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시계 2 : 트로피컬 다이얼
빈티지 가격 산정의 기본 규칙은 상태가 좋을수록 비싸진다는 것이다. 가장 비싼 것은 당연히 미판매 빈티지(NOS : New Old Stock)이다. 폴 뉴먼 다이얼 데이토나라도 제조 후 판매된 적이 없이 재고로 남아 있었거나 구입했더라도 어떤 이유로 몇 번 사용하지 않아 새것과 같은 시계이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지? 그렇다. 트로피컬 다이얼과 스파이더 다이얼이 그런 경우이다. 트로피컬(tropical) 다이얼은 그 의미처럼 열대 과일처럼 잘 익은 다이얼이다. 하얀색 다이얼에 생기기도 하지만 주로 코팅이 잘못된 검은색 다이얼이 장기간 햇빛에 노출되어 발생한다. 다이얼 색채가 곱게 잘 익었다면 새것보다 더 비싸진다. 스파이더(spider) 다이얼은 보기 싫은(?) 거미줄 같은 크랙이 간 다이얼이다. 역시 제조 시 불량으로 생긴 것이다.
롤렉스처럼 신뢰성이 높은 회사의 경우 이런 하자가 잘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레어 아이템이 된다. 새로운 재료가 등장하여 이를 처음 사용하다 보니 생긴 일이고, 문제가 확인되는 즉시 회사에서는 이를 불량으로 생각하여 개선해 버리기 때문에 주로 초창기 제품에서 이런 하자가 생긴다. 제품 출하 시 제조회사에서 인지하지 못해 하자가 생기고 이를 즉시 개선하거나 소비자가 항의하면 새것으로 교체해주었기 때문에 희귀해진 빈티지들이다. 다이얼이나 베젤의 숫자까지 희미해지면 '고스트 폰트(ghost font)'가 되어 더 비싸진다. 고가 빈티지의 첫 번째 대규칙은 '수량이 적어야 한다'이다.
같은 연식의 같은 제품이라도 트로피컬 다이얼이나 스파이더 다이얼은 2-3배 비싸진다. 그런데 이런 시계를 롤렉스 본사로 보내 수리를 받으며 특별한 주의를 주지 않으면 새로운 다이얼로 교체되는 비극이 발생한다. 빈티지에 무지한 손자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잘 익은(?) 롤렉스 익스플로러나 섭마리너를 시계 수리점에서 새삥으로 보이도록 다이얼에 블랙 페인트를 새로 칠해달라고 부탁하는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겠다. 아니면 수리 기술자의 예상치 못한 서비스(?)가 비극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트로피컬 다이얼이나 스파이더 다이얼 혹은 고스트 폰트는 빈티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매력이다.
최고가의 빈티지라도 망가졌거나 여러 번 수리를 받아 부품이 사제로 변경된 것들은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다. 하물며 짝퉁 빈티지도 있다. 롤렉스 데이토나 진품은 맞는 데 다이얼을 폴 뉴먼 다이얼로 교체한 데이토나 같은 것이다. 고가의 빈티지 시계 구입이 고가의 부동산 구입만큼 결정이 어려워지는 이유이다. 지식, 정보, 경험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투자가 가능하다. 주식이나 부동산도 그런대요? 네? 그렇다면 비슷한 투자가 되겠다.
고가 빈티지의 또 다른 규칙은 유명한 시계가 좋은 빈티지라는 것이다. 파네라이가 무명이다가 리치몬트에 인수되면서 유명해지자 빈티지 가격이 폭등한 것과 같다. 주식의 종목 발굴보다 조금 어려운 것이 무명인 시계 중에서 미래의 블루칩을 발견하는 일이다.
블랑팡의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1950년대 블랑팡의 피프티 페이톰스가 그런 시계이다. 1950년대에 이런 프로페셔널 시계들은 소비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래서 개발한 회사에도 재정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대량 생산되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그 덕분에 수집할 가치를 가진 소량만 생산된 시계가 되었다.
그 후 블랑팡은 비버에게 팔려 슬림한 시계와 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브랜드로 재등장했다. 2000년대에 프로페셔널 시계 특히 다이버 시계가 빈티지의 인기 아이템이 된다. 블랑팡에서 제조할 당시 90 달러에도 안 팔렸던 '피프티 페이톰스'는 빈티지 컬렉터들 사이에 파네라이, 롤렉스 섭마리너 같은 인기 시계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자 슬림한 시계와 컴플리케이션을 만들던 블랑팡에서 이 시계를 재출시하여 현재 블랑팡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계이다. 파네라이와 반대로 컬렉터 사이의 인기가 현행 제품 발매로 이어진 경우이다. 물론 현재의 높은 가격은 그 후 블랑팡이 유명한 하이엔드 브랜드로 성장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현재 유명한 브랜드가 빈티지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시계인 것이다.
사실 이런 시계는 무궁무진하다. IWC의 오리지널 포르투기저도 당시에는 사이즈가 너무 커서 수십 년간 천 개도 팔지 못했던 시계였다. 군용 시계의 대표 시계 중 하나인 IWC의 Mark 11도 영국 공군에 납품되며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판매되었으나 인기가 없어서 많이 팔리지 않았다. 덕분에 현대의 빈티지 시장에서는 엄청난 고가로 팔리는 시계이다. 타임머신만 잠시 얻어 탈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주식 시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