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링고 Oct 22. 2022

콩코드의 데릴리움

그린버그의 마케팅

진 라슬의 등장을 보며 일본의 세이코와 시티즌 사이에 정확한 쿼츠와 디지털 시계를 넘어 쿼츠 시계를 얇게 만드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세이코가 진 라슬의 전부로 여겨졌던 특허며 제조권을 모두 포기하고 브랜드를 구입했던 이유일 것이다. 슬림한 시계는 세이코가 기계식 시계를 만들던 시절에 결코 스위스를 이겨보지 못한 유일한 분야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만년 이인자에 머물렀던 시티즌이 쿼츠로 진 라슬을 넘어서는 얇은 시계를 개발하여 1978년에 무브먼트 0.98 밀리에 시계 두께 4.1 밀리의 'Exceed'라는 가장 얇은 쿼츠 시계를 발표했다. 시티즌한테 뒤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던 세이코는 1978년 시티즌의 발표에 뒤이어 즉각 총 두께 2.5 밀리의 쿼츠 시계를 발표한다. 그러자 티파니는 1978년 11월 뉴욕타임스에 새로운 기록을 세운 이 시계를 7명에게 판매한다는 광고를 내게 된다.



그린버그는 피아제와 콩코드를 비롯하여 스위스 시계의 우월성을 믿어 의심치 않던 사업가였다. 그는 일본의 적극적인 쿼츠 개발을 지켜보면서 기계식 시계와 쿼츠 시계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는 스위스 브랜드들의 대응에 답답함을 느끼며 스위스의 무브먼트 개발회사인 ETA를 방문한다. 그린버그는 이 상태로는 일본에게 미국 시장을 완전히 빼앗기게 될 거라며 각성을 촉구하며 일본과 쿼츠 기술로 정면 승부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세이코보다 얇은 시계를 만들어준다면 그 시계를 미국 시장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대가로 20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로써 1976년 쿼츠로는 도달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진 라슬의 1.2 밀리의 무브먼트에서 시작된 얇은 시계에 대한 도전이 세계에서 가장 얇은 쿼츠 시계를 만드는 쿼츠 개발 전쟁으로 변경되어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1979년 10월 ETA에서 시계 케이스에 무브먼트를 조립하는 대신 시계 다이얼의 뒷면을 무브먼트 기판으로 사용하여 세이코보다 얇은 시계가 만들어졌다. 그린버그가 ETA가 체결한 계약에 따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콩코드에서 데릴리움(Derilium)이라는 이름으로 독점적으로 발매된 이 시계는 무브먼트가 아닌 시계의 전체 두께가 1.98밀리였다. 그리고 데릴리움 2, 3, 4로 차례로 발표된 데릴리움의 마지막 버전인 데릴리움 4의 두께는 0.98밀리에 불과했다. 손목에 차고 힘이라도 과하게 주면 망가지는 수준의 얇기였다. 세이코와 시티즌도 이쯤에서 경쟁을 접게 된다. 이로써 쿼츠 기술에서는 일본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였던 스위스의 쿼츠 시계는 적어도 얇은 시계 제조에서는 일본을 앞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린버그와 계약대로 이 시계는 미국 시장에서는 콩코드의 데릴리움으로 발표되었지만, 유럽 등 다른 시장에서는 론진, 에터나 등의 쿼츠 시계로 발매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다른 시장에서는 엄청난 가격 때문에 이 시계들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이 시계는 '콩코드의 데릴리움'으로 기억되고 있다.


데릴리움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만든 그린버그는 새롭게 등장한 쿼츠 기술이 미래의 대세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Concord Quartz'라는 마케팅을 통해 최고급 쿼츠 시계를 제조하는 '쿼츠 시계의 피아제'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데릴리움의 출시와 함께 이전의 다른 브랜드들의 선전과는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도입한다.


시계 판매를 위해 지미 코너스, 비외른 보리, 조 몬태나 등 유명 운동선수들과 계약을 맺고 신문과 잡지는 물론 텔레비전 광고까지 엄청난 마케팅비를 투자했다. 데릴리움 시리즈를 차례로 발표한 1982년대에는 1년 광고비로만 1,400만 달러라는 금액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마케팅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 단기간에 카르띠에와 티파니의 이름 뒤에 숨어 있던 '콩코드'를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만드는 최고급 브랜드로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석으로 장식된 콩코드 데릴리움의 최고급 모델은 6만 달러였다. 가장 저렴한 데릴리움 스틸 모델이 당시 롤렉스 데이트 저스트와 같은 400 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케팅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최고급 시계의 판매만으로 충분한 이익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그린버그는 판매량을 늘릴 방법을 고심하게 되었다. 한편, 1972년 쿼츠 개발 경쟁에서 뒤처져 있던 '제니스-모바도-몬디아 그룹'이 도산하면서 미국의 라디오와 테레비전 제조 업체인 '제니스 라디오'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쿼츠 시계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제니스-모바도-몬디아에게 기계식 시계 제조는 집어치우고 쿼츠 시계를 만들라며 닦달하다 포기한 제니스 라디오가 제니스-모바도-몬디아를 1978년에 매각하게 된다. 이때 제니스가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던 스위스의 시계 공구 전문 업체인 딕시(Dixi)가 컨서시움을 구성하여 인수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모바도에 관심이 있었던 그린버그는 1980년부터 딕시와 협상을 시작하여 1983년 자신의 꿈을 실현해줄 새로운 브랜드로 모바도를 분리하여 인수하게 된다. 그리고 최상급 시계인 콩코드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모바도를 통해 중고급 시계 시장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또한 미국에 진출한 오랜 역사를 통해 미국 전역에 갖추어진 모바도의 판매망을 이용하여 뉴욕 중심의 사업에서 미국 전체로 판매망을 확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린버그는 1970년대 피아제, 코룸과 콩코드라는 하이엔드 시장에서 시작하여, 1983년 모바도를 통해 중고급 시장에 진입하고, 이어 1995년에는 ESQ라는 염가의 시계 브랜드를 출시하는 과정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모바도의 인수는 단순히 중고급시장 진입과 판매망 확중을 넘어 그린버그를 소규모 시계 업체 사장에서 세계적인 시계그룹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콩코드의 역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난 진주같은 아이콘이 모바도에 숨어 있었고 이를 찾아내 성공시킨 것이 그린버그인 것이다. 그린버그는 경쟁자들에게는 없는 아이템을 발굴하는 능력과 자신의 믿음을 마케팅을 통해 성공시킬 배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린버그가 인수한 모바도에는 1960년에 처음 출시되었지만 그가 인수할 때까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던 '뮤지엄'이라는 시계가 있었다. 그린버그는 호윗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지만 뮤지엄 디자인에 엄청난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1983년 모바도 인수에 성공한 후 '뮤지엄 시계'를 모바도의 대표 시계로 재발매하며 특유의 물량공세식 마케팅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그린버그의 이 도전은 데릴리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피아제와 콩코드로 시작되었지만 1996년 그룹의 이름으로 채택된 '모바도 그룹'이며 지금은 그의 아들이 사장이 되어 운영 중이다. 


모바도 그룹은 1970년 콩코드, 1983년 모바도, 1995년 에스콰이어(ESQ)로 하이엔드로부터 미들섹션으로 이어 로우 섹션 시계로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스토리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모바도의 뮤지엄 시계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디자인 초기부터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던 호윗은 시계 다이얼에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는 방식으로 뮤지엄의 디자인에 도달했다고 한다. 뮤지엄의 다이얼은 12시에 둥근 점 하나 남긴 것이 전부인 것이다. 억지스럽게 이마저 뺀 시계들이 출시되기도 했지만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일들로 인해 모바도 뮤지엄의 다이얼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다이얼 디자인의 최소치로 남게 되었다. 


이 시계는 시계 브랜드의 의뢰를 받아 손목시계의 디자인으로 개발된 다이얼이 아니다. 도리어 이를 처음 디자인하여 수많은 시계회사들에게 상품화를 의뢰했던 나단 조지 호윗(Nathan George Horwitt, 1898-1990)은 실패만 맛보며 자신의 자금으로 3개의 샘플을 만들게 된다. 결국 호윗이 디자인한 지 13년 후에야 모바도가 상품화 제의를 받아들여 판매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나단 조지 호윗은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뉴욕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의 'Art Student League'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프리랜서 산업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베타 의자(Betha Chair)', '테두리 없는 유리 액자' 등을 디자인했고 테두리 없는 유리 액자가 200만 개나 팔리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그의 이름은 모바도 뮤지엄 시계의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있다.


호윗은 자신의 다이얼 디자인이 슬림하고 단순한 원형 테두리를 가진 플랫한 시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슬림한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그런 시계를 가장 잘 만드는 곳이 바쉐론 콘스탄틴이었다. 1947년 바쉐론 콘스탄틴을 방문했다가 상품화 제의가 거절을 당한 후 그는 시중에 판매되는 시계 중 얇고 단순한 디자인을 가진 론진 시계를 구입하여 자신이 디자인한 다이얼로 교체한 샘플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악한 마감탓에 자신의 획기적인 디자인을 납득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희망하던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주문 제작한 3개의 고급한 샘플들을 제시하며 1958년에서 1960년 사이 스위스와 미국의 여러 회사들과 다시 제품화 협상하게 된다. 그러나, 디자인이 너무 과감하고 미래적이라는 이유로 모두 거부되었다. 결국 13년간의 힘든 과정을 거쳐 1960년에서야 미국의 모바도에서 출


그 후 그는 자신이 주문제작한 1번 시계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여 1960년부터 전시되고 있다. 이 디자인으로 고가의 시계를 만들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모바도는 당시 미국의 완성품 수입 시계에 대한 높은 관세장벽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 본사에서 무브먼트만 들여와 미국 내에서 다이얼과 케이스를 만들어 판매하였다. 호윗이 평평한 디자인을 선호했기 때문에 전량 수동 무브먼트로만 제조되었다. 시계 판매가 부진하자 호윗이 모바도가 선전 비용을 너무 아낀다며 불만을 털어놓자 1962년 호윗의 시계가 뉴욕현대미술관에 진열되어 있다는 이유로 '뮤지엄'이라는 이름을 붙여 잡지를 통해 선전하게 된다.


이때 마케팅을 위해 선정된 이름이 '뮤지엄 와치'였고 이 시계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그린버그가 이 시계의 성공을 확신하기 전까지 미국 시장에서 모바도의 손목시계 모델의 하나로 지속적으로 판매되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린버그는 1983년 모바도를 인수하고 대표 모델로 뮤지엄 시계를 선택한 후, 천문학적인 금액을 광고에 투자하여 뮤지엄 다이얼을 모바도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나갔다. 1987년에는 '모바도 뮤지엄 디자인 국제 회사'를 설립하여 벽시계, 탁상용 시계, 문구, 악세서리, 가방, 쥬얼리와 피혁 제품까지 만들어 모바도 상점은 물론 백화점에도 납품했다. 1988년에는 뉴욕에 모바도의 전제품을 판매하는 전용 상점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모바도를 계기로 'Wings'라는 고급 피혁 제품을 생산하던 회사까지 인수하여 시계에서 패션 제품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판매 제품의 다변화도 시도하게 된다.


1990년대는 미국을 벗어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도 진출하며, 1995년에는 제품의 가격대를 낮추기 위해 'Esquire'라는 염가 브랜드를 출시했고 이후 'ESQ'로 간략화 하게 된다. 1993년에는 투자를 늘리기 위해 주식을 공개하게 되며, 1996년에는 그룹의 이름을 '북미시계회사'에서 '모바도 그룹'로 변경하며 계속해서 성장중이다.


현재까지도 모바도 그룹의 시계들은 대부분 쿼츠 시계이다. 스위스 브랜드들이 기계식 시계와 쿼츠 시계의 선택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하며 일본의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에게 미국 시장을 빼았기던 시절 그린버그는 스스로 데릴리움을 기획하여 스위스제 쿼츠 시계를 일본 시계들과 차별화시켜 최고급 시계로 만들었다. 이어 숨어 있던 보석이었던 '호윗의 뮤지엄 디자인'을 회사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성장시켜 쥬얼리와 패션 제품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미국시장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린버그가 파산한 스위스 브랜드인 콩코드와 모바도를 통해 성장을 거듭하는 사이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들은 대부분 파산하여 스와치 그룹으로 통합되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기회를 만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린버그가 성공하는 동안 경쟁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쿼츠 혁명이 진행되면서 그 혁명의 주역들이었던 스위스, 미국과 일본의 대기업들이 모두 스와치 방식의 가장 저렴한 시계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버그는 경쟁자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염가의 제품만이 살 길이라고 느낄 때 고가의 제품을 팔았고, 그들이 고가의 제품에 집중하자 저렴한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전글 진 라슬과 가장 얇은 시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