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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


쿼츠 혁명기에 오데마 피게를 살아남게 만들고, 기계식 시계가 럭셔리 제품으로 부활한 후 오데마 피게의 대표 제품을 넘어 오데마 피게와 동의어가 된 시계가 로열 오크이다.


쿼츠 혁명이 시작된 1970년 오데마 피게는 오랜 고민 끝에 이태리 딜러의 제안에 따라 소비자들이 원하는 고급 스포츠 시계를 제조하기로 결정하고 이태리 출신의 시계 전문 디자이너인 제랄드 젠타(1931~2011)에게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시계 디자인을 의뢰하게 된다. 이태리 딜러의 제안이란 정규 제품으로 소비자들이 원하는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스포츠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스위스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스테인리스 스틸제 시계가 보편화되는 1950년대와 1960년에도 고집스럽게 귀금속 시계만 만들어 온 것이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 같은 스위스를 대표하는 컴플리케이션의 명가들이었다.


이 브랜드들은 파베르제, 카르티에, 쇼메, 불가리, 반 클립 & 어펠스와 같은 보석상 비슷한 점이 있다. 이들의 고객은 최상류 층들이고 이들이 찾는 시계는 귀금속 시계이지 스테인리스나 도금 시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들에게 스렌 레스 스틸제 시계란 대량 생산 브랜드인 롤렉스, 오메가, 론진, 제니스같은 브랜드가 만드는 시계이지 자신들과는 DNA가 틀린 시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쿼츠 혁명이 시작되며 시대가 바뀌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었다. 새롭게 등장하는 부유층인 기업가, 고위 공직자 같은 부자들을 새로운 고객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데 그 소비자들이 예전의 귀족들과 달리 수영 같은 스포츠를 즐기게 되자 가죽 줄 시계를 불편해하며 올 스테인리스 스틸의 시계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트 저스트,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


부유한 소비자들이 원하는 시계는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같은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시계로 오데마 피게나 파텍 필립다운 고급 시계였다. 롤렉스는 1905년에 창업하여 손목시계 시대와 대공황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많은 브랜드들이 도태되는 시기인 1930년대부터 손목시계의 유행을 주도하며 떠오르기 시작한 브랜드였다. 하지만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의 입장에서는 롤렉스는 론진이나 오메가와 경쟁하는 브랜드였지, 자신들 같은 금시계와 컴플리케이션 중심의 브랜드가 아니었다. 그러나 1945년 데이트 저스트, 1956년 데이-데이트를 발표하고, 1953년 턴-오-그래프(Turn-O-Graph)를 시작으로 프로페셔널 시계를 창시하며 1960년대까지 꾸준히 성장하여 쿼츠 혁명기에는 오메가를 완전히 앞지르며 이제는 노포들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경쟁자로 성장했다.


롤렉스 프로페셔널 시계들


쿼츠 혁명이 곧 손목시계에서도 시작될 것이라는 것은 1960년대에 이미 예고되고 있었고, 스위스에서도 1963년부터 손목시계용 쿼츠 무브먼트 개발계획인 알파(Alpa)와 베타(Beta) 계획이 두 팀으로 나누어 진행 중이었다. 1969년 손목시계의 쿼츠 혁명이 시작된 상황에서도 1970년까지 버티던 오데마 피게가 결국 소비자들의 요구를 외면하지 못하고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와 경쟁할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정규 제품 디자인을 제랄드 젠타에게 의뢰하기에 이른 것이다.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처럼 방수 기능을 가지고 자동의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올 스테인리스 시계여야 하지만 롤렉스와는 달리 얇은 디자인 이어여 했다. 부유층들이 기대하는 오데마 피게와 파텍 필립의 시계는 오메가가 만드는 롤렉스의 미투 제품이어서는 안 되고 훨씬 고급한 제품이어여 했다.



그 결과 오데마 피게에서 1972년 첫 스테인리스 정규 제품인 로열 오크가 발표된다. 이어 스위스 노포들 중 가장 자존심이 강한 파텍 필립도 1976년 제랄드 젠타의 디자인을 받아들여 스테인리스 정규 제품인 노틸러스를 발표한다.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시계 케이스를 만들어 본 적이 없던 오데마 피게는 케이스와 브라슬렛을 전문으로 하는 외부업체에 이를 의뢰해야 했다. 그리고 해당 업체로부터 스테인리스 케이스는 최소 주문 가능한 양이 1,000개라는 말을 듣고는 자신들로서는 판매해본 경험이 없는 한 가지 모델에 천 개의 케이스를 주문해야 했다. 브라슬렛 일체형의 케이스와 브라슬렛이었지만 독특한 디자인의 브라슬렛은 해당 업체에서도 제조가 어렵다고 하여 브라슬렛은 다른 업체에 의뢰해야 했다.



귀금속 케이스 외에는 만들어본 적이 없는 사내 기술자들에게 스테인리스제의 케이스와 브라슬렛의 조립은 귀금속 시계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 결과 오데마 피게는 로열 오크에 스테인리스 시계이면서도 자신들이 만드는 금시계보다 더 비싼 가격을 책정해야 했다. 스테인리스 시계를 주로 생산하는 롤렉스나 오메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가격 설정이었다. 결국 로열 오크는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는 물론 잠수용 전문 시계인 서브마리너의 10배 가격으로 판매되었다.



롤렉스의 데이트 저스트보다 장점이었던 것은 오데마 피게는 당시 '칼리버 2120'(데이트 버전 2021)이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한 상태여서, 스포츠형 자동 스테인리스 시계로서는 매우 얇고 버블 백의 악명을 가진 롤렉스와 달리 케이스 백이 평평한 시계를 제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슈퍼 하이엔드 스포츠 시계의 특징이다.


경영진의 결정에 의해 이 시계를 만들기는 했지만 오데마 피게의 기술자들은 금시계보다 비싼 스테인리스 시계가 팔릴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전부 재고로 남게 된다면 고가의 무브먼트를 회수하기 위해 힘들게 조립한 시계들을 다시 해체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무모한 도전으로 보였던 것이다. 오데마 피게도 1,000개만 판매한다고 했을 정도로 경영진들로서도 이 시계의 성공을 자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제랄드 젠타가 이 시계를 디자인한 지 1년 후인 1971년 스위스 바젤 페어에서 로열 오크가 첫 선을 보이게 된다.



가격이며 디자인 등 이런저런 논란을 일으켰지만 로열 오크는 몇 년 후 오데마 피게 역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고, 1,000개만 만들기로 했던 시계는 4,000 개로 늘어났고, 그 후 50년이 지난 현재도 다양한 모델로 생산되고 있으며, 파텍 필립의 티에리 스턴의 말처럼 오데마 피게는 '로열 오크' 외에는 판매하기 어려운 단일 제품의 회사라는 인식까지도 생겨날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지만 엔트리 모델의 금시계인 칼라트라바 3919보다 비싼 시계였다. 그리고 로열 오크에 사용된 2120과 같은 파텍 필립 칼리버 28-255를 사용하여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와 같은 플랫한 디자인의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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