕(On the Town, 1949)>, <파리의 아메리카인(An American n Paris, 1951)>에 대한 언급은 있었는데도 말이다. 개봉 당시에는 미국에서도 <비는 사랑을 타고>에 대한 평이 엇갈렸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재평가되기 시작하여, 유명 평론가 폴린 카엘로부터는 ”역대 최고의 뮤지컬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영화로서는 미국 영화연구소(AFI, 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수작으로 발표한 영화 중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영화연구소에서는 이 영화를 최고의 뮤지컬 영화로 선정하기도 했고, 2007년에는 역대 최고의 영화 5위에 올리기도 했었다. 당시 우리나라 신문 기사에서 이 영화에 대한 말이 없었던 걸 보면, 그때까지 <비는 사랑을 타고>에 대한 평가가 일관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비는 사랑을 타고>가 처음으로 TV 전파를 탔을 때의 소개 기사에서도 재미있는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시도”라는 문구가 붙일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72년 3월 18일 조선일보


KBS는 이 시네마를 “보다 알차게 방영하기 위해 노래 넘버가 나오는 신은 모두 오리지널 사운드를 살리도록 애썼고 대신 자막을 브라운관에 흘리는데 이것은 앞으로도 사용될 음악영화용 방법이라고 밝혔다. 자막 삽입은 한국 최초의 시도로서 구경할만한 시간.

(1972년 3월 18일, 조선일보)


이 영화를 그때 본 것은 분명하지만, 자막으로 노래의 번역 가사가 흘렀는지 어땠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기사를 대하니 노래가 나오는 영화를 볼 때 외국어 노래를 들으며 도대체 무슨 내용의 가사일지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난다. 외국 영화가 성우들의 더빙으로 방영되었던 시절이었기에 원래 영화 사운드 역시 허술하게 들렸던 때도 생각나고.






<비는 사랑을 타고>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춤과 노래다. 하지만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는 여러 모로 결이 달랐다. 마음을 적시는 분위기의 노래도 아니었고, 예쁘고 우아해 보이는 춤도 아니었다. 서사도 전혀 다른 분위기의 것이었다. 엄마 없는 설움을 노래로 달래는 형제자매이야기나 알프스를 넘으며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는 가족이야기처럼 진지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 외모의 두 사람 – 돈 록우드와 리나 라몬트 - 이 대스타라면서 등장하니 코믹한 영화일 거라는 인상은 받았지만 두 사람이 그렇게 웃기지도 않았다. 거기에 이어 등장한 여주인공 캐시 셀던도 귀엽긴 하지만, 화려한 외모나 퍼포먼스로 관객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서사에서도 무성에서 유성으로 넘어가는 영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플롯이 주의를 끌었을 뿐 짜임새가 촘촘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 걸 따져보니 왜 이 영화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 의아하기도 하다.


역시 결론은 춤도 보여주고 노래도 들려주는 뮤지컬이란 데에서 찾게 된다. 이야기가 꽉 짜인 맛은 없어도 그때그때 벌어지는 상황을 춤과 노래로 표현하면서 이어지는 과정이 보면 볼수록 재미있어지더라는 것이다. 가장 많은 역할을 했다면 역시 진 켈리의 역동적인 춤이었고, 그것을 받쳐주는 도널드 오코너의 코믹 퍼포먼스도 대단했다. 거기에다 맹하면서도 욕심을 부리며 설쳐대는 리나 라몬트와 귀엽고 착하기만 할 것 같은 캐시 셀던이란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줌으로써 권선징악적 결과를 기대하게 만든 진 헤이건과 데비 레이놀즈의 연기도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렇게 따져보니 하나하나의 구성 요소가 저마다의 역할을 해낸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비는 사랑을 타고>는 상황에 어울리는 코믹한 연기,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흥겨운 퍼포먼스 그리고 권선징악을 뚜렷하게 보여 주는 후련한 결말의 조합에 성공한 영화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그런 장르도 그런 춤도 그런 배우도 몰랐던 어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아는 게 없어서 선입견을 가질 수 없었던 시절에 보면서 "유레카!"라는 느낌으로 기억에 남았던 만큼 "내 인생의 영화"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화다.





보태는 말

이 영화는 모르는 게 낫다는 걸 느끼게 해 준 영화이기도 하다. 어릴 때 진 켈리 아저씨의 인상은 좋기만 했다. 그래서 사람 좋은 돈과 귀여운 캐시 두 사람을 엄청 응원하면서 보았다. 그런데 나중에 이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니, 진 켈리의 엄청 까칠함에 모두가 질겁을 했고 특히 어렸던 데비 레이놀즈는 펑펑 울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데비 레이놀즈가 춤추는 걸 보면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 켈리로부터 호된 야단을 맞았던 장면이 어떤 장면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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