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시계 제작의 원조 조지 대니얼스
조지 대니얼스(1926-2011)는 영국 출신으로 2차 대전 중 참전하여 이스라엘에 주둔하던 중 취미로 시계를 수리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군을 제대한 후 영국에서 시계 수리업에 종사하게 된다. 조지 다니얼스는 2005년 자서전(All in Good Time : Reflections of a Watchmaker)을 발표했다.
'1960년대 나는 회중시계와 클럭들의 복원 전문가로 유명해졌다. 복잡한 시계를 복원한 후에는 나의 기술과 경험을 선전할 목적으로 사진을 찍어 공방에 이를 전시해두었다. 브레게 수리는 나의 특기였다. 1960년대 초에 파리의 브레게 사장인 조지 브라운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덕분에 유명한 브레게의 아카이브에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브레게에 대한 나의 지식을 크게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브레게의 아카이브는 브레게가 만든 모든 휴대용 시계들과 클럭들에 대한 제조일자와 판매일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었다. 이 정보는 나의 개인적인 브레게에 대한 기록들에 브레게의 제조 시스템에 대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조지 브라운은 나에게 '파리 브레게의 에이전시'의 타이틀을 주었다. 1792년부터 1920년까지 런던에 브레게의 에이전시가 있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이를 이어받을 적당한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사업적인 이유와 한편으로는 로맨틱한 느낌으로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나는 브레게에 대해 말할 때 어떤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손님들에게 소개되었다.
1967년 브라운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그때 기록해 온 데이터에 따라 제조한 클럭을 보여주었다. 그 무렵 나는 첫 번째 회중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는 나의 작업에 흥미를 나타내며 나에게 브레게 시계들을 만들 생각이 있는지 물어왔다. 나는 브레게에게 오랫동안 감탄해 왔고, 브레게의 시계들에 대해 조사하면서 내가 직접 시계를 만들어 보자는 영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파리의 브레게'가 되기보다는 '런던의 다니엘스'가 되겠다고 말하며 서로 껄껄 웃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무렵 나는 브레게에 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파리를 방문하여 브라운과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조지 대니얼스의 자서전 중에서)
대니얼스의 브레게에 대한 책 'The Art of Breguet'는 1975년에 발간되었다. 대니얼스는 1965년 그와 비슷한 취미를 가진 샘 클러톤과 '휴대용 시계들'(Watches)라는 책을 출판한 경험이 있었다. 책들을 출판하여 생긴 권위와 브레게 전문가라는 이미지 덕분에 첫 시계를 만들기 전인 1969년부터 소더비 경매의 컨설턴트가 되었고, 그 덕분에 브레게의 클럭이며 회중시계들에 대해 경매 전에 시계의 사진들을 편하게 찍을 수 있었고 브레게 전문가로 알려졌다. 브레게와의 이런 인연으로 인해 대니얼스가 제작한 회중시계들은 아브라함 브레게와 비슷한 디자인을 가지게 되었다.
대니얼스(1926-2011)는 1969년 시계 유리와 스프링 외에는 무브먼트부터 시계 케이스와 다이얼까지 모두 직접 만들어 첫 번째 시계를 친구인 샘 클러톤에게 판매하게 된다. 시계 컬렉터이기도 했던 샘 클러톤은 컬렉터들의 모임에서 이 시계를 보여주게 되고, 이를 보고 감탄한 컬렉터들이 그에게 시계를 주문하면서 그의 시계 제조가 계속되게 된다. 한 개의 시계를 만드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므로 일 년에 한 두 개 정도의 시계를 만들어 파는 것이 한계였다. 그가 평생 만든 시계는 총 27개(회중시계 23개)뿐이라고 한다.
직접 시계를 제조하면서 대니얼스는 1974년 미국의 기업가이자 시계 컬렉터인 세스 애트우드(Seth Atwood, 1917-2010)로부터 기존의 시계들의 성능을 넘어서는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애트우드는 1,500개 이상의 시계를 수집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컬렉터였다. 자신이 수집한 시계들을 전시하기 위해 1971년 미국 일리노이 록포드에 '타임 뮤지엄'이라는 시계 박물관을 열게 되었다. 그가 수집하여 전시했던 시계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파텍 필립의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 컴플리케이션이었다. 그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아브라함 브레게가 오를레앙 공작을 위해 만들었던 심퍼티크(Duc D'Orléans Sympathique) 클럭이었다. 이 쿨럭은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클럭 중 최고가인 68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
애트우드는 브레게의 심퍼티크 클럭의 수리를 브레게 전문가인 대니얼스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수리가 끝난 시계를 찾으러 1974년 대니얼스를 방문했던 애트우드는 대니얼스에게 기술적으로 혁명적인 시계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세계적인 컬렉터이자 박물관을 운영하는 고객의 중요한 주문이었으므로 대니얼스는 친구였던 시계 기술자 데릭 프랏 등과 상의해 가며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1976년 코엑시얼 이스케이프먼트(Co-axial escapement)라는 새로운 이스케이프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대니얼스가 만든 이 시계는 1976년 타임 뮤지엄에 '애트우드의 시계'로 전시되었고, 대니얼스는 1980년 이에 대한 특허권을 얻게 된다. 이후 자신의 시계를 만들면서 자신이 발명한 코엑시얼 기술을 실용화시키기 위해 파텍 필립 등을 찾아다니던 대니얼스의 노력은 오랫동안 실패하게 된다. 독학으로 시계를 만들었던 대니얼스의 기술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개발된 지 20년도 넘은 1999년에야 오메가에서 대니얼스의 기술을 구입하여 ETA 2892에 처음 사용하면서 오메가의 'co-axial' 기술로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애트우드가 설립했던 시계 박물관은 미국을 대표하는 시계 박물관이었으나 점차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며 1999년 문을 닫게 되었고, 그가 수집했던 중요한 시계들이 2012년 소더비 경매에 나오게 되었다.
아브라함 브레게의 클럭부터 회중시계까지 수리하며 시계 기술을 배우고, 무브먼트부터 시작하여 시계를 만들면서 시계에 대한 여러 권의 책을 발간하며, 그 후에 등장하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하고 여러 개의 시계를 판매했던 경력으로 1986년 AHCI가 출범할 때 초대를 받아 AHCI의 전시회에 참가하게 된다.
조지 대니얼스의 대표작은 1982년에 제작한 '스페이스 트레블러(Space Traveller)'이다. 1979년에 착상하여 3년에 걸쳐 만든 첫 번째 시계는 평생 가지고 있으려다가 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고객에게 판매했다. 판매 직후부터 후회하던 대니얼스는 1984년에 이를 더 개량하여 '스페이스 트레블러 2'를 만들게 된다. 한편, 1982년 대니얼스로부터 스페이스 트레블러 1을 구매했던 고객은 1988년 소더비 경매를 통해 15만 달러에 팔게 된다. 스페이스 트레블러 1은 대니얼스가 서거한 후 2019년 다시 소더비 경매에 나와 450만 달러에 경매되었다. AHCI 멤버가 만든 시계들 중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린 시계로 남아 있다.
이후 조지 대니얼스는 자신이 만든 가장 가치 있는 시계들인 스페이스 트레블러 2, 그랜드 컴플리케이션과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는 만든 후에도 판매하지 않고 자신이 사용하다가 영국의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다. 이런 사정을 전부 고려하면 조지 대니얼스는 애초 시계 판매자로는 부적격했던 사람으로 여겨진다. 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려 그 제품에 대한 애착 때문에 팔 수 없게 되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예술 '작품'인 것이다.
대니얼스는 1990년대 초 영국 맨체스터의 시계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다가 당시 그 학교의 학생이던 로저 스미스(1970~)와 만난다. 이때의 인연으로 몇 번 연락을 하다가 1994년 로저 스미스가 만든 2번째 회중시계를 보고 그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다. 70대에 접어들면서 더 이상 혼자서 시계를 만들 수 없게 된 대니얼스는 1998년 로저 스미스를 자신의 공방으로 불러 로저 스미스에게 자신의 시계 기술을 가르치며 함께 시계를 만들게 된다. 2011년 조지 대니얼스가 죽은 후 로저 스미스는 2012년 조지 대니얼스와 함께 설계했다는 기념시계(Daniels Anniversary)를 출시한다. 이후 로저 스미스는 대니얼스의 방식으로는 제조할 수 있는 수량에 한계를 느끼고 현대의 CAD/CAM 방식을 사용하여 자신이 개발한 시계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판매하며, 대니얼스 이름의 기념시계와 밀레니엄 시계를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로저 스미스는 AHCI 멤버는 아니지만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독립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르 쌍띠에의 장인 필립 듀포
대니얼스 보다 20살 어린 필립 듀포(1946-)는 스위스 컴플리케이션 기술의 중심지인 발레 드 쥬에서 태어나 르 쌍띠에(Le Sentier)의 시계학교를 졸업한 후 1967년 JLC의 독일 애프터서비스 센터에서 첫 직장을 구하게 된다. 율리스 나르당의 쉬나이더처럼 따뜻한 나라에서 살고 싶어진 듀포는 1970년 제너랄 와치로 옮겨 카리비안의 세인트크루이섬에서 근무했다. 발레 드 쥬 출신이었던 듀포는 에드먼드 캡트처럼 1974년 스위스로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고향인 르 쌍띠에의 제랄드 젠타의 공방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오데마 피게에서 일하게 된다.
필립 듀포는 시계학교를 졸업한 후 시계 관련 직업을 시작했지만 1978년 32살에 독립하여 시계 수리점을 설립한 후 경매 회사인 엔티쿼럼의 시계를 수리하면서 시계 기술에 눈을 뜨게 된다. 시계를 수리하면서 자신이 수리한 시계들 중 인상적인었던 시계를 카피하며 시계 기술을 배우게 된다. 수리 의뢰가 없는 여가시간에 20세기 초 발레 드 쥬에서 제작된 그랜드 소네리 회중시계(루이 엘리제 피게)의 영향을 받아 회중시계용 그랜드 소네리 무브먼트를 제작하여 자신의 마지막 직장이자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에 관심이 있던 오데마 피게를 찾아간다. 예상대로 오데마 피게로부터 5개의 주문을 받아 1982년 납품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몇 년간 공들여 만든 시계를 함부로 다루던 오데마 피게 직원의 부주의로 파손된 2개를 수리하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다시는 자신의 시계를 브랜드에 팔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시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그 이후 시계 제작보다는 시계 수리에 전념하게 되지만 시계 제작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1980년대 중반 CAD를 배워 회중시계 무브먼트를 손목시계 무브먼트로 설계하고 이를 전문 제조업체에 의뢰하여 제조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1980년대 중반은 컬렉터들의 시계 수집이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변하던 시기이다. 이후 2년 반 동안의 노력을 통해 1982년에 개발했던 회중시계용 무브먼트를 등 규격으로 축소하고 이를 무브먼트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CAM 업체를 통해 부품들을 생산한 후 이를 피니싱하고 조립하여 1991년 그랜드 소네리를 손목시계로 만들게 된다. 시계가 완성된 1991년 친구의 추천으로 제랄드 젠타, 다니엘 로스 등 소규모 하이엔드 제작자들의 판매를 돕던 싱가포르의 고급 시계 리테일러인 아우어 글래스(Hour Glass)를 찾아가게 된다.
아우어 글라스는 필립 듀포가 제작한 프로토타입을 본 후 한 개의 제작만 의뢰하게 된다. 미니츠 리퍼터는 당시에도 리테일가(소비자 가격)으로 최저 1억 원이 넘는 고가의 제품으로 다량으로 판매될 제품은 아니었다. 필립 듀포는 아우어 글라스로부터 일부 선금을 받아 제품화한 시계를 1992년 바젤 페어의 AHCI 부스에 전시하여 3개의 추가 주문을 받게 된다. 시계 제조를 시작한 후 10년이 넘어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시계를 팔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자극을 받아 1996년에는 1933년 알버트 피게(1914-2000)의 회중시계를 참조하여 손목시계에서는 처음으로 시계의 정확성을 높이는 기술인 듀얼리티(밸런스 2개 배치)를 만들게 된다.
필립 듀포는 그랜드 소네리보다는 단순한 구조였던 듀얼리티를 25개 판매할 의도로 제조를 시작했지만, 높은 가격으로 판매가 어려워지자 9개만 제조한 후 조금 더 저렴하게 판매할 수 있는 타임 온리의 수동 시계인 심플리시티를 착상하게 된다. 독립제작자들의 어려움이 느껴지는 문제이다. 무브먼트까지 모두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컴플리케이션을 만드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설계와 제조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어 높은 가격에 판매해야 하고 그 결과 판매는 부진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평생을 같은 시계만 여러 개 만들어서는 아무런 즐거움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예술과 제품 사이의 본질적인 갈등이다.
2000년 첫 제작한 심플리시티는 컴플리케이션을 포기하는 대신에 무브먼트의 피니싱을 극대화한 시계였다. 당시는 타임존 등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하우스 무브먼트에 이어 피니싱이 주요 주제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 듀포의 심플리시티는 2001년 바젤 페어는 물론 타임존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단기간에 화제가 되면서 주문이 몰려들게 된다. 그 후 필립 듀포는 몇 년은 대기해야 하는 심플리시티 제조에 집중하게 되며 심플리시티는 2012년까지 200개 정도 제조되었다. 그중 120개가 일본의 시계 리테일러인 쉘만을 통해 판매될 정도로 특히 일본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프랭크 뮬러와 폴 쥬른 등 AHCI 멤버들이 성공을 거두는 거점이 되어, 프랭크 뮬러 이후에 성공을 거두게 되는 프랑소아 폴 쥬른(1957~)의 첫 부띠끄가 도쿄에 설립되게 된다.
조지 대니얼스와 필립 듀포에서 보듯이 회중시계가 아닌 이상 수작업만으로 시계를 만드는 것은 아무리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어려운 일이다. 손목시계의 무브먼트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회중시계 무브먼트의 10배가 넘는 정밀도로 부품들이 제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CAD의 도움을 받아 부품들을 컴퓨터로 제어되는 가공장치들로 만들어도 필립 듀포처럼 혼자서 피니싱해서는 1년에 10개도 만들기 어려운 것이다. 시계 하나를 만드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AHCI
대니얼스처럼 시계의 모든 것을 작은 공방에서 하나하나 만드는 것이나, 필립 듀포처럼 CAM으로 제작된 무브먼트의 부품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피니싱하는 방식 외에 조금 더 실질적인 방식이 있다. 많은 AHCI 멤버들이 이 방식을 사용하게 된다. 즉 스위스 대부분의 브랜드처럼 무브먼트 에보슈인 ETA, JLC, F. Piguet, Lemania의 무브먼트를 사용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일부 부품을 추가하여 수정함으로써 새로운 시계를 만드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AHCI 멤버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칼라브라제 처럼 에보슈로 구할 수 없는 무브먼트는 자신이 만들고, 무브먼트보다는 다이얼의 독특한 컴플리케이션을 특징으로 하는 시계는 ETA를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무브먼트까지 직접 만드는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의 방식은 시계 제조에 많은 시간이 걸리므로 고가로 팔아야 하며 그런 장인적인 특징 때문에 제조 수량을 늘리기도 어려운 것이다. 몇 년에 한 개, 1년에 10개, 1년에 100개 등 제조하려는 수량에 따라 제조방식은 달라야 하는 것이다.
스벵 안데르센(1942-)은 덴마크에서 태어나 4년간 시계수리점에서 수습기간을 보낸 후 1963년에 스위스의 루체른에 있는 고급 시계 리테일러이자 수리점인 구벨린(Gubelin)에서 일하게 된다. 1965년 구벨린이 제네바에 분점을 내자 제네바로 옮겨 근무한다. 1969년 27살에 취미 삼아 병 속에 클럭을 조립한 '보틀 클럭'을 제조했다가 '불가능을 만드는 시계기술자'로 언론의 조명을 받게 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파텍 필립의 컴플리케이션 조립팀에서 10년간 일하게 된다. 안데르센은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와 달리 파텍 필립에서 10년간 시계 제조를 배운 경험을 가진 기술자이다. 비슷한 경우가 파텍 필립의 컴플리케이션팀에서 일하다가 쿼츠 혁명기에 파텍 필립을 그만두고 시계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며 공방을 운영하다가 50대 말에 창업하게 되는 로저 뒤비(Roger Dubuis: 1938-2017)가 있다.
로제 뒤비보다 4살 어린 스벵 안데르센은 파텍 필립에서 로제 뒤비 밑에서 근무하다가 1980년 38살에 파텍 필립을 나와 시계수리점 겸 공방을 개업했다. 개업 초기 애뉴얼 캘린더와 퍼페츄얼 캘린더를 만들어 컴플리케이션 전쟁을 치르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에 팔아 자금을 모으게 된다. 이어 엔틱 시계들을 수리하면서 프레드릭 피게, ETA 등 에보슈를 베이스로 하여 수정한 개성적인 시계들을 만들어 판매하게 된다. 1989년에는 파텍 필립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월드 타임'을 만들게 되고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오토마톤'(자크마트를 포함하는 더 넓은 개념의 인형 시계)의 하나인 에로스 시계를 만드는 등 고객들이 원하는 다양한 시계들을 만들었다. 시계 수리를 병행하면서 40년간 1,500개 정도의 시계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ETA 등 에보슈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제조 수량이다.
공방을 운영하는 경우 시계만 만들어서는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우므로 시계수리도 병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두 가지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노년의 대니얼스처럼 조수가 필요해진다. 안데르센은 시계 수리로 명성을 얻게 되자 시계 기술을 배우려는 후배들을 조수로 받아서 함께 작업하게 된다. 안데르센이 파텍 필립 박물관에 진열될 엔틱 시계들의 수리를 맡게 되었을 때 그의 공방에서 근무한 사람이 프랭크 뮬러였다.
AHCI 멤버 중 1980년대 중반에 활발하게 활동하던 칼라브라제와 안데르센은 자신들처럼 독립적으로 소량의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을 모아 브랜드들이 참여하는 각종 전시회에 참여하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칼라브라제와 스벵 안데르센이 1984년 신문 광고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하여 출발한 AHCI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