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배우, <에덴의 동쪽>
<에덴의 동쪽>을 TV에서 방영하기 전에도 제임스 딘(James Dean)이란 이름과 <에덴의 동쪽(East of Eden)>이란 제목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제임스 딘의 사진이 여기저기 가게에 많이 붙어 있는 걸 봐서 그랬을 것이다. 그는 이미 전설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처음 본 것이 <쟈이안트>였다. 물론 극장에서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제임스 딘이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고 소문난 영화는 두말할 필요 없이 <에덴의 동쪽>이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정도가 되다 보니 그런 전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보기를 갈망했던 영화가 TV에서나마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어둡고 작은 화면이었지만 제임스 딘의 표정과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에덴의 동쪽>의 영화 포스터는 초등학교 때 동네 담벼락에서 봤다. 그렇지만 그때는 영화도 배우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따지자면 영화 속 이야기에 열심히 따라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갈수록 영화는 물론 배우나 감독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다 보니 궁금할 수밖에 없는 영화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그중의 한편이 바로 <에덴의 동쪽>이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제임스 딘이 궁금하고 그의 연기가 궁금해서였다.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청춘과 반항이라는 단어를 항상 달고 다니는 데에다 불세출의 배우라고 하며 우상처럼 받들어 모시는 분위기다 보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연기가 궁금하다기보다는 그의 매력이 궁금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어디에도 있어야 할 것처럼 많이 보였던 제임스 딘의 사진도 단순히 연기에 대한 찬사로만 보이진 않았다. 그를 끔찍하게 좋아하고 있다는 표시로 볼 수밖에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렇게들 난리인지 궁금했던 게 나의 솔직한 속내였다. 그런 팬심이 분출된 진원지가 <에덴의 동쪽>이란 영화라고 하니 더 보고 싶었고.
<에덴의 동쪽>은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라 중학생 정도는 되어서 보았지만 제법 혼란스러움을 느낀 영화였다. 왜냐하면 우선 주인공 칼 트래스크(제임스 딘)가 좋은 심성을 가진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데 비해 그의 아버지 아담(레이몬드 머시)과 때리기까지 한 쌍둥이 형 아론(리처드 다발로스)은 꽤 좋은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빈 곳을 채워주는 애브라(줄리 해리스)라는 캐릭터가 있었기에 특별히 문제 삼지는 못했다. 그녀는 자신이 좋은 아이가 아니었던 얘기를 들려주며 칼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서 칼이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칼과 애브라의 사랑을 중심에 두고 보면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다. 그것은 가장 이해하기 쉽기도 하고 <에덴의 동쪽> OST의 서정적 메인 테마의 멜로디에 어울리는 서사이기도 하다. 중학생 시절에는 그 정도까지만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시기는 1957년이었는데, 당시의 신문 광고를 보면 거기까지 보기를 기대하는 듯 느껴진다. 신문 광고에는 칼과 애브라 둘이 있는 장면 혹은 제임스 딘 혼자뿐인 장면이 대부분이니까. 그래도 카피에는 배우와 감독에 원작까지 언급하고 있고, 내용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어서 영화에 진심이었던 시절임을 엿볼 수 있다.
신인! 감독! 원작!! 인간의 애증과 육친의 상극을 묘파(描破)한 감동의 명작
“워터프론트”의 거장 엘리아 카잔 감독
원작 문호 존 스타인벡
주연 전 세계 화제의 신인 제임스 딘, 신성 줄리 해리스
불세출의 명우 제임스 딘의 자연적 연기! 영화사 지고의 찬사를 받은 나이브한 매력!!
1957년 개봉 당시의 신문을 보면 영화 <에덴의 동쪽>에 대한 이야기보다 제임스 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있다. ‘유상무상(有象無象)’이란 제목의 칼럼에서는 <에덴의 동쪽>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보기 나름이지만 재미있는 구석이 있기도 했다.
... 민주주의적 생활방식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바탕이 약했고 또한 민주주의적 교육방식에 왜곡된 점이 적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가정이 지녀야만 하는 요소가 날로 괴멸되어 가다시피 기울어지는 현상으로 보아서는 이 영화는 널리 부모 형제끼리 같이 가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근자(近者) 미국의 사회학은 거의 사회 심리학적 특징을 지녔고 도는 그런 중에도 사회의 제 집단 중에서도 가정을 제1차 집단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현저하거니와 그네들의 개인주의가 가정의 혈연적 애정까지 파괴하려 드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 가정의 공동체적 윤리성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인간 본연 또는 현실적 요청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실정이기도 한 것 같다. (중략) 우리네의 현실에 비추어 이 영화는 교육적 가치까지 지닌 것으로 청소년들이 보아서 이익됨이 적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1957년 9월 1일 경향신문)
부모 형제가 같이 감상해야 할 영화로 평가할 만큼 교육적 가치를 부여하는 면이 재미있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 사회에 대하여 “윤리성 회복”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중심 가치관이 무너지는 걸 걱정하고 있는 부분은 그때의 상황만으로 볼 구석은 아닌 것 같다.
제임스 딘에 대하여 쓴 칼럼을 보면 그의 “인기”에 대하여 대단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분위기를 대번에 느낄 수 있다.
... 불과 세 작품밖에 출연하지 않았는데 불구하고 백회 이상 주연한 게리 쿠퍼나 클라크 게이블보다도 영원히 그의 이름이 빛나고 있으며 또 그가 죽음으로써 한결 더 높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그는 클라크 게이블이나 커크 다글라스처럼 그저 평범하고 관능을 즐기는 유행아에게 즐김을 받는 그런 인기가 아니고 지성이 있는 모든 인간에게 추앙을 받는 그러한 인기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본다.
(1957년 8월 24일 조선일보)
제임스 딘보다 훨씬 선배인 유명 배우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 이상이라고 단번에 평가하고 있는 걸 보면 당시 그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아니었을까. 특히 유행이 아니라 지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추앙을 받는 존재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거의 신화랄까 컬트적 숭배의 바람이 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마저 든다.
제임스 딘은 <쟈이안트>의 제트 링크로 처음 보았지만 역시 <에덴의 동쪽>의 칼 트래스크 쪽이 훨씬 더 빛을 발한다는 걸 느꼈다. 성격적으로는 그렇게 매력적인 주인공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가 꼭 그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칼이나 제임스 딘을 흉내 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지만, 제임스 딘이란 배우가 얼마나 칼에 어울리는 연기를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에덴의 동쪽>을 보면 누구라도 제임스 딘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임스 딘이 칼 트래스크와 동일하게 보였다는 말은 꼭 칭찬만은 아니었다. 원작자 존 스타인벡은 칼 역할에는 놀랄 정도로 딱이라고 하면서도 인간적으로 마음에 드는 건 아니란 얘기를 했다고 하며, 엘리아 카잔 감독도 칼임에는 확실하지만 좋은 배우인지는 모르겠다고 했고 제임스 딘을 싫어한다는 소문까지 파다했다고 한다.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니 중학생 때 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제임스 딘과 동격인 캐릭터 칼이 어른들로서는 싫어할 캐릭터에 가까운지 몰라도 소년으로서는 딱히 싫어할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소년이나 좋아할 타입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반항과 방황의 사춘기 시절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캐릭터임이 분명하니까.
<에덴의 동쪽>의 비평 중에서는 영화평론가 폴린 케일의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할리우드가 미국의 전위적 영화 감각을 받아들인 순간”이라고 표현하면서, “지루한 영화는 아니지만 매우 낯선(strange) 작품”이라고도 평했다. 어린 시절에도 영화를 보면서 일반적인 미국 영화와는 다르게 생각했던 건 칼이란 캐릭터의 혼란스러움 때문이었다. 전통적 시각으로 보자면, 애브라와의 사랑도 이루어지고 아버지와도 화해하는 훈훈한 해피엔딩을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아담과 아론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들의 갈등을 싸움으로 보자면 승부가 처참하게 끝나버렸다는 생각에. 그것도 좋음이 나쁨에게 KO패를 하는 것으로. 그런 느낌 때문에 “전위적 영화 감각”이나 “매우 낯선 작품”이란 말에 공감이 갔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에덴의 동쪽>을 낯설게 보지 않기로 했다. 고전적으로만 해석하겠다는 고집을 꺾으니 나름의 모양이 드러나서다. 칼과 아론을 같은 인물 다른 마음으로 보겠다는 설정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들은 천사(아론)와 악마(칼)처럼 명백하게 다른 캐릭터를 맡고 있지는 않아서였다. 둘 다 아버지를 돕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달라서 벌어진 갈등 아닌가. 아론은 아버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받아들이려는 마음, 칼은 아버지가 가리키는 쪽과 다른 방향이 궁금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행동이 다르게 나타나는 인간의 속성처럼 말이다. 칼과 아론이 그런 마음의 방향을 의미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하면 최종 결과가 나름 해석이 된다. 어머니를 모르면서 아버지 말만 믿었던 아론은 어머니의 등장으로 인하여 사실이 아닌 상상에서 비롯된 기반이 무너진 셈이니 더 이상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어진다. 반대로 어머니에 대한 궁금증을 기어이 풀어버린 칼은 자신의 방향에서 자신의 정체를 확인한 셈이 되었다. 아버지 아담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아버지로서 기대했던 아론이 방향을 잃게 되었으니 외면하고자 무시했던 칼의 방향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셈이다. 애브라 역시 자신을 상상의 여인처럼 보려는 아론은 부담스러웠지만 감정을 드러낸 대화가 가능했던 칼의 마음은 받아들이게 된 것이고.
<에덴의 동쪽>을 봄으로써 전설이 아니라 진짜 제임스 딘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청춘과 반항의 아이콘 등등 그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문구처럼 멋있게 보였던 건 아니었다. 그때까지 멋있게 보였던 서부의 총잡이나 전쟁의 영웅 느낌도 아니고, 잘 생기고 상냥하고 로맨틱한 기사 느낌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만의 매력이 있었다. 차라리 그런 느낌에는 낯설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생김새, 표정 그리고 그의 행동거지에서 느껴지는 감성이랄까 뭐 그런 것이었다. 예전에 그를 묘사했던 단어들을 모아보면 감이 올지 모르겠다. 오해, 상처, 고통, 소외, 주저, 고독 그리고 청춘.
제임스 딘이 나오는 영화 세 편을 보고 또 보고 또 보았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열 번? 스무 번? 아마 그 이상일 것이다. 그래도 또 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면 충분히 그의 팬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