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배우, <나는 고백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물론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앤 박스터라는 주연 배우의 이름 그리고 칼 말든이라는 조연 배우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던 때였다. <나는 고백한다>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상황이었다. 제법 영화를 아는 척하던 때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떤 영화를 보고 감동도 받은 김에 아침부터 그 영화를 두고 떠들다가 곤란을 겪었다. 다름 아닌 제목 때문이었다. 중학생이 아는 “Confuse”라는 단어와 비슷하게 생긴 단어 “Confess”가 그 영화의 제목에 들어 있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본 신문에는 영어 제목이 나와 있어서 열심히 사전을 찾아가면서까지 확인한 단어였건만 친구는 계속 ‘confuse’라고 우기는 바람에 분위가 썰렁해져 버렸다. 지금이라면 금방 확인할 수 있겠지만 그때로선 금방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 친구는 요즘 말로 절친이었기 때문에 이겨보겠노라고 다투기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넘기기도 힘든 그 답답함이란... 영화에서 받은 감동과 함께 그런 ‘혼동’과 ‘혼란’까지 추억으로 남겨준 영화가 <나는 고백한다>였다.
앞서 고백했지만 <나는 고백한다>를 볼 때 이미 알프레드 히치콕이라는 감독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명성도 마찬가지였고. 그런데 보고 나서의 느낌은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라기보다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영화라는 느낌이 강했다. 히치콕의 분위기도 약했지만 클리프트가 맡았던 신부 마이클 로건이란 캐릭터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궁지에 몰리면서도 말 못 하고 고민할 수밖에 없는 역할이지만 그런 속내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일단 고민을 안고 사는듯한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얼굴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딱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남긴 유명한 영화는 많지만 그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고백한다>였음을 고백한다.
개인적으로 가톨릭 신부의 복장이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다분히 영화로부터 비롯되었을 공산이 짙다. 금방 생각해도 그런 복장의 주인공이 떠오르는 영화가 많기 때문이다. <소년의 거리>, <나의 길을 가련다>, <천국의 열쇠>, <미션>, <엑소시스트> 그리고 진짜 신부의 다큐멘터리 <울지 마 톤즈>까지. 작정하고 찾아보면 마음에 와닿는 신부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영화에 나오는 신부들은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에 투철한 캐릭터들이었다. 그들이 멋있어 보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랄 수밖에. 그들의 고결한 성품은 보통 사람의 것과는 차원이 달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백한다>도 그런 영화 중의 한편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주인공 신부의 역할은 다른 영화보다는 협소한 편이었다. 이 영화는 한 신부가 신부이기 이전의 사랑 때문에 곤욕을 겪게 된다는 개인의 이야기였다. 신부의 업무인 고해성사(告解聖事)로부터 비롯된 일이었지만 사랑했던 여인이 없었더라면 신부가 휘말릴 이유는 없었고, 그렇다 보니 옛사랑과의 이야기가 많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다른 영화에 나왔던 신부들의 활약에 비해서는 미미(?)한 활약이라고 볼 수도 있는 서사였다. 오히려 그런 상황이 좁지만 깊게 고민하는 신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연기 특히 얼굴 표정에 더 집중하게 되지 않았을까.
<나는 고백한다(1953)>는 우리나라에서 1956년에 개봉되었다. 그때의 신문 기사 영화평에서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몇 군데를 발췌하여 보았다.
스릴러 영화의 거장 히치코크 작품 <나는 고백한다>는 금년도에 들어와서 최고 예술 가치를 나타낸 영화이다. 미국 신문은 그의 작품 중 최대의 호평을 받았다고 보도하고 있다.
(1956년 9월 13일 경향신문)
극히 우발적인 살인이었기에 사건 중심이기보다는 무척 심리적이라는 것이 또한 이색이리라. 몇 군데 의문과 함께 향그러운 여운을 남기는 채 오래 기억에 남을 가작임에는 틀림없다.
(1956년 9월 22일 동아일보)
미국에서 최고의 호평을 받았다는 부분은 사실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혹평만을 받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관객 면에서도 비평 면에서도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관객 면에서는 “몇 군데 의문과 함께”라는 부분에서 표현한 것처럼 우연의 일치가 많다는 지적을 받았고, 히치콕 감독 자신도 지나치게 엄숙했던 걸 실패의 원인으로 꼽기도 했다. 비평 면에서라면, 뉴욕 타임스에서 “히치콕 영화에 기대하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라고 했고, 버라이어티지에서는 “서스펜스가 부족한” 영화라고 했던 게 대표적 비판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스스로 이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직설적이고 무겁게 찍은 자신의 연출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데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와의 작업을 상당히 불편하게 느꼈다는 점에서였다. 배우의 연기를 자신의 그림에 맞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감독이 이런저런 연출 면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인한 셈이다.
영화 밖의 얘기를 듣게 되면 영화에 집중하는 데에 도움이 안 될 때가 많지만 <나는 고백한다>의 경우는 그 반대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름이 아니라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연기에 관한 것이다. 작품적 면에서도 연출적 면에서도 개봉 당시 이 영화의 평가는 좋지 않았지만, 연기적 면에서는 수준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걸로 알려져 있다.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연기에 대해서는 당시로선 호불호가 갈리는 면은 있어도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았다. 의견이 갈렸던 이유는 절제된 연기 방식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지나친 절제로 보여서 단조롭다거나 할 일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식의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적 연기에 대한 주관적 견해였을 뿐 시간이 갈수록 그의 표현 방식이 인정을 받았고 다른 세세한 면으로 봐도 그의 연기는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일주일 동안 수도원에서 살면서 신부의 걷는 방식까지 배웠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가 진짜 신부같이 보였던 건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었다. 어쨌든 남겨진 뒷이야기를 보더라도 히치콕의 연출 방식은 실패했지만 클리프트의 연기 방식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선천적 외모에 감정적 연기까지 어울리게 더해지니 영낙없이 마이클 로건 신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고백한다”는 내용으로 봐서 마이클 로건 신부의 대사가 아니다. 그 고백을 빌미로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켈러의 대사였다. 그렇게 보자면, 영화의 제목을 걸어두고 주인공이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영화의 내용이 되었다. <나는 고백한다>의 중심은 로건 신부의 양심에 있었다. 자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도 사랑했던 여인의 위신과 곁에 있었던 신도의 믿음을 내팽개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백에 대한 응답은 믿음이었다고 보고 싶다. 신부로서의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일 수 있지만 인간의 양심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다. 그것 또한 자신의 양심을 지키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신도의 양심을 믿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의 결과를 봐도 그런 흐름이 느껴진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양심이 신부의 양심과 통함으로써 사악(邪惡)으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고백한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애초에는 더한 시련을 겪는 신부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신부의 죽음 뒤에 진실이 드러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서사로 갔더라면 어떤 모습의 영화가 되었을지도 궁금하다.
마음에 담았던 고전 영화에서 한 신부의 양심을 다시 보고 있으니 그의 양심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가 새롭게 보였다. 그는 열혈 투사도 아니었고, 대단한 웅변가도 아니었고, 주도면밀한 지략가로 아니었다. 그는 손짓발짓조차 하지 않은 채 멀뚱멀뚱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며 침묵했다. 그런 표현 방법 때문에 서사의 개연성 면으로 배우의 연기 면으로 지적을 받기도 했다지만 내 마음에는 별다른 문제없이 양심적 성직자 마이클 로건으로 새겨졌다. 마이클 로건으로 빙의한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멀뚱한 표정이 <나는 고백한다>에서의 고해성사에 대한 응답이자 양심을 흔들어 깨우는 강력한 울림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