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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블로바

19살의 이민자

1869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18살의 조셉 블로바(1851-1935)가 50센트만 가지고 뉴욕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가 잡화점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났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보석공방에서 조수로 일하며 일을 배웠다. 뉴욕에 도착한 후 공원 벤치에서 자며 힘들게 지내던 조셉은 시민혁명 후 곤궁했던 미국을 떠나 프라하로 돌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 후 티파니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티파니가 스위스 제네바에 작은 시계 공방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시계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1861년이고, 당시 가장 발전된 미국의 제조설비를 도입하여 스위스 생산시설을 늘리던 시기가 1874년이었다. 조셉은 이 시기에 티파니에서 보석 세공사로 일했던 것이다.


1875년 티파니를 그만둔 조셉은 미국에 먼저 와 있던 친구로부터 500 달러를 빌려서 맨해튼에 보석 판매와 수리를 하는 상점을 오픈한다. 미국에 온 지 10년째가 되던 1879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1883년에는 결혼도 하여 1남 5녀를 키우게 된다. 귀금속을 제조 판매하던 조셉은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자 티파니에서 보았던 시계 제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11년 조셉은 J. Bulova & Compnay를 설립하여 보석 제조업에서 시계 제조업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어 조셉은 티파니가 그랬듯이 1912년 스위스 비엔에 무브먼트 제조공장을 설립하여 스위스에서 제조한 무브먼트를 미국에 공급하고,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제조한 케이스에 조립하여 다양한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이어 1923년에는 회사의 이름을 'Bulova Watch Company'로 바꾸게 된다.



시계회사 블로바


이 시기에 조셉의 아들 아르데 블로바(1887-1958)가 부사장으로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조셉이 블로바의 기틀을 만들었다면 블로바를 미국 최대의 시계 회사로 키운 인물이 아들인 아르데였다. 1926년 블로바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현재 몇 시입니다. 블로바'라는 방송 중 시보를 알리는 라디오 광고를 시작했다. 1926년 1차 대전 후 급격히 발전한 비행기의 발전과정을 눈여겨보던 아르데는 뉴욕에서 파리까지 대서양을 논스톱 비행에 성공하는 사람에게 1,000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1927년 5월에 린드버그가 33시간의 비행으로 이에 성공하여 블로바에서 약속한 1,000 달러와 기념시계를 수여하자 감사편지를 써주게 된다.



무착륙 대서양 횡단에 대한 도전은 1919년 뉴욕의 호텔 주인이었던 레이몽 오티그가 상금으로 25,000 달러를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26년 아르데가 제시한 상금은 린드버그의 성공을 겨냥하여 제시된 적은 금액이었다. 1970년대 모바도의 그린버그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광고를 시작한 것과 달리 아르데는 최초의 라디오 시보광고 등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광고효과와 이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적은 금액으로 큰 효과를 거두는 광고 방식을 스스로 창안해 내었다는 점일 것이다. 잡지나 신문광고가 보편적이던 시절에 아르데는 라디어와 TV를 활용하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집중하는 이벤트에 참여하여 간접광고를 통해 언론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블로바는 린드버그로부터 받은 감사편지와 함께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기념하는 '론 이글'(Lone Eagle) 시계를 출시하게 된다. 기념시계로는 많은 물량인 5,000개나 제작된 시계로 케이스 백을 열면 강화유리를 통해 무브먼트를 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최초의 디스플레이 백 손목시계이기도 했다. 1927년에 발매된 5,000개의 시계는 3일 만에 매진되었고, 그 후 5만 개나 팔리면서 당시 소규모 시계회사이던 블로바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첫 발매 이후 여러 번 디자인을 바꾸어가며 1940년대까지 판매된 블로바의 첫 번째 베스트셀러였다.


린드버그 시계로 유명해진 1927년은 블로바에게는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블로바는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되었고, 블로바 캐나다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본사를 티파니의 아성인 뉴욕 5번가 38층 건물로 옮기고 건물의 꼭대기에 천문대를 만든다. 마천루의 옥상에 만들어진 첫 번째 천문대였다. 여기서 측정된 천문 시간은 전기적으로 기록되어 회사의 시계공들이 시간을 맞추는 신호로 사용되었다.



1928년에는 시계와 라디오를 결합한 세계 최초의 '라디오 시계'를 판매했으며, 1929년에는 자동차용 시계를 창안하고, 1931년에는 전기 클럭을 제조하여 상점, 윈도, 오피스 빌딩, 기차역과 공항에 사용할 전기식 벽시계와 스탠드 시계를 판매하게 된다. 그리고이 무렵부터 1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광고에 투자하게 된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블로바의 주력상품은 라디오 시계, 벽시계 등 전기 시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1932년에는 1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고 새로운 시계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소비자 참여형 광고도 시작한다. 1940년에는 인기가 높은 20개의 라디오쇼의 스폰서로 참여한다. 1941년 TV에 상업광고가 허용되자 양키즈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야구 경기중 공수교대 시간에 현재의 시각을 알려주는 광고를 통해 미국에서 최초로 TV 광고를 시작한 시계 회사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이후 '블로바 타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자 블로바는 각종 군용 시계, 항공기 장비, 휴즈 등을 만들어 미국 정부에 납품하며 실제 제조 가격에 납품하여 이익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이 무렵 아르데 누나의 아들인 해리 헨쉘(1919-2007)이 동부 아이비리그의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헨쉘은 유럽에서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의 참모로 근무하며 미국의 마지막 5성 장군인 브래들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35년에 창업자인 조셉 블로바가 죽고, 아르데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아르데였다. 2차 대전이 종료된 1945년 아르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조셉 블로바 시계 학교'를 설립하여 2차 대전에서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들에게 시계 기술을 가르치게 된다. 이 학교는 상이군인들이 불편 없이 출입할 수 있도록 자동문과 휠체어가 출입할 수 있는 넓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시계학교를 졸업하면 미국 보석 협회가 주선하는 1,500개의 일자리에 취업하도록 도왔다.



2차 대전의 전후로 미국 시계 시장이 크게 요동을 치게 된다. 19세기 전반까지 영국과 스위스에서 수입하는 시계에 의존하던 미국에서 1854년 매사추세츠의 월쌈에 설립된 월쌈(Amerca Watch Company)과 월쌈의 운영자와 기술자들이 1864년 시카고 일리노이 엘진에 설립된 엘진(National Watch Company)이 미국을 대표하는 시계 대기업들이었다. 그리고 1892년 펜실바니아에 고급 시계를 제조하는 해밀턴(Hamilton Watch Company)이 설립된다. 이들 외에도 백화점에 납품하는 일리노이, 햄프든, 뉴헤이븐, 사우스 벤드, 워터베리 같은 중소형 시계회사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은 스위스보다 많은 시계를 생산하는 나라였다.


경쟁자들이 증가하고,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 대공황까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불황이 연 백만 개 이상의 제조시설을 가지고 있던 월쌈과 일리노이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런 사정으로 19세기 말에 창업한 블로바, 그루엔, 벤루스 등은 미국에서 무브먼트를 제조하는 대신에 스위스에서 무브먼트를 수입하여 미국 내에서 만들어진 케이스와 다이얼을 사용하여 시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계를 만들었다.


세계 2차 대전이 진행된 1940년대는 스위스에서는 손목시계용 자동 무브먼트가 개발되던 시기였다. 2차 대전중 시계 제조를 중단하고 군사장비 제조에 동원된 미국 시계 회사들은 2차 대전 후 손목시계가 보편화되고 자동 무브먼트가 개발되던 시기라 변화된 시장에 적응하기 어려워졌다.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 월쌈이나 엘진 등 미국 회사들에게는 아직 회중시계 제조가 중심이었고 손목시계는 수동으로만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 수동 무브먼트 생산을 위해 생산시설도 보수해야 할 시기에 자동 무브먼트까지 새로 개발하는 것은 무리였다. 블로바, 그루엔, 벤루스 등은 스위스에서 무브먼트를 수입하여 시계를 제조했으므로 전시 동안 전쟁물자 개발에 동원되었지만 전쟁이 끝나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해밀턴과 엘진도 스위스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무브먼트를 수입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월쌈은 그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으므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 무렵 해밀턴과 엘진은 2차 대전중 발전한 전기기술을 이용하여 전기시계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2차 대전으로 피해가 적었던 달러가 강세였으므로 강한 달러를 이용하여 스위스의 회사들을 인수하거나(해밀턴의 뷰렌 인수), 스위스 무브먼트를 수입하여(엘진의 ETA 무브먼트 수입) 스위스에서 개발된 자동 무브먼트를 이용하며 시계를 만들면서 전기 시계의 개발로 전쟁 기간 동안 뒤떨어진 스위스 기술을 따라잡는 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전기시계였던 것이다.


한편, 20세기 초 '달러 시계'로 유명했던 인거솔(Ingersoll)을 만들었던 워터베리(Waterbury Clock Company)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다. 2차 대전 중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했던 노르웨이의 선박재벌 토마스 올슨과 그의 친구인 조아킴 레뮤클이 이를 인수하여 타이멕스(Timex : 타임즈와 크리넥스의 합성어)를 창업하게 된다. 이후 타이맥스는 2차 대전 동안 미군의 군수물자 생산에 집중하여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역할을 한 이후 전쟁이 끝나자 인거솔이 1달러라는 가격으로 대량 판매했던 방식으로 수리가 불가능한 일회용 시계를 만들어 팔게 된다. 이어 쿼츠 혁명이 진행되자 일본의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대중적인 시계를 만들어 팔면서 2차 대전 후 미국의 염가 시계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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