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배우, <사진>
<사진>이란 영화는 많은 것이 떠올려지는 영화다. 우선 ‘사진(沙塵)’이란 제목부터가 신기했다. 사전에는 “모래 섞인 흙먼지”라는 의미로 되어 있는데, 그런 단어는 그때 처음 들어봤다. 서부극이라고 해서 보게 되었는데, 이런 희한한 서부극도 있나 싶었을 정도로 서사도 일반 서부극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마를렌 디트리히라는 배우를 처음 본 영화이기도 했는데, 참 독특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들과는 얼굴에서 풍기는 이미지가 전혀 다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임스 스튜어트의 전매특허라고나 할까 유순하고 순진해 보여도 할 일은 다하는 그런 캐릭터에서 매력을 느낀 영화였다.
영화를 즐겨보면서도 좋아하는 배우가 없는 경우도 가능할까. 광팬까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좋아하는 배우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어떤 정도가 되어야 광팬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배우가 출연한 영화는 무조건 보는 정도라면 광팬이라고 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 영화를 알아가면서 TV에서 영화를 볼 때 그런 배우가 두 사람 있었다. 게리 쿠퍼와 제임스 스튜어트가 바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분명했다. 굉장히 순하고 예의 바를 것 같은 좋은 인상(人相)이었다. 그러면서도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나올 정도로 실력 있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서부극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했던 때문에 팬이 된 것은 아니다. 서부극의 팬이긴 했지만 거기 나오는 주인공 모두에게 팬심이 발동되지는 않았으니까. 결국 그들의 이미지였다. 법 없이 살 사람같이 순하게 보여도 결정적일 때 한방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캐릭터가 멋있어서였다.
<사진>을 보기 이전에 제임스 스튜어트가 나오는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팬이 되는 데에 방점을 찍은 영화가 <사진>이었다는 정도는 기억한다. 큰 키에 마른 체형이라 걸음걸이조차 흐느적대는 느낌의 톰 데스트리(제임스 스튜어트)가 어쩔 수 없어서 펼치는 듯한 은근한 활약이 이 영화를 ‘인생의 영화’로 각인시킴과 동시에 그를 향한 팬심을 발동시켰다. 이후에 제임스 스튜어트의 영화는 무조건 통과였다. 단 비슷한 유형의 캐릭터 게리 쿠퍼의 출연작과 겹치는 경우가 생긴다면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겠지만 특별히 그랬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한 첫 번째 서부극이 <사진>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분히 제임스 스튜어트와 톰 데스트리의 이미지가 꼭 맞는다는 게 캐스팅 이유였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보았을 때는 이 영화의 스토리나 세세한 구석은 그다지 생각지 않았다. 매사에 어벙한 인상을 풍기면서 남의 말 다 들어주면서도 일은 순리에 맞게 제대로 해결하는 속이 꽉 찬 사나이 이미지가 이 영화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이었다. 거기에는 제임스 스튜어트와 나란히 주연을 맡아서 술집 여자 프렌치 역할을 해냈던 마를렌 디트리히가 공헌한 바도 컸다. 프렌치가 자신에게 따지러 온 여자와 술집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도 대단했지만, 톰이 그 싸움을 말리는 장면을 보고 한마디로 빵 터졌다. 그런 톰에게 화가 나서 끝까지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프렌시를 비폭력적으로 제압하고자 보여주는 수비 퍼포먼스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거친 동네 보틀넥(Bottleneck)에서 – 이 동네가 얼마나 엉망진창인지를 보여주는 게 첫 장면일 정도로 – 총도 없이 폭력을 불식시키고자 하는 망상(?)을 지니고도 부보안관으로 임명된 톰 데스트리의 첫 번째 활약이었던 셈이다.
첫 번째 활약 장면에 이어서 어린 마음을 흔들었던 또 하나의 멋진 장면은 톰이 총솜씨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이 역시 총을 잘 쏘는 자신의 실력은 드러내면서도 타인을 해치지 않겠다는 비폭력주의를 실천하는 장면이었다. 총을 난사하며 동네 분위기를 망치는 난폭한 무리에게 총은 이렇게 쏘는 것이라는 걸 알려주듯 멀리 있는 간판의 조그만 장식품을 하나씩 맞춰서 떼어내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그런 솜씨를 가진 총잡이에게 누가 함부로 덤비겠는가. 결투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그걸 보면서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는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비폭력으로 폭력을 제압하는 방법이 어린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처음 <사진>이란 영화를 접했을 때의 기억을 더듬자면, 이 영화에 매력을 느낀 건 그 두 장면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그 두 개의 장면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그것을 보여줬던 톰 데스트리라는 캐릭터 덕분이었고, 그 캐릭터를 연기했던 제임스 스튜어트의 인상 덕분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의 이미지를 도장 찍듯 확고히 해 준 영화가 바로 <사진>이었다.
<사진>은 1939년 영화인데,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되었을 때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옛날 신문을 여기저기 뒤적거려 봤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때가 일제강점기였던 만큼 일본에서의 개봉 시기나 평가는 어땠는지를 한번 찾아보았다. 일본에서는 1941년에 개봉한 걸로 되어 있고, 영화에 대한 소개를 보니 당시로서는 유명도 면에서 제임스 스튜어트보다 앞섰던 마를렌 디트리히에 대하여 홍보하는 내용이 많았다.
마를렌 디트리히 주연! 새로운 서부극의 결작!
マレーネ・ディートリヒ主演!新西部劇の傑作!
명배우 디트리히가 노래 부르는 서부극!
名花ディートリヒの歌う西部劇!
디트리히는 가수로서의 매력을 발휘하고,
스튜어트는 온후한 정의의 사나이를 호연하고 있다.
ディートリヒは歌姫としての魅力を発揮し、
スチュワートは温厚な正義漢を好演している.
당시 미국 신문 뉴욕 타임스에서는, 마를렌 디트리히의 연기에 대해서는 절찬하였고 제임스 스튜어트의 연기에 대하여 “명쾌하고 호감이 가고 유쾌하며 유머가 있는 역할”이라고 평했다. 이 영화는 제임스 스튜어트는 물론 마를렌 디트리히도 처음으로 출연한 서부극이었다.
세월이 지나서 다시 보니 어릴 때 본 <사진>보다 생각할 내용이 많이 보였다. 우선 어릴 때는 독특한 서부극이라고 생각했던 건 총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적다는 점에서였다. 건 벨트를 두르지 않은 서부극 주인공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총을 차고 다니는 것부터 거부하는 서부극 주인공이라니. 그 이유도 너무나 분명히 말한다. 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도 총으로 해결을 잘하는 보안관이라서 유명해졌지만 결국은 등 뒤에서 쏘는 총에 맞아 죽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결국 총이란 건 믿을 게 못 된다고 말이다. 그럼 뭘 믿느냐고 물으니, 법과 질서를 믿는다고 대답한다. 총 없이 말이다. 1930년대의 서부극에서 그런 걸 얘기하고 있으니 독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총을 차기도 싫어하고 어지간하면 총을 쏘지도 않으려는 보안관. 거기에다 유약해 보이고 여성들이 하는 일도 서슴없이 하고, 총솜씨도 좋으면서 가능하면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애쓰는 수다쟁이 서부의 사나이. 앞뒤가 맞지 않는 캐릭터 아닌가.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매력을 발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제임스 스튜어트라는 배우의 독특한 이미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다시 보며 새롭게 눈에 들어온 장면이 하나 있었다. 톰이 사람에게 총을 쏘는 유일한 장면에 앞서 그를 쏘려는 악당의 총을 프렌치가 막아서서 대신 맞는 바람에 죽어 가는 장면이었다. 다른 영화의 장면이 거기에 겹쳐 보였던 게 그 장면이 새롭게 보인 이유였다. 다른 영화란, 앞서 리뷰를 게재했던 <평원아(The Plainsmen, 1936)>라는 영화다. 그 영화에서는 등 뒤에서 총을 맞아 죽어가는 와일드 빌 히콕에게 칼라미티 제인이 키스하며 “당신이 닦아내지 않은 유일한 키스군요.”라는 대사를 한다. 무뚝뚝한 히콕이 제인을 사랑하면서도 키스를 받아주지 않고 닦아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3년 후에 발표된 영화 <사진>에서 키스와 관련된 다르면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는 얘기다. 톰에게 안겨 죽어가는 프렌치가 내뱉는 대사는, “톰, 작별 키스해 줄래요?”였다. 프렌치가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닦아내면서 한 말이었다. 왜냐하면 톰이 프렌치에게 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쁜 무리와 어울리는 술집 여자에게 착하게 살아보라는 조언을 한 것이었다. 짙은 화장 뒤에 아름다운 모습을 숨겨둔 것 같으니, 화장을 지우고 자신의 얼굴을 잘 보라고. 그리고 그런 얼굴에 어울리는 삶을 살라고. 입맞춤의 의미가 다르긴 하지만 입을 닦는 행동과 관련되었다는 점이나 주연 여배우의 대사였다는 점에서도 <평원아>의 장면이 연상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처음 볼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어렴풋이나마 그때의 기분을 짐작해 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프렌치를 칼라미티만큼 주요 인물로 생각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칼라미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히콕과 친한 관계였지만 프렌치는 마지막을 빼고는 톰의 적대적 상대였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선과 악의 역할을 뚜렷이 구분해서 보았던 게 그 장면의 의미를 놓치고 만 셈이었다. 마지막에 회개한 셈이지만 악인의 죽음에 의미를 두긴 싫었나 보다.
<사진>은 주연 배우와 주인공의 캐릭터가 꼭 맞아떨어지는 데에다 유머가 넘치는 장면도 많고 안타까운 희생에 이어지는 권선징악적 해피 엔딩까지 균형 잡힌 모양새가 매력적인 영화였다. 가장 웃기는 미국 영화 100편의 후보에 올랐던 적이 있을 정도이니 재미있는 영화인 건 틀림없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서부극을 빙자한 안티-서부극이었다는 점이다. <사진>을 서부극으로만 생각하고 보았다면 실망할 수 있다. 모든 적을 소탕해 버리려는 일념에 넘치는 주인공이 액션 가득한 활약을 펼치는 장면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로맨스 관계도 아닌 술집 여자와 옥신각신 다투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총도 차지 않은 채 어떤 문제든 말로 해결하려 들었고, 악당과의 건 플레이조차 단 한 장면뿐일 정도로 액션 장면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도 성공하게 된 이유는 서부활극에 중심을 둔 게 아니라 사람 사는 모습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멋있는 서부가 아니라 엉망진창인 서부의 모습을 보여주며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건 악당들 패거리라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들은 술집을 운영하며 섹슈얼함으로 동네 주민들을 꼬드기는 여자를 간판처럼 앞세우고 있었다. 그런 세상의 중심에 나타난 게 부보안관 톰이었는데, 그는 총이 아닌 법과 질서를 내세우며 평화롭게 사람 사는 마을로 그 세상을 바꾸어 간다. 그 속에 나오는 여성들의 상당히 열린 모습도 이 영화의 특징이다. 악에서 선의 얼굴로 바꾸며 자신을 희생하는 여자주인공을 비롯하여 마을의 타락을 멈추기 위하여 앞장선 사람들은 마을 여성들이었다. 남자 주인공이 중심에 서 있긴 하지만 바른 행동의 실천에 나선 사람들은 모두 여성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1930년대에 내놓은 서부극 모양의 영화로서는 획기적이지 않은가.
이 영화에 나오는 서부의 발라드 한 곡이 있다. ‘카우보이 리틀 조(Little Joe the Wrangler)’라는 제목의 노래로 미국 서부 작가 협회(Western Writers of America)에서 최고의 서부 노래 100곡 가운데 한 곡으로 선정하기도 했다는 노래다. 가사는 혼자 떠돌아다니다 카우보이가 된 소년 리틀 조의 삶을 다룬 것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이 카우보이 역할을 열심히 하던 중 사고로 죽음을 맞게 되는데, 그것을 애도하는 형태의 노래(Marty Robbins의 노래 가사 참조)였다. 그는 영웅적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열심히 살았던 서부의 어린 시민이었다. 이 영화에서도 열심히 살다 간 희생자들(술집 주인 프렌치와 보안관 덤스데일)이 이 노래를 불렀고, 평화를 되찾게 된 마을에 마차를 타고 지나가던 어린 소년 소녀들이 합창으로 부르기도 했던 노래다. 노래 부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톰 데스트리는 쓸쓸한 웃음을 짓는다. 이 노래로도 영화 <사진>의 전체적 모양새를 볼 수 있지 않는가.
<사진>은 서부극의 뼈대에 코미디의 살을 붙이고 휴먼드라마의 피가 흐르도록 만든 영화였다. <사진>이란 제목도 썩 마음에 든다. 그들이 열심히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모래 섞인 흙먼지(사진, 沙塵)"를 일으켰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