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머 갠트리의 길을 밝혀준 리처드 브룩스 감독

영화 속의 감독, <엘머 갠트리>

by 김밥


어릴 때 친구 따라 교회에 가 본 적은 있지만, 줄곧 다닌 적은 없었다. 종교에 가까이 가 본 적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고교 시절 TV에서 <엘머 갠트리>를 보면서 종교가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내뱉는 성경 구절은 지금도 써먹을 정도로 마음에 와닿았다. 종교보다는 인간 드라마로서의 울림이 크게 느껴졌다. 사기군 같은 청년이 사랑을 빌미로 종교에 온몸을 바치는 척하지만,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행실을 반성하게 된다는 성장 드라마로 이해했다. ‘테네시 월츠’로 유명한 가수 패티 페이지가 배우로 나오는 걸 즐겁게 지켜봤던 영화이기도 했다. 마지막에 패티 페이지가 부르는 노래도 인상적이었다. <엘머 갠트리>는 여러모로 느끼고 생각할 게 많은 영화였다.


1978년 2월 18일 경향신문
1978년 2월 18일 경향신문




엘머 갠트리 (Elmer Gantry, 1960)




<엘머 갠트리>를 처음 보았을 때 상당히 몰입력이 있었다. 가장 크게 느껴졌던 건 궁극적인 의문이었다.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그것이 궁금해졌었다. 주인공 두 사람을 생각하면 허무한 결말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종교를 빌미로 만나게 되었다고는 해도 남자와 여자는 사랑과 성공을 위하여 열심히 살았고 그걸 일보 직전도 아니고 바로 코앞에 두고 허물어져버린 결말이었다.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건가, 라는 궁극적인 고민이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첫 장면이자 소설의 첫 장을 펼치면 첫 문장이 “엘머 갠트리는 취해있었다.”로 시작한다. 유창하고, 사랑스럽고, 호전적으로 취해있었다고 부연하면서. 다분히 엘머 갠트리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말도 잘하고, 호감이 가기도 하지만, 싸움을 걸기도 잘했다는 걸 보면 감성적이면서 감정적이기도 한, 한마디로 제 기분대로 사는 캐릭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 정말로 그렇다. 살기는 적당히 사는 것 같지만 마음먹으면 능력이 발휘되는 인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 멋대로인 것 같아도 멋있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눈에 비쳤던 엘머의 모습도 좌절과 혼란이 겹친 상황에서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는 걸로 보여서 더 멋있었다. 그게 영화 <엘머 갠트리>의 매력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엘머 갠트리>를 개봉했을 때 신문 광고에 크게 걸려 있는 문구가 있었다. “미국인으로서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 문호인 루이스의 문제작”이라고. 거기에 “왜? 이 원작이 전미국에서 판금조치됐으며 원작자를 죽이려까지 했나”라는 문구까지 붙어있었다. 상당히 도발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사실이었나 보다. 미국에서 논란이 많았던 소설이라서 이 영화에 돈을 대려는 제작사가 없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영화화는 되었지만 검열 – 헤이스 코드(Hays code) – 을 의식해서 원작의 급진적 내용을 많이 희석한 걸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개봉 당시 신문에 게재된 칼럼을 봐도 그런 면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소개로서는 꽤 논쟁적 분위기가 느껴질 정도로. 처음부터 원작을 밝히고 시작하는 글이기도 했다.


미국에 처음 노벨상을 가져다준 싱클레어 루이스의 동명 소설을 주연자인 버트 랭카스터와 감독이며 각본까지 쓴 리처드 브룩스가 콤비가 되어 만든 작품. 신생 종교의 위계성을 대담하게 폭로하고 비판한 이색작이다. 종교가 기업화하고 상품화하며 전도가 일종의 흥행처럼 변모해 가는 모습을 극적으로 다루었다. 맹신(盲信)이 광신(狂信)이 되는 현상이 우매한 대중들에겐 많았다. 신앙을 이끄는 자가 올바를 때는 오히려 맹신이 독신(篤信)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위험천만한 일이다. (중략) 믿음이란 사람에게 위대한 힘을 주기도 하나 잘못 믿으면 파멸한다는 교훈을 이 영화는 시니컬한 묘사로서 일깨워주고 있다. 라스트 신에서는 한낱 담뱃불의 실화(失火)가 종말을 가져오지만 이것이 종말이 아니고 불의 심판이었다는 오인이 있다면 비극은 아직 존재할 수 있을 것이고, 여교조의 소사(燒死)도 어처구니없이 순교라고 역설한다면 영화 속의 무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1963년 4월 6일 경향신문)



상당히 화제를 몰고 온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불행히도 「엘머 갠트리」를 읽어보지는 못했다. 원작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발매된 흔적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하여튼 소설이 그만큼 급진적으로 보이는 데에는 종교 제도 자체에 대한 비판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점을 완화하기 위하여 영화에서는 제도가 아니라 인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주인공 엘머 갠트리에 대한 설정도 바뀐 점이 있었다. 신분도 조금 다르게 설정되었다지만 결정적인 것은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 양심적인 인간의 길로 가겠노라는 영화 마무리와는 달리 원작에서의 갠트리는 끝까지 권력 지향과 자기기만(自己欺瞞)의 길로 가는 캐릭터로 그려진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듣고 보니 원작을 각색하여 각본까지 담당했던 리처드 브룩스 감독에게 감사하고 싶어진다. 영화에서 보여준 주인공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엘머 갠트리>에 그만큼 감동하진 않았을 것 같아서다. 인생의 영화 한 편이 사라지는 슬픈 일이 생길 뻔 한 걸 막아준 셈이니 감사하다.


주인공의 이름이 제목이기도 하니 그 역할에 모든 게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사였다. 원작의 일부를 각색하여 각본을 쓴 리처드 브룩스 감독은 주인공 엘머 갠트리에 대하여 “누구나 그렇듯 돈, 섹스 그리고 종교를 다 가지길 원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했다. 조금 비트는 투이긴 하지만 전형적인 미국의 청년을 모델로 삼았다는 얘기였다. 영화 속에서의 엘머를 보면 그런 감독의 속내를 그대로 옮겨놓은 캐릭터가 맞는 것 같다. 술 먹고 여자 밝히며 기분 가는 대로 사는 것 같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소신(小信) 있고 용기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캐릭터니까 말이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걸로 알려져 있고, 엘머 갠트리 역할로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했던 버트 랭카스터의 말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그는 “엘머는 연기가 아니었다. 바로 나였다.”라고 말했다. 논란 많은 위선적 인간이 아니라 허술해 보여도 나름 열심히 사는 인간 “엘머 갠트리” 다시 말하자면 미국 청년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세월이 흘러도 <엘머 갠트리>는 여전히 “내 인생의 영화”중 한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보면서도 그 감동은 잊히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던 영화다. 뒤늦게라도 알아챘다는 생각에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은 리처드 브룩스 감독의 역량이었다. 그는 만만찮은 원작을 가지고 연출한 작품이 많았던 감독이었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싱클레어 루이스를 비롯하여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테네시 윌리엄스, 조지프 콘래드 같은 작가들이 그가 선택한 원작자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종교적 사회적 비판을 무릅쓰고라도 논란이 많았던 소설 「엘머 갠트리」를 악착같이(?) 영화화한 용기는 놀라울 뿐이다. 나아가서는 원작을 각색하여 새로운 면으로의 비판적 시각을 부여함과 동시에 주인공을 성공적으로 변신시켰다는 점에서는 더욱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 회의적 시선이 강조될 수 있는 그림을 긍정적 희망적 시선으로도 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상황에서 엘머 갠트리가 가지고 있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사랑을 바치려 했던 여인이자 소신과 용기를 나누고자 했던 여인이기도 했던 샤론 팔코너(진 시몬즈)는 없었다. 종교부흥회의 퍼포먼스로 떨쳤던 유명세는 남아 있었다. 샤론에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었지만... 부흥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목사가 제언하고 엘머가 답하는 게 이 영화의 마지막 대화 장면이었다. 목사의 제언은 이미 ‘엘머 갠트리’라는 이름이 유명한 만큼 부흥회 일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샤론이 그걸 희망할 거라면서. 거기에 대한 엘머의 답변이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였다. 개인적으로는 그 대사가 <엘머 갠트리>를 뇌리 속에 남기는 데 결정적 한 방이었다. 엘머의 답변은 그의 말이 아니라 성경 한 구절이었다. 유명한 구절이지만 어떤 성경에 기록된 버전이 아니라 느낌상 가장 마음에 들었던 버전으로 기억하게 되었다.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이해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그것들을 버렸노라. (고린도 전서 13장 11절)




보태는 말

엘머 갠트리가 실의에 빠진 대중을 위로하려고 마지막에 불렀던 노래 ‘I’m On My Way’ 또한 <엘머 갠트리>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선창은 엘머 갠트리 역할의 버트 랭카스터가 하지만 이어서 부르는 것은 레이철 자매로 분했던 패티 페이지였다. 창년 룰루 베인스 역의 셜리 존스와 민완기자 짐 래프터 역의 아더 케네디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패티 페이지
셜리 존스
아더 케네디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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