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이야기, <평원아>
어린 시절에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점이 하나 있었다. 어른들은 영화 얘기만 나오면 꼭 배우들 얘기를 꺼낸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영화 얘기를 하는 건지 배우 얘기를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팬이란 게 뭔지 알게 되면서 그런 어른들의 버릇을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를 열심히 보지 않고서야 생길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지도 않고 좋아할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한 편의 영화로도 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배우의 매력 때문인지 영화 속 캐릭터의 매력 때문인지 알쏭달쏭할 수는 있지만.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팬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가르쳐준 영화는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서부극이었다. 서부의 영웅 ‘와일드 빌 히콕’을 멋있게 본 건지 배우 ‘게리 쿠퍼’를 멋있게 본 건지 하여튼 영화를 보면서 저 사람 참 멋있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영화는 서부극 <평원아>였다.
‘서부’라는 단어는 따로 듣기보다는 ‘서부극’이나 ‘서부영화’라는 말로 먼저 들은 게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서부극은 어릴 때부터 익히 들었던 영화 장르다. 영화로도 TV 드라마로도 서부극을 많이 볼 수 있었기에 그 말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대단히 재미있는 영화로 공인되어 있는 것 같았고, 배우의 실제 실력까지 평가하는 말도 나돌았다. 예를 들어 누가 총을 제일 빨리 뽑는지 아는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때는 괜히 해보는 얘기라고 생각했었는데 근거는 있었다. 예전의 신문에 ‘서부극의 멋, 간 풀레이(건 플레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날 정도였으니까. 기사의 한 대목을 소개하면,
서부극의 모델이 된 수많은 영웅호걸들 중, 건 플레이의 챔피언은 ‘와일드 빌 히콕크’와 ‘빌리 더 키드’라는 게 정설이다. 명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도 상당한 명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는 속사보다도 정확한 솜씨가 더욱 유명하다. (중략) 스크린에서 보여준 스타들의 솜씨로는 ‘게리 쿠퍼’가 레코드 맨이다. (중략) <평원아>라는 데서 ‘와일드 빌 히콕크’로 분장한 ‘쿠퍼’는 권총집에서 총을 빼어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꼭 0.4초 걸렸다. 이 기록을 아직 깨뜨린 스타가 없다. (1960년 11월 27일, 동아일보)
이 기사의 부제는 ‘최고기록 0.4초, 총집에서 빼어 쏘기까지’였다. 정확한 기록까지 언급하고 있으니 참 구체적이지 않은가. 기사에는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름이 여럿 거론되어 있었지만, 최고의 스타와 최고의 기록으로 이름이 올라있는 이가 게리 쿠퍼였으니 이미 그는 전설이 되어 있었던 셈이다.
<평원아>는 첫 장면부터가 인상적이었다. 오프닝 타이틀이 올라가는 모습 – 결국 <스타워스>에서 사용되고야 말았던 - 도 그렇고, 서사가 링컨 대통령 이야기부터 시작되는 점도 그랬다. 어린 마음에 링컨이란 역사적 인물의 등장만 하더라도 신기했으니까. <평원아>가 미국 역사와 관련된 영화라는 걸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와일드 빌 히콕(게리 쿠퍼)이란 사람이 실존 인물이었단 사실도 몰랐다. 차라리 버팔로 빌이란 이름은 들은 적 있는 것 같기도 했지만 칼라미티 제인(진 아서)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거칠었다는 미국의 서부 시절에 남자 옷을 입고 용감무쌍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여성의 모습이 가당찮다 싶어서. 서부극을 계속 보다 보니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 실재한 인물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존 인물인데도 그들의 이미지가 영화에 따라 바뀌는 걸 보며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여기서는 좋은 사람인데 저기서는 나쁜 사람이라니 도대체 뭔가 싶었던 거다. 역사적 인물이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되면서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재미를 느끼기도 했는데, 그런 재미의 기준이 된 영화는 <평원아>였다. <평원아>에는 소위 서부의 영웅으로 일컫는 실존 인물들이 왕창 나오기 때문이다. 와일드 빌, 버팔로 빌, 칼라미티 제인에 제7기병대의 커스터 장군까지. 이 영화를 볼 때는 그들을 알지 못했지만 그들을 알게 되면서 그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평원아>에서의 이미지가 같이 떠올랐다. <평원아>는 내게 서부극의 기준과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부극이고 뭐고를 따지기 이전에 기억에 남는 영화였기에 그랬던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서부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원점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역사를 서부극으로 접한 최초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평원아>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건 단연코 마지막 장면이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이나 안타까우면서도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엄청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는 걸 자랑하려면 마지막 장면 얘기를 꺼내야만 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 장면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려면 반드시 그보다 전에 있었던 상황을 먼저 설명해야만 했고, 초등학생이 남녀관계나 키스에 대한 설명까지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스러울 수밖에.
얘기하자면 이런 것이다. 개구쟁이 머슴애 같은 여인 칼라미티 제인은 히콕만 보면 달려들어 키스한다. 그 행동에 대한 히콕의 반응은 차갑기만 하다. 항상 입 맞춘 부위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내니까. 이 부분은 서부극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우스꽝스러운 로맨틱 코미디다. 마음속으로는 서로 좋아하면서도 여자는 애써 좋아하는 티를 내고 남자는 애써 거부하는 티를 낸다. 보는 사람 눈에는 풋풋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비치는 모습이다. 특히 히콕의 표정은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 그리고 자기 마음을 나타내기조차 두려운 무뚝뚝한 시골 사내의 것이었다. 결국 히콕이 칼라미티를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면서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순간, 가슴 아픈 마지막 장면이 닥쳐오는 것이다. 이런 얘기만 하고 있으면 용감한 영웅이 등장하는 서부영화 얘기가 아니라 로맨스 영화 얘기를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평원아>에는 링컨 대통령의 최후부터 시작해서 개척민들 간의 총격전도 나오고, 군인과 인디언과의 싸움도 등장하고, 제7기병대의 최후까지 보여준다. 서부극이란 장르에 걸맞게 총싸움 장면이 제법 등장하는 데에다 미국 역사에 기록된 의미 있는 장면들도 많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때도 지금도 와일드 빌 히콕이란 캐릭터가 멋있고, 칼라미티 제인과의 로맨스 덕분에 <평원아>가 좋다. 서부의 영웅이고 뭐고 간에 사람 사는 이야기에 꽂혔다는 얘기다. 처음 볼 때는 더더욱 그랬다. 그들이 실존 인물인 줄도 몰랐고, 주요 사건들이 실제로 벌어진 상황인 줄조차 몰랐으니까.
옛날 신문에 보니, 서부극의 배경에 대한 기사가 실린 적도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미국 개척과 서부극, 배경 이룬 10대 사건’이었다. 그중 여섯 번째로 오른 내용이 ‘와일드 빌의 최후’였다.
와일드 빌은 권총의 대명수로서, 보안관으로도 날렸으며, 한편 도박사로서 솜씨가 굉장했다. 이 희대의 명수도 1877년 8월 1일 남 다코다 주막에서 포카를 하다 잭 맥콜이라는 사나이로부터 등 뒤를 맞고 쓰러졌다. 와일드 빌은 쿠퍼가 분한 <평원아>, <남부의 용자>, <무법지대>등 수 편이 있다. (1961년 5월 1일, 동아일보)
이렇듯 <평원아>의 마지막 장면은 역사에 기록된 사건이 맞지만, 와일드 빌 히콕의 행보는 <평원아>와는 달랐다. 와일드 빌의 의연함이나 칼라미티 제인과의 로맨스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서부의 영웅으로 묘사되는 인물들은 그 시절을 열심히 살았던 인물이긴 하겠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그때의 상황을 기록한 그들의 역사이기도 했다. 결국 <평원아>의 감동은 미국 서부의 역사나 그 속에 있었던 실재 인물이 아니라 영화 속의 이야기와 영화 속 캐릭터들의 매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평원아> 외에도 와일드 빌 히콕이란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는 여럿 봤지만 <평원아>만큼 멋있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만큼 <평원아>에서의 와일드 빌 히콕 캐릭터가 제일 멋있게 그려졌다고 생각한다. <평원아>만큼 정의롭고 순수한 삶을 살았던 와일드 빌 히콕을 그린 영화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림에 방점을 찍은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마지막 장면이었다. 칼라미티 제인과의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악당의 총에 쓰러진 히콕을 안고 울던 칼라미티 제인이 벌인 퍼포먼스였다. 그런 상황에서 칼라미티가 뱉은 대사는 어린 마음에도 감동을 안겨주었다. 성우들이 더빙한 버전을 보았는데, “이제는 닦지 않는군요.”라는 대사로 기억한다. 그녀의 키스를 항상 닦아버리던 히콕이었으니까 말이다. 무뚝뚝하지만 용감하게 살아가던 사나이의 안타까운 최후였다.
내겐 서부극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배우는 <평원아>의 게리 쿠퍼다. 와일드 빌 히콕이라는 서부의 영웅으로 떠올리는 게 아니라 영화에 등장한 게리 쿠퍼의 캐릭터가 매력적이어서다. 조용하고 무뚝뚝하지만 꿋꿋하게 할 일을 해내는 듬직함이 있고, 애정 공세에도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수줍은 성격과 잘 생겼지만 순박해 보이는 외모도 마음에 들었다. 그 사람은 와일드 빌 히콕이 아니라 그 이름을 걸고 연기한 게리 쿠퍼였다. 그래서 게리 쿠퍼의 팬이 되어버렸던 거다. 굳이 서부극이 아니더라도 그 이름이 보이는 영화라면 다 보고 싶었다. <평원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요 캐릭터들의 활약이라고 해도 보통 2시간 정도의 한정된 시간 내에 펼쳐질 뿐이지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그것은 배역을 맡은 배우의 인기 덕분인 경우도 있지만, 그 캐릭터 자체의 매력 덕분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주인공이라고 하면 “착하고 정의롭고 용감한”이란 표어를 붙이고 다니는 듯한 도식적 캐릭터도 많았다. 그러다가 그런 부분을 탈피하고자 안티히어로 시대를 거치더니, “착하거나 정의롭거나 용감하지 않은” 주요 인물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드디어 사악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인물이 주목받는 시대도 왔다. 물론 끝까지 보면 그렇게 된 어쩔 수 없었던 이유가 붙긴 하지만. 하여튼 영화의 성공은 예나 지금이나 주요 캐릭터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원아>에서의 게리 쿠퍼가 맡은 역할은 도식적이라고 표현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실존 인물이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는 영화 속의 캐릭터였다. 그 실존 인물의 특징을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니 총싸움 잘하는 킬러였다. 누구와의 결투에서 이겼다거나, 혼자서 여럿을 죽였다거나 하는 얘기들이 무용담으로 전해져 왔던 총잡이로 유명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 인물과는 달랐다. 싸우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아무 하고나 싸우려 들지 않았던,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사랑과 우정을 위하여 싸움에 나섰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착하고 정의롭고 용감한 캐릭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최후의 순간조차 악의 응징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다 맞게 되었던 사람이다. 사랑하는 여인과 제대로 된 키스 한 번 하지 못했기에 마지막 입맞춤을 한 여인의 입에서는 안타까움이 흘러나오고야 말았다.
당신이 닦아내지 않은 유일한 키스군요.
That's one kiss you won't wipe off.
요즘은 그런 영화 속 주인공이 그리워진다. 순박함과 용감함을 겸비한 우직한 주인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