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이야기, <썬셋대로>
처음 보면서 세상에 이런 영화도 다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가 <썬셋대로>였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방식이 그때까지는 본 적이 없었던 때문이다. 그 정도의 충격(?)과 함께 개인적 미스터리까지 남겨준 영화이기도 했다. 그 영화를 어렸을 때 본 이유를 짐작하기 힘든 영화가 하나씩 있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였다. 스토리도 배우도 그 나이에 끌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손에 꼽는 인상적 영화로 남았다. 처음부터 충격적 결말을 보여주고 시작했던 것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 그렇다고 그것 때문에 인생의 영화로 남은 건 아니다. 그로부터 시작된 궁금함을 좇아서 서사를 따라가다 보니 이미 밝혔던 결말까지 새롭게 느껴졌던 전개 방식이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썬셋대로>란 영화는 이야기가 저렇게 전개될 수도 있다는 경험을 처음 안겨준 영화였다.
<썬셋대로>는 어릴 때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을지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한 영화다. 그만큼 이야기 자체가 어린 관객을 유혹할만한 구석은 없기 때문이다. 여러 영화 중에 선택하라면 다른 영화를 선택할 확률이 십중팔구였을 것 같다. 그렇다면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명한 영화”라고 들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를 보았던지 주변 어른들에게 들었던지의 이유로. 짐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더 있다. 주말의 영화 시간대에 다른 어떤 영화와 같이 걸려 있었는지를 비교해 보는 방법이다. 살펴보니, <썬셋대로>가 방영한 주에 다른 방송국의 편성표에는 아예 외국영화가 걸려있지 않았다. 고민하지 않고도 그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라도 볼 수야 있었겠지만 참으로 운이 좋아서 더 빨리 만나게 된 셈이다. 영화를 소개하는 신문 칼럼에는 물론 유혹의 글귀가 있었다. “무성영화 시대의 여왕 노마와 엉터리 시나리오 작가의 관계를 그린 왕년의 명화”라는. 그러나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을 유혹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렇든 저렇든 <썬셋대로>가 그 주말에 볼 수밖에 없는 영화였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을 읽었을 때, 그 엄청난 반전에 깜짝 놀랐다. 역시 대단한 추리 작가란 다르다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경험을 들라면 영화 <썬셋대로>에서였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보다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더욱 충격적이었다. <썬셋대로>를 다시 보면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떠올렸던 적도 있다. 둘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색다른 경험을 안겨 주었던 동질감 때문이었을까. 따지자면 <썬셋대로>가 한술 더 뜬 쪽이다.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마지막 반전에 놀란 거지만, <썬셋대로>는 처음부터 까고 시작했으니 말이다.
주인공을 죽이고 시작하는 영화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썬셋대로>에 놀랐다. 처음 볼 때는 나중에 뒤집어지는 반전이 있을 거란 기대마저 했다. 어린 마음에 남자 주인공을 죽이고 시작할 리는 절대 없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장면은 얼른 지나가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남자 주인공 조 길리스(윌리엄 홀든)가 눈앞에 나타나면서부터 실제적 서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재능은 있어 보이지만 껄렁대는 시나리오 작가 조 길리스와 왕년의 스타 노마 데스몬드(글로리아 스완슨)의 만남은 처음부터 기괴한 분위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 들어갔다. 시작은 거의 공포스러움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어린 눈에는 분명히 “기괴한” 이야기로 보였다. 숨겨져 있는 흉가 같은 느낌의 대저택, 절대 웃지 않으면서 괴팍하게 생긴 운전기사이자 집사, 내레이터가 밀랍 인형이라고 지칭했을 정도로 무표정한 카드 손님들, 한밤중에 이루어지는 원숭이 장례식, 손님 한 사람 부르지 않는 연회, 온통 여주인의 젊은 시절 사진으로 칠갑해 놓은 커다란 방... 이 정도면 공포영화라고 부를만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어린 시절에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스릴러를 보듯 조의 행적을 지켜보았다. 대체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마조마하며. 주인공의 죽음이 시작이었으니 당연히 조마조마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장면도 그렇게 보였다. 참혹한 일을 저질러 놓고는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으며 마치 무대 위에 서듯 연행되는 노배우의 모습이라니. 그 또한 기괴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그 기괴함은 어느덧 쓸쓸함과 안타까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기괴하게 시작하여 기괴하게 끝이 나는 서사를 보고 있었음에도 그런 감성에 빠지게 되는 게 <썬셋대로>의 매력이었다.
<썬셋대로>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1956년의 신문 칼럼을 보다가 재미있는 단어 하나를 발견했다. 기사의 제목 “썬셑대로”에 붙은 부제목에서다.
“불우한 여우의 비사(悲史)와 「성림(聖林)」의 생태를 묘출”
‘성림(聖林)’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궁금했지만 한자를 하나하나 풀어서 보니 금방 답이 나왔다. ‘성(聖)’은 신성한(Holy)이고 ‘림(林)’은 숲(wood)이니 ‘할리우드(Holywood)’였던 거다. 부제목에는 그렇게 써두었지만 막상 본문에서는 ‘헐리우드’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중략) 이 주인공에는 과거 “헐리우드의 여왕”으로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왕년의 대스타 “글로리아 스완슨”이 분하고 있다. 여우의 비극을 그려가는 가운데 부각되는 영화 도시 헐리우드의 생태가 생생히 묘출되는데 더욱 의의가 있는 영화라 하겠다. 더구나 세실 B. 데밀, 버스터 키튼, H. B. 워너 등이 출연하고 있는 점이 더욱 흥미롭다.
(1956년 12월 23일 경향신문)
또 다른 신문 칼럼에서는 윌리엄 홀든을 조연이라고 쓴 대목도 볼 수 있었다.
(중략) 이 비극을 중심으로 할리우드의 생태가 생생히 ‘리얼리스테’하게 냉혹히 묘출되었다. 썬셑대로 파라마운트 촬영소 거장 세실 B. 데밀의 등장을 비롯하여 회화 중에는 베티 허튼, 크로스비, 데릴 자눅 등등 실재물의 이름이 나오며 마치 글로리와 스완슨의 자전을 방불케 하는 ‘세미 도큐멘타’적 색조가 농후한 작품이다. 조연에는 윌리엄 홀든과 폰 스트로하임, 낸시 올슨이다.
(신영화, 1956년 12월 28일 조선일보)
조 길리스 역할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도 올랐던 엄연한 주연 배우인데 왜 그런 착각을 했을까? 왕년의 대스타였던 ‘글로리아 스완슨’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가 글쓴이였다면 아직 전성기에 이르지 않았던 '윌리엄 홀든'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의 기사를 보는 재미는 이런 데에서 찾는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그때의 공기를 접하는 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본 듯한 느낌 같은 것이다.
<썬셋대로>를 어린 나이에 어떻게 선택하게 된 건지 궁금했던 것처럼 또 한 가지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점이 있었다. 빌리 와일더 감독과 관련된 것이다. <썬셋대로>를 볼 때는 빌리 와일더라는 이름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때였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감독에게 관심이 가게 되었는데, ‘빌리 와일더’는 그중에서도 한 가지 특징으로 기억했던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면 금방 떠오르는 <뜨거운 것이 좋아(1959)>를 비롯해서 <사브리나(1954)>, <하오의 연정(1957)>, <7년 만의 외출(1955)>, <제17 포로수용소(1961)>,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1960)>... 참 재미있게 본 영화가 많았다. 이런 영화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당연히 유머다. 하나같이 유머라는 요소를 철저히 갖춘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썬셋대로>를 생각하면 그런 영화들과는 결이 달랐다는 생각에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다소 색다른 영화가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처음 봤을 때의 공포감과 심각한 결말이 가장 크게 다가왔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썬셋대로>에 대한 생각은 달라져 갔다. 물론 망상을 가진 스타 여배우의 몰락과 그녀를 이용해 보려던 젊은 작가의 죽음이라는 큰 줄기는 비극과 심각함을 분명히 담고 있다. 하지만 첫 장면부터 죽어있는 주인공을 보여준다는 것마저 웃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공포스럽게 느꼈던 사람들이 다시 보니 우습게 보이기도 했고, 원숭이 장례식을 한밤중에 거행한다거나 첫 번째 남편을 기사로 거느린다는 점도 그렇게 느껴졌다. 거기다가 노마는 찰리 채플린의 흉내도 제법 잘 냈다. 심지어 자신이 자신의 죽음을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는 상황도 웃긴 데다 그걸 묘사하는 대사는 더 웃겼다.
(풀장에 빠진 자신의 시체를 건져 올리는 대목에서)
웃긴다. 사람이 죽고 나면 다들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한다는 게.
(풀장에 빠져 죽은 자신을 보면서)
불쌍한 놈. 항상 수영장을 원한다더니 결국 스스로 얻어냈군.
남아있는 뒷얘기를 보니 원래의 시나리오에는 죽은 조 길리스가 시체안치소에서 옆의 시체들하고 대화하며 자신의 얘기를 꺼내는 걸로 시작하는 버전도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좀 웃기지 않은가? 빌리 와일더 감독은 <썬셋대로>에서조차 유머를 감추지 않고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이 영화의 각본도 찰스 브래킷, D. M. 매쉬먼 주니어와 같이 쓴 자신의 작품이었다. <썬셋대로>가 블랙 코미디라는 건 금방 알아차릴 정도임에도 새삼스럽게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처음 본 어린 눈에는 기괴하게 보였을 뿐 웃기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서야 그의 유머러스한 특성이 이 영화에도 잔뜩 배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첫인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영화를 세월 따라 보고 또 보면서 느끼게 된 감정이었다. 스스로 감상했던 영화에 대한 기억을 좇다 보면 아는 이들은 뻔하게 아는 사실도 새삼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대견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다.
<썬셋대로>는 블랙 코미디의 냄새가 진하긴 해도 진지한 드라마다. 웃기는 구석이 있는 한편 인간의 욕망에 대한 진한 울림을 남기는 영화다. 그렇지만 주인공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노마는 끝까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상상이라도 했던 반면, 존은 문자 그대로 허무한 결과만 남기고 사라진 셈이니까. 마음에 두었던 아가씨 베티(낸시 올슨)와의 관계조차 정리했던 건 깨끗하고 정돈된 삶으로 방향 전환하겠다는 다짐이었는데도 말이다. 자기 일만 생각하고 타인의 일을 방치했다가 벌어진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노마가 자살 시도를 여러 번 했던 점에 대하여 최후까지 남의 눈길을 끌어보겠다는 욕심일 뿐이라고 존은 단언했다. 노마가 죽든 말든 더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그저 떠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자신이 선택한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떠나게 된 것이다. 노마가 자신을 희생양 삼아서 마지막 주목을 받을 기회를 잡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탓이다.
존의 생각대로 유유히 떠날 수 있었다면 존에게 멋진 마무리였다. 하지만 노마는 존에게 그런 역할을 주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운명의 주사위를 던진 것은 노마였고, 나름 성공한 셈이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데에는 성공했으니까. 결과적으로 과거에 집착하는 부유한 중년여성을 갈취하다 최후를 맞는 룸펜의 역할이 조의 것이고, 은막에의 복귀를 갈망하며 몸부림치다 룸펜의 꼬임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진 철 지난 스타의 역할이 노마의 것이 되었다. 나름의 퍼포먼스로 마지막을 장식한 이는 존이 아니라 노마였다. 많은 이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자신에게 집중된 카메라 세례를 받으며 등장하는 스타처럼 말이다. 첫 장면이 없었더라면 관객이 기대하는 결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부정적 관계도 청산하고 친구의 연인을 좋아하는 마음도 포기하며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역력히 드러낸 남자 주인공이 씩씩하게 걸어가는 장면이 자연스럽고 보기도 좋을 거니까. 자신이 멋있게 보일 수 있는 마무리를 코앞에 두고 노마의 마지막을 장식해 주는 먹잇감이 되고 말았던 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탐정야화>의 마지막만큼이나 허무한 결말이어서 한번 생각해 본 것이다.
<썬셋대로>는 욕망과 오만으로 인한 인간의 비극을 결말로 보여주는 영화지만, 그런 인간 세상에 대한 냉소를 블랙 코미디적 장면과 그에 준하는 대사로써 유머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게 크게 와닿는 영화다. 어릴 때는 놀랍고 무서우면서 재미있었던 영화였고, 세월이 지나면서 웃기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에 박수를 보냈던 영화였는데, 세월이 더 지나면 또 어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지 궁금해질 정도로 많은 구석을 가진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