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이야기, <카운터포인트>
어릴 때는 전쟁 영화를 신뢰하는 면이 있었다. 싸워서 이겨내는 주인공들의 모습도 멋있었고, 다른 장르에 비해 감동적인 영화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 휴머니즘을 버무려 넣기 쉬운 장르다 보니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 가지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보통 하고는 좀 다른 특이한 전쟁 영화 한 편을 발견했다. 군인들끼리 싸우는 게 아니라 군인과 음악가의 싸움이라는 발상부터가 특이했다. 그럼에도 전쟁 영화로서의 역할이랄까 그와 같은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영화였다. 초등학생 수준을 벗어난 탓인지 그 특이함이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독특한 느낌의 감동으로 기억에 남았지만 오래도록 다시 보기 힘들었던 영화이기도 했다. <카운터포인트>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였다.
가장 어릴 때 보았던 걸로 기억하는 영화는 <홍길동>과 <소령 강재구>였다. 처음부터 영화 속에서 싸움을 보았던 셈이다. 삶 속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여러 가지 형태로 싸움이 많다 보니 영화 속에 싸움이 많이 등장하나 보다. 명분이 그럴듯해야 관객의 공감을 얻어내기 쉬운 만큼 영화 속 싸움에는 뚜렷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써먹었던 명분은 ‘국가’ 그리고 ‘정의’였다. 그런 만큼 애국심과 정의로움에 기대는 영화들이 많았고, 전형적으로 그런 서사가 전개되는 장르로 ‘서부극’과 ‘전쟁 영화’가 앞줄에 섰었다. 그리고 그런 영화의 특징이라면 희생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었다. 주인공이나 그 주변 인물들이 끝까지 무사(無事)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관객은 안타깝고 슬프지만, 최후의 승리를 지켜볼 때 다가오는 감동이야말로 카타르시스 그 자체였다. 그러니 어린 마음에도 그런 장르의 영화들에 먼저 끌렸던 게 사실이다. 중학교 3학년 때 TV에서 본 영화 <카운터포인트>는 분명히 전쟁 영화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었고. 마지막까지 봐도 전쟁 영화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본 전쟁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감동을 주었기에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던 영화였다.
<카운터포인트>라는 영화는 배우 때문에 본 영화는 아니었다. 찰턴 헤스턴(Charlton Heston)은 <벤허>와 <십계>를 봤기에 유명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소위 팬심이 작동할 정도는 아니었고, 맥시밀리안 쉘(Maximilian Schell)은 알고 있는 정도에 불과했고,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캐스린 해이즈(Kathryn Hays)는 전혀 잘 모르는 배우였다. 굳이 배우 이야기를 꺼낸 것은 특별히 관심도가 높은 배우가 출연한 영화가 아니었기에 순전히 전쟁 영화라는 장르 때문에 선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얘기다.
당시 주말의 영화로 <카운터포인트>를 소개했던 글을 찾아보았다. 어떻게 소개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서다.
찰턴 헤스턴과 맥시밀리언 쉘의 차원 높은 우정의 대결을 그린 이색 전쟁 영화... (중략) 1944년 독일 점령하의 벨기에 전선 - 독일군에 포로가 된 미국의 명성 있는 지휘자 C. 헤스턴이 단원 70명과 함께 벌이는 「죽음이냐 탈출이냐」를 그린 감동과 박력이 물씬한 수작 필름.
(1976년 11월 13일 조선일보)
우정의 대결, 죽음이냐 탈출이냐, 감동과 박력, 수작 필름... 솔깃할 정도로 흥미를 끌 만한 문구로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색 전쟁 영화'라고 표현한 부분이 눈에 띈다. 생각해 보니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꽤 빨리 TV에 등장한 영화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었을 것 같다. TV 방영한 해가 1976년이었는데, 우리나라 개봉 연도를 찾아보니 1968년이었다. 극장에서 상영한 지 10년도 되지 않았던 영화였다.
내친김에 <카운터포인트>를 개봉했을 당시의 ‘영화단평’이라는 신문 칼럼을 보니 “수준급의 영화”라던가 “인상적”이라는 표현을 쓰며 영화를 칭찬하는 모양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한마디는 글쓴이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직설적 표현이라서 놀라웠다. 특히나 이 영화에서는 유명도에서 가장 내세울만하지 않았을까 싶은 배우를 대상으로 표현한 것이어서 더욱 놀랍다.
(중략) 흠이라면 「헤스튼」에게 지성미가 없다는 점. (영화단평, 1968년 9월 5일 동아일보)
더 놀란 것은 <카운터포인트>의 신문 광고들에서였다. 광고 속에서 홍보용으로 쓴 카피 문구가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더라는 점이다. 신문에서 영화 광고 보는 것을 즐거이 했지만 이렇게 하루하루 달라졌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때는 날마다 광고를 실으면서도 카피 문구를 달리 했단 말인가? 이랬든 저랬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냐? 탈주냐? 포로 전원을 총살하라! 아~ 70명 단원의 운명은? 나치 독일군의 무차별한 학살이 실현되려는 찰나! 바로 여기 인간의 구사일생이란 기적이... (8월 27일)
처형의 전장 한 모퉁이에서... 감미로운 명곡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그 지휘자의 전 단원의 생명이... (8월 28일)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과연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인간과 전쟁... 전쟁과 죽음... 인간이 죽음을 초월한 그 순간! (8월 29일)
두 골든 스타의 박력과 스릴이 충만한 우정 있는 남아의 대결! (8월 30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손과 손을 마주 잡고... (8월 31일)
예술엔 국경이 없고 적이 없다! (9월 2일)
숨 막히는 탈주 심포니- 위대한 예술가 「에봔스」와 그 단원의 운명은... (9월 4일)
예술엔 국경이 없고, 적이 없는가? (9월 5일)
이상 상황 속에서 전개되는 위대한 예술가 「에봔스」와 「쉴러」의 대결! (9월 6일)
사실 <카운터포인트>를 처음 볼 당시에는 독특한 방식의 전쟁 영화였기에 대번에 감흥을 얻을 수 있었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는 유명 지휘자가 나치에게 대항하여 얻어내는 승리라는 측면에서다. 단원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얻어진 라이오넬 에반스(찰튼 헤스턴)의 무용담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도 그를 살려주고 마지막에도 그를 살려준 독일 장군 쉴러(맥시밀리안 쉘)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라이오넬의 음악가적 능력과 인간적 용기에 반해서 그랬으려니 정도로만 생각했나 보다. 많이 알려진 배우의 주인공 역할만 생각해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했나 보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의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전장(戰場)의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펼쳐지는 전쟁 영화로서의 매력이 컸으니까.
세월 지나 다시 보는 <카운터포인트>는 처음 볼 때와는 다르게 다가오는 면이 재미있었다. 그럴 수 있는 단초(端初)를 제공한 것은 다름 아닌 제목이었다. 도대체 ‘카운터포인트(Counterpoint)’란 무슨 말인가?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를 사전에서 찾으면, “대조하다, 대조를 이루다” 정도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 정도만의 의미로도 이 영화에서 주인공 두 사람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납득이 되는 제목이다. 그런데 사전에서 첫 번째로 소개하고 있는 “대위법(對位法)”이란 의미로 해석하면 좀 더 재미있어진다. 대위법은 ‘서양음악의 기본적인 원리’라는 사전적 설명이 있을 정도로 클래식 음악과 밀접하게 관련된 단어이기 때문이다. 두 개 이상의 멜로디가 동시에 진행되게 하는 작곡 기법을 말하는데, 각 멜로디는 자기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단다. 즉 주 멜로디와 부 멜로디로 나뉘는 차원이 아니라 각 멜로디는 단단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두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특성이 뚜렷이 다른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상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이 돋보일 수도 있달까 뭐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음악이야 뭐 작곡하기 나름이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인간에게는 참 쉽지 않은 일로 들린다. 하지만 <카운트포인트>에서 라이오넬 에반스와 쉴러 장군의 역할을 생각하면 그런 의미를 가진 제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쉴러는 군인이고, 라이오넬은 지휘자로서 전쟁 중에 나름의 자기 역할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각자의 역할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오묘한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다. 장군은 장군대로 지휘자는 지휘자대로 나름의 자존심도 지키며 리더십을 발휘하여 해결해야만 할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런 일이 전쟁 중에 벌어질 수 있을까? 죽기 살기의 전쟁에서라면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기 쉬운 상황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평가에 취약점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원작 소설은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정체 모호한 두 국가 간의 갈등을 그린 것이었다고 하니 <카운터포인트>와는 시대적 배경도 다르고 상황도 달랐다. 원작 그대로 영화화하였다면 두 인물의 갈등이 개연성 문제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갈등과 화합을 두고 보면 기막힌 제목이지만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일인지를 두고 왈가왈부할 구석은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영화의 개연성 문제에 있어서 키를 쥐고 있는 캐릭터는 쉴러다. 상대를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쪽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라이오넬이라는 캐릭터에 힘을 실어주었다. 약자의 입장에서 목숨을 걸고 예술의 자존심을 지켜낸 승리자로 만드는 게 감동을 이끌어내기도 쉬웠을 테니까. 하지만 개연성 문제가 부각됨으로써 총체적인 평가에는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소지가 다분해 진다. 원작의 제목은 “카운터포인트”가 아니라 “장군(The General)”이었다고 하니 원작에서 실제적 키는 누가 쥐고 있었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영화에서 쉴러 장군의 역할에 좀 더 무게를 두었더라면 똑같은 결말이라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떻게 바뀌고 관객에게는 어떤 다른 느낌이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카운터포인트>는 독특한 소재의 서사로 감동을 주어서 인상적이었던 추억의 영화다. 다시 보니 서사에서 개연성 운운할 구석이 보이기는 했으나 오히려 재미있게 생각되는 구석도 있었다. 그때는 전쟁 영화의 감동을 받기에 충분한 영화로만 봤지만, 다시 보니 전쟁 속에서의 역할이 전혀 다름에도 가치를 지키고자 노력하는 인간의 심리를 묘사하는 영화로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다. 물론 아쉬움은 있지만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나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는 차원으로 보고 싶진 않다. 그때는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감성의 패턴이 다를 테니까.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냉정"이 '카운터포인트(대위법)'의 두 파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두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에 단원인 척하며 지내는 미군 장교에게 의심을 품은 나치 장교가 연주를 해보라고 종용한다. 숨 죽여 지켜보는 단원들 앞에서 미군 장교가 트럼본으로 연주한 것은 미국 국가였다. 전쟁 영화이면서 음악이 중요한 이 영화에서 군인이 음악으로 싸워야 하는 전쟁터 속의 공연. 이 장면 역시 '카운트포인트'였고, 감동의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