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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프랭크 뮬러

프랭크 뮬러와 비르탄 시르마케


1986년의 초창기 AHCI 멤버로 시작하여 1992년 투자자를 모아 브랜드를 창업하여 2000년대 워치 랜드와 프랭크 뮬러 그룹을 만들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사람이 프랭크 뮬러이다. 


프랭크 뮬러(1958~)는 쿼츠 혁명이 절정에 도달한 1980년대 초 제네바의 시계 학교를 졸업하고, 고급 시계 수리점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어 스벵 안데르센이 파텍 필립 박물관의 시계수리를 담당하게 되자 함께 일하면서 파텍 필립의 시계들에 익숙해진다. 1984년 투루비용으로 첫 시계로 만들게 되어 26살에 컬렉터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다. 조지 대니얼스, 필립 듀포나 안데르센에 비해서 매우 젊은 나이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1987년 미니츠 리피터와 1990년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1980년대에 투루비용이 주요 브랜드에서 등장한 것이 1986년 오데마 피게, 1988년의 브레게, 1989년의 블랑팡, 1990년의 IWC인 것을 고려하면 프랭크 뮬러가 손목시계로 투루비용을 1984년에 처음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프랭크 뮬러가 본격적으로 시계를 만들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 이후의 흐름을 상당히 정확히 읽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86년 이후 시르마케와 동업하여 브랜드로 출범하기 전인 1992년까지 6년간 프랭크 뮬러는 투루비용, 미니츠 리피터, 퍼페츄얼 캘린더 미니츠 리피터 등 블랑팡이나 IWC와 경쟁이 가능할 정도로 매년 컴플리케이션을 제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AHCI멤버 중 가장 적극적으로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가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랭크 뮬러의 1986년 투루비용과 1991년 생트레 커벡스


프랭크 뮬러는 컬렉터들에게 크로노그래프를 만들어 팔면서 주문을 받아 투루비용이나 미니츠 리피터를 소량 제조했다. 1986년에 만든 것으로 확인되는 투루비용의 디자인으로부터 당시 쇼메에 의해 재등장한 브레게의 디자인이 보이기도 한다. 1991년에 제조된 것으로 확인되는 생트레 커벡스(Cintrée Curvex)는 퍼페츄얼 캘린더 리피터 모델인데 이후 프랭크 뮬러를 유명하게 만드는 시계이자 큰 시계 유행을 가져온 중요한 시계였다. 프랭크 뮬러는 1987년에 생트르 커벡스 첫 모델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객의 주문을 받고 제작을 시작하던 시기라 프랭크 뮬러가 초창기에 만든 시계들에 대한 자료는 경매에 등장하기 전에는 확인이 어렵다. 그러나 경매시장에 간혹 등장하는 당시 그가 만든 일부의 시계만 보더라도 20대의 젊은 시계 제작자로서는 적지 않은 주문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계 케이스나 다이얼 디자인에서 젊은 나이 답지 않은 세련됨도 나타난다. 조지 대니얼스나 필립 듀포의 경력을 감안하면 20대의 독립 시계 제작자인 프랭크 뮬러는 제네바에서 일을 시작한 장점을 활용하여 스위스의 무브먼트, 케이스, 다이얼 제조 업체들과 폭넓은 관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랭크 뮬러는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브랜드들이 시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컴플리케이션 마스터 프랭크 뮬러


프랭크 뮬러에 의해 1992년 완성된 로드 애런의 퍼페츄얼 캘린더 미니츠 리피터


한편, 1989년 프랭크 뮬러는 엔티쿼럼 경매에서 1898년에 만들어진 루이 엘리제 피게가 만든 32밀리의 소형 리피터 무브먼트를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브먼트를 이용하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기 위해 투자자를 찾게 된다. 영국의 로드 애런이 프랭크 뮬러의 계획에 관심을 보여 투자를 하자 프랭크 뮬러는 이 무브먼트에 퍼페츄얼 캘린더를 추가하여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을 만들어 1992년에 바젤 페어에 전시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이런 역사를 보더라도 젊은 프랭크 뮬러는 시계를 제조하기 전에 그 시계를 구입할 고객부터 찾은 후에 자금 지원을 받아 시계를 제조하고, 이를 AHCI 전시회에 전시한 후에 구매자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뮬러가 만든 로드 애런의 시계는 AHCI멤버가 만들어 판든 첫 번째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였다. 이를 통해 프랭크 뮬러는 AHCI멤버들 중 컴플리케이션에 대한 독보적인 실력을 가진 젊은 독립 제작자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폴 거버에 의해 2013년에 완성된 로드 애런의 컴플리케이션과 기네스북 인증서


당시 부품 수로 가장 복잡한 컴플리케이션이었던 이 시계의 주인 로드 애런은 곧 깨질 것으로 보이는 이 계획을 투루비용과 스픓릿 크로노그래프 등을 계속해서 추가하기 위해 취리히에서 공방을 운영하던 다른 AHCI 멤버이자 마이크로 메카닉의 대가인 폴 거버에게 의뢰하여 최종적으로 부품 1,116개로 구성된 가장 복잡한 컴플리케이션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무브먼트 제조에 참가한 Piguet/Muller/Gerber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이고, '슈퍼비아 휴마니타티스'(인류의 자부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1986년 AHCI의 초기 멤버로 가입하여 AHCI의 전시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폴 쥬른과 함께 가장 젊은 제작자였던 프랭크 뮬러는 전시하는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이 많았으므로 가장 눈에 띄는 제작자였다. 그 이후의 행보를 보면 고객들과 만나는 것을 즐기고 파티를 좋아하는 등 사업가로서의 재능도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랭크 뮬러보다 2살 많은 Vartan Sirmakes(1956-)는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18세에 스위스 제네바로 이주하여 보석 세공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집안이 부유했는지 세공사 자격을 얻자마자 제네바에 자신의 공방을 열어 귀금속 제품을 제조하다가 동업자와 함께 시계 케이스를 제조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프랭크 뮬러도 제네바에서 자신의 공방을 열고 있었고, 바젤 페어를 비롯하여 시계 전시회는 보석 전시회와 같이 열렸으므로 1980년대 중반부터 서로를 알고 지냈을 것이다. 이 시대에 제조된 프랭크 뮬러의 세련된 시계 다이얼이며 시계 케이스를 보면 프랭크 뮬러가 만든 시계 케이스의 일부를 시마르케가 제조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보석공방에서 시계 케이스 제조로 사업을 확장했던 시마르케는 프랭크 뮬러의 시계들이 사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보고 투자자들을 모집하여 컴플리케이션으로 상당한 명성을 얻은 프랭크 뮬러의 이름으로 시계 사업에 진출하게 된다. 1992년 프랭크 뮬러는 바르탄 시르마케와 'Franck Muller'를 전 세계 81 개국에 상표 등록하고 Franck Muller S.A.를 설립하게 된다. 



생크레 커벡스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벡스

프랭크 뮬러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롤렉스의 본사 등이 위치하여 스위스 시계 중에서도 최고급 시계라는 이미지를 가진 '제네바'를 다이얼에 표기하고, 케이스백에는 1992년 엘리제 피게의 무브먼트를 퍼페츄얼 캘린더로 수정하여 얻은 명성을 활용하여 '컴플리케이션의 마스터'(Master of Complications)'이라는 문구를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하게 된다.


프랭크 뮬러의 월드 프리미어


창업 직후인 1993년부터 '월드 프리미어(World Premiers)' 라인을 통해 매년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여 컴플리케이션의 프랭크 뮬러라는 이미지도 유지해 나갔다. 프랭크 뮬러의 투루비용 등 고가의 컴플리케이션은 월드 프리미어 라인에 속하는 시계들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토노 시계, 그루엔의 커벡스, 카르티에 탱크 생트레


프랭크 뮬러와 시마르케는 창업 첫해에 '생트레 커벡스'를 상표로 등록하며 대표 제품으로 개발하여 귀금속 제품을 중심으로 300개를 판매한 후, 이듬해에는 스테인리스의 엔트리 모델까지 출시하며 3,500개를 판매할 정도로 급성장하게 된다. 1992년 생트레 커벡스의 디자인에 매력을 느낀 미국 리테일러가 프랭크 뮬러 전문 매장을 차릴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기계식 시계의 부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에 프랭크 뮬러는 생트레 커벡스 모델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토노 스타일은 사각 시계와 함께 1920년대부터 유행하던 디자인으로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에서도 많이 만들었던 손목시계의 고전적인 디자인의 하나였다.


프랭크 뮬러는 키르티에의 생트레를 토노 스타일로 변경하면서 그루엔의 상표였던 커벡스를 조합하여 '생트레 커벡스'라는 이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벡스는 단순한 모방만은 아니었다. 프랭크 뮬러의 생트르 커벡스는 1920년대의 토노 디자인이나 카르티에의 생트레와 달리 매우 입체적인 디자인이었다. 더구나 프랭크 뮬러는 35 밀리 정도가 한계로 느껴지던 정장용 시계를 길이를 기준으로 40 밀리 정도로 큰 시계를 만들었다. 길이는 길지만 폭은 30 밀리대로 좁아서 40밀리가 넘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큰 시계이면서도 커 보이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더구나 손목에 밀착감을 주도록 시계에 곡면을 만드는 그루엔의 커벡스 혹은 카르티에의 생트레 디자인을 도입하여 케이스가 곡면을 이루어 큰 시계이면서도 착용감도 좋아졌다. 그 결과 시계 케이스는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매우 입체적인 3D 디자인의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다이얼의  디자인도 카르티에의 탱크 생트레 같은 엄숙한 로마 다이얼이 아니라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면서도 카르티에의 비율 정도로 디자인되었다. 비슷한 비율로 축소되었지만 프랭크 뮬러의 다이얼의 느낌은 카르티에의 다이얼보다도 자유분방한 현대적인 분위기로 변했던 것이다. 기계식 시계가 부활할 시기에 새로운 것을 찾던 부유한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모든 개성을 가진 시계였다. 영국 출신의 팝스타인 엘튼 존, 배우인 스왈츠네거, 실베스터 스탤론, 데미 무어 같은 유명인들이 이를 자비로 구입하여 차고 다니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프랭크 뮬러의 롱아일랜드, 마스터 뱅커와 크레이지 아우어


기본적인 콘셉트가 정해지자, '카사블랑카'(1998), 토노 디자인을 사각형으로 변경한 '롱아일랜드'(2000), '마스터 뱅커'(1996), 시계 다이얼의 숫자를 뒤섞어 놓고 시침이 해당 숫자를 찾아가는 '크레이지 아우어'(2003) 등 프랭크 뮬러는 시계의 기능에 따라 오메가에서 파텍 필립 가격의 시계를 폭넓게 제조하면서도 다른 브랜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을 가진 시계들을 매년 발표했다. 마스터 뱅커는 다이얼에 3 타임존을 설치하여 기존의 2 타임존 혹은 파텍 필립의 월드 타임보다 단순하면서도 사용이 편리한 시계로 명성을 얻게 된다.


프랭크 뮬러의 생트레 커백스와 플레티늄 로터 (ETA 2892)


1986년 AHCI 설립 멤버로 바젤 페어 등 전시회에 익숙했던 프랭크 뮬러는 전시회에서는 월드 프리미어의 컴플리케이션 위주로 시계들을 발표하고, 리테일러를 통해서는 스테인리스 케이스에 ETA를 사용한 엔트리 모델들은 물론 18K 모델에는 다른 수정을 하는 대신에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이 18K 예로우 골드를 사용하던 로터를 플레티늄으로 변경하여 공급했다. 시계 다이얼에는 로터의 재질인 'Platinum Rotor'라는 표기도 했다. 그러나 시계의 기본적인 디자인은 컴플리케이션이나 스테인리스의 엔트리 모델이나 차이가 없었다.


재질이나 구성을 일부 바꾸더라도 같은 디자인으로 가장 저렴한 엔트리 모델과 최고가 모델을 판매하는 것이 대중적인 하이엔드의 성공 요건이라는 것은 카르티에와 프랭크 뮬러의 역사로부터 확인된다.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엔트리 모델이 중요한 이유이다. 안정된 판매량과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샐러리맨들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가격이 하이엔드의 엔트리(입장권) 모델이며 이를 통해 매년 매출과 순익을 늘려나갈 수 있는 것이다. 



빠른 성공이 잉태한 비극


프랭크 뮬러의 와치 랜드

브랜드를 출시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매년 매출이 급성장하자 개업 10년 만인 2001년에는 제네바 교외의 레만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낡은 성을 수리하여 Frank Muller Wachland를 설립하게 된다. 단순한 공장이 아니라 문화공간처럼 꾸민 것이다. 프랭크 뮬러와 시마르케의 사업 스타일을 보여주는 시설이다. 2005년에는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의 판매량을 넘어 연 5만 개의 시계를 판매하며,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대형 럭셔리 브랜드로 성장했다. 그러나 대표들인 프랭크 뮬러와 시르마케의 분란, 로저 뒤비를 필두로 프랭크 뮬러의 성공에 편승하려는 브랜드들의 me-too 전략, ETA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시계들에 대한 논란 등으로 프랭크 뮬러의 이미지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급격히 하강하게 된다.


2003년 4월 와치 랜드에서 월드 프리미어의 레볼루션(Revolution) 2를 발표하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프랭크 뮬러는 그 해 여름 동업자이자 자본가인 시마르케와 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 당시에 알려졌던 이유는 시르마케가 주도한 European Company Watch와 Pierre Kunz 등 자회사 설립과 관련한 경영상의 트러블이었다. 이후 몇 번의 소송을 통해 결국 대주주인 시마르케가 프랭크 뮬러를 퇴출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뮬러와 시르마케의 갈등과 소송 과정들이 자주 뉴스로 등장하면서 소비자들의 관심이 다른 브랜드로 옮겨가며 점차 매출이 줄어들게 된다. 한 때 800 명에 육박했던 직원을 250 명 정도로 줄이는 구조조정도 해야 했고, 현재는 컬렉터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한때 빤짝했던 브랜드로 잊혀 가고 있다. 스위스의 전통적인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판매량과 영업이익을 넘어서던 20 년 간의 화려한 성장시대가 하향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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