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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모바도와 뮤지엄

그린버그가 인수한 모바도에는 1960년에 처음 출시되었지만 그가 인수할 때까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던 '뮤지엄'이라는 시계가 있었다. 그린버그는 호윗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지만 뮤지엄 디자인에 엄청난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1983년 모바도 인수에 성공한 후 '뮤지엄 시계'를 모바도의 대표 시계로 재발매하며 특유의 물량공세식 마케팅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그린버그의 이 도전은 데릴리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피아제와 콩코드로 시작되었지만 1996년 그룹의 이름으로 채택된 '모바도 그룹'이며 지금은 그의 아들이 사장이 되어 운영 중이다. 


모바도 그룹은 1970년 콩코드, 1983년 모바도, 1995년 에스콰이어(ESQ)로 하이엔드로부터 미들섹션으로 이어 로우 섹션 시계로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스토리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모바도의 뮤지엄 시계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디자인 초기부터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던 호윗은 시계 다이얼에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는 방식으로 뮤지엄의 디자인에 도달했다고 한다. 뮤지엄의 다이얼은 12시에 둥근 점 하나 남긴 것이 전부인 것이다. 억지스럽게 이마저 뺀 시계들이 출시되기도 했지만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일들로 인해 모바도 뮤지엄의 다이얼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다이얼 디자인의 최소치로 남게 되었다. 


이 시계는 시계 브랜드의 의뢰를 받아 손목시계의 디자인으로 개발된 다이얼이 아니다. 도리어 이를 처음 디자인하여 수많은 시계회사들에게 상품화를 의뢰했던 나단 조지 호윗(Nathan George Horwitt, 1898-1990)은 실패만 맛보며 자신의 자금으로 3개의 샘플을 만들게 된다. 결국 호윗이 디자인한 지 13년 후에야 모바도가 상품화 제의를 받아들여 판매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나단 조지 호윗은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뉴욕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의 'Art Student League'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프리랜서 산업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베타 의자(Betha Chair)', '테두리 없는 유리 액자' 등을 디자인했고 테두리 없는 유리 액자가 200만 개나 팔리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그의 이름은 모바도 뮤지엄 시계의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있다.



호윗은 디자이너를 꿈꾸었지만 제약회사의 광고 카피라이터로 1920년대를 보낸 후 1930년 'Design Engeers Inc.'라는 회사를 차려 혼자서 탁상시계, 라디오, 램프, 냉장고 등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매샤츄세츠 레녹스에서 400 에이커의 농장을 구입하여 마지막 40년간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뮤지엄 시계를 디자인하기 전인 1939년에 다이얼의 중앙에 시간을 표시하고 외각을 회전하는 원형 구멍에 분이 표시되는 싸이클록스(Cyclox)라는 탁상용 시계를 디자인했었다. 1947년 뮤지엄 다이얼의 디자인을 완성한 후 호윗은 제네바를 방문하여 바쉐론 콘스탄틴에 자신이 디자인한 시계를 제조 판매할 것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다. 제품화가 지연되자 1956년에는 미국 특허청에 의장등록을 신청했으나 디자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며 거절당했다가 2년 후에 간신히 등록을 마친다.


1958년 당시 미국의 바쉐론 콘스탄틴과 르 쿨트르의 연합법인이었던 '바쉐론 콘스탄틴-르 쿨트르'에 의뢰하여 화이트골드 금시계로 3개의 프로토타입을 제조하게 된다. 다이얼은 블랙 에나멜 다이얼에 12시에 금색 혹은 은색의 점 하나를 표시하고, 시계바늘도 은색이었다. 


호윗은 자신의 다이얼 디자인이 슬림하고 단순한 원형 테두리를 가진 플랫한 시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슬림한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그런 시계를 가장 잘 만드는 곳이 바쉐론 콘스탄틴이었다. 1947년 바쉐론 콘스탄틴을 방문했다가 상품화 제의가 거절을 당한 후 그는 시중에 판매되는 시계 중 얇고 단순한 디자인을 가진 론진 시계를 구입하여 자신이 디자인한 다이얼로 교체한 샘플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악한 마감탓에 자신의 획기적인 디자인을 납득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희망하던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주문 제작한 3개의 고급한 샘플들을 제시하며 1958년에서 1960년 사이 스위스와 미국의 여러 회사들과 다시 제품화 협상하게 된다. 그러나, 디자인이 너무 과감하고 미래적이라는 이유로 모두 거부되었다. 결국 13년간의 힘든 과정을 거쳐 1960년에서야 미국의 모바도에서 출시하기로 하여 오랜 기다림 끝에 제품화에는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주문제작한 1번 시계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여 1960년부터 전시되고 있다. 2번 시계는 나중에 브루클린 미술관에 기증하여 1985년부터 전시되고 있다. 현재도 두 곳에 진열되어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손목시계 외에 같은 디자인의 벽시계도 전시되어 있으며, 벽시계는 미국의 하워드 밀러 클럭 회사(Howard Miller Clock Co.)에서 제조된 것이며 그린버그가 인수하기 전 모바도에서 출시한 손목시계 외에는 하워드에서 만든 벽시계와 탁상용 시계가 미술관에서 기념품으로 판매되었을 뿐이다.


이 디자인으로 고가의 시계를 만들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모바도는 당시 미국의 완성품 수입 시계에 대한 높은 관세장벽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 본사에서 무브먼트만 들여와 미국 내에서 다이얼과 케이스를 만들어 소량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호윗이 평평한 디자인을 선호했기 때문에 전량 수동 무브먼트로만 제조되었다. 시계 판매가 부진하자 호윗이 모바도가 선전 비용을 너무 아낀다며 불만을 털어놓자 1962년 호윗의 시계가 뉴욕현대미술관에 진열되어 있다는 이유로 '뮤지엄'이라는 이름을 붙여 잡지를 통해 선전하게 된다.


이때 마케팅을 위해 선정된 이름이 '뮤지엄 와치'였고 이 시계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그린버그가 이 시계의 성공을 확신하기 전까지 미국 시장에서 모바도의 손목시계 모델의 하나로 지속적으로 판매되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린버그는 1983년 모바도를 인수하고 대표 모델로 뮤지엄 시계를 선택한 후, 천문학적인 금액을 광고에 투자하여 뮤지엄 다이얼을 모바도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나갔다. 1987년에는 '모바도 뮤지엄 디자인 국제 회사'를 설립하여 벽시계, 탁상용 시계, 문구, 악세서리, 가방, 쥬얼리와 피혁 제품까지 만들어 모바도 상점은 물론 백화점에도 납품했다. 1988년에는 뉴욕에 모바도의 전제품을 판매하는 전용 상점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모바도를 계기로 'Wings'라는 고급 피혁 제품을 생산하던 회사까지 인수하여 시계에서 패션 제품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판매 제품의 다변화도 시도하게 된다.


1990년대는 미국을 벗어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도 진출하며, 1995년에는 제품의 가격대를 낮추기 위해 'Esquire'라는 염가 브랜드를 출시했고 이후 'ESQ'로 간략화 하게 된다. 1993년에는 투자를 늘리기 위해 주식을 공개하게 되며, 1996년에는 그룹의 이름을 '북미시계회사'에서 '모바도 그룹'로 변경하며 계속해서 성장중이다.


현재까지도 모바도 그룹의 시계들은 대부분 쿼츠 시계이다. 스위스 브랜드들이 기계식 시계와 쿼츠 시계의 선택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하며 일본의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에게 미국 시장을 빼았기던 시절 그린버그는 스스로 데릴리움을 기획하여 스위스제 쿼츠 시계를 일본 시계들과 차별화시켜 최고급 시계로 만들었다. 이어 숨어 있던 보석이었던 '호윗의 뮤지엄 디자인'을 회사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성장시켜 쥬얼리와 패션 제품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미국시장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린버그가 파산한 스위스 브랜드인 콩코드와 모바도를 통해 성장을 거듭하는 사이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들은 대부분 파산하여 스와치 그룹으로 통합되었다. 1978년 그린버그가 ETA에 제안했던 '세계에서 가장 얇은 쿼츠 시계' 기술로 그린버그는 최고가의 시계인 데릴리움을 만들었지만, ETA는 1983년 그때 개발한 기술로 일본과 홍콩에서 제조되는 플라스틱제품들과 경쟁하기 위해 가장 저렴한 스와치(Swatch)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린버그에게 천문학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뮤지엄의 제품화를 거절했던 바쉐론 콘스탄틴은 1987년 쿼츠 시대가 끝나갈 무렵 파산하여 중동의 투자그룹에게 넘어갔다가 1996년 리치몬트에 인수되게 된다. 1988년에는 그린버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후 북미지역 독점판매권을 얻어 이후 콩코드를 인수할 자금을 마련해 주었던 피아제도 리치몬트에 인수되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기회를 만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린버그가 성공하는 동안 경쟁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쿼츠 혁명이 진행되면서 그 혁명의 주역들이었던 스위스, 미국과 일본의 대기업들이 모두 스와치 방식의 가장 저렴한 시계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버그는 경쟁자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염가의 제품만이 살 길이라고 느낄 때 고가의 제품을 팔았고, 그들이 고가의 제품에 집중하자 저렴한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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