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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링고 Oct 22. 2022

AP와 파텍 필립의 세대 교체


1978년 가장 슬림한 퍼페츄얼 캘린더를 발표하여 컴플리케이션 경쟁을 시작했던 오데마 피게는 1986년 데릴리움의 구조에 착안하여 슬림한 자동 투루비용 손목시계를 개발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는 슬림함과 컴플리케이션의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며 컴플리케이션을 자동화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블랑팡이나 IWC처럼 퍼페츄얼 캘린더에서 시작하여 모든 컴플리케이션을 통합하는 슈퍼 컴플리케이션 개발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오데마 피게에 의해 퍼페츄얼 캘린더와 투루비용의 자동화와 슬림화가 1986년까지 등장하며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의 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투루비용은 아브라함 브레게에 의해 시계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로 개발되었으나 투루비용으로 정확성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으면서도 제조가 어려웠으므로 주요 브랜드에서도 크로노미터 경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소량 만들어졌을 뿐 컴플리케이션의 개념으로 만들어진 적이 없는 특수한 무브먼트였다. 오데마 피게, 블랑팡, IWC 등이 경쟁적으로 이를 컴플리케이션에 도입함으로써 투루비용은 특별한 부가적인 기능이 없으면서도 손목시계의 컴플리케이션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84년 로열 오크 퍼페츄얼 캘린더


1980년대는 로열 오크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여 오데마 피게는 슬림한 자동 투루비용 발표 이후 컴플리케이션 개발보다는 로열 오크의 다양한 모델들을 출시하는 데 집중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의 이런 결정이 르노&파피가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1978년부터 1986년까지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던 소수의 브랜드 중 하나였으나 이후 이에 대한 관심을 접게 될 무렵인 1984년에 시계학교를 졸업한 19살의 지울리오 파피가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울리오 파피(1965~)는 라쇼드퐁의 시계 학교에 유일한 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쿼츠 혁명이 진행되며 카시오, 시티즌, 세이코에 의해 이미 기계식 시계보다 저렴하면서 다양한 기능을 가진 기계식 시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계들이 출시되던 시절이었다.


그 시기에 기계식 시계 기술을 배우려는 학생은 더 이상 없었다. 다른 학생이 없었던 덕분에 지울리오 파피는 학교의 모든 교수들로부터 1대 1 개인지도를 받게 된다. 1984년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만든 스켈레턴 시계를 가지고 오데마 피게에 면접을 보러 갔다. 지울리오 파피의 실력에 감탄한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에 입사한 지울리오 파피는 가장 고난도의 기술인 컴플리케이션 설계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비버가 1970년대에 오데마 피게에서 먼저 경험한 것처럼 컴플리케이션 개발은 20년은 지나야 가능하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지울리오 파피는 선배인 도미니크 르노와 함께 1986년 르노&파피를 창업하게 된다. 그리고 IWC와 율리스 나르당의 미니츠 리피터를 시작으로 이후 카르티에, 샤넬, 해리 윈스톤, 프랭크 뮬러, 리샤르 밀의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지울리오 파피(1965~ )


자금이 부족해진 도미닉 르노와 지울리오 파피는 1992년 오데마 피게에게 지분 52%를 넘기며 자본을 투자받으면서 오데마 피게의 무브먼트 개발과 다른 브랜드의 컴플리케이션 개발을 절반씩 담당한다는 계약을 체결하며 이후 컴플리케이션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 기술자들의 사관학교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도미니크 르노는 1996년 자신의 지분(24%)을 오데마 피게에 팔고 르노&파피를 떠나게 된다. 이후 지울리오 파피가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어 1990년대 이후 주요 브랜드들의 컴플리케이션을 제조하는 중심이 되었다. 현재 150명의 자체 기술인력을 가지고 최대 주주(76%)인 오데마 피게에게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공급하는 역할과 함께 21세기에 가장 성공한 브랜드인 리샤르 밀 등의 무브먼트를 설계하고 있다. 컴플리케이션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어 오데마 피게를 사직하고 컴플리케이션 공방을 설립했던 지울리오 파피는 오데마 피게의 컴플리케이션 개발을 전담하고 있는 셈이다.



1983년 캘린더 모델을 시작으로 '식스 마스터 피스'를 차례로 발표하던 블랑팡이 투루비용을 발표한 것이 1989년이다. 이때 블랑팡의 투루비용 케이지를 설계한 것은 에드먼트 캡트가 아니라 벵상 칼라브라제였다.  이태리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시계 기술을 배웠던 벵상 칼라브라제(1944~)는 1977년 밸런스와 이스케이프먼트까지 일렬로 배열하는 독특한 일자형 무브먼트(스페이싱 )를 개발하여 제네바 발명 전시회에서 금상을 수상하게 된다. 코룸에서 이 무브먼트를 구입하여 1980년 코룸의 'Golden Bridge'로 판매된다. 칼라브라제는 이 독특한 기술을 사용하여 부품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 이를 투명한 유리에 설치한 시계들을 제조하게 된다. 1985년 블랑팡의 자크 피게는 독특한 기술을 가진 칼라브라제에게 투루비용 케이지의 설계를 의뢰하게 된다. 1986년에 완성되어 블랑팡에 전달된 투루비용 케이지를 바탕으로 1989년 블랑팡의 수동 투루비용이 발표되었던 것이다.



1991년 블랑팡에서 시작된 슈퍼 컴플리케이션은 1993년 IWC의 슈퍼 컴플리케이션과 1992년 프랭그 뮬러와 폴 거버가 루이 엘리제 피게의 리피터에 퍼페츄얼 캘린더와 투루비용 등을 추가하여 함께 시계를 만들며 슈퍼 컴플리케이션 손목시계를 발표하며 컴플리케이션 개발의 정점을 이루게 된다. 프랭크 뮬러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은 블랑팡이나 IWC와 달리 회사가 아닌 개인 공방에서 만들어진 시계였으므로 가장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프랭크 뮬러가 이후 자신을 '컴플리케이션의 황제'라고 자칭하게 된 이유이다. 1992년 제네바에서 보석 공방을 운영하던 시마르케스(1956~)의 지원을 받은 프랭크 뮬러는 자신의 이름으로 브랜드를 출범하며 기계식 시계 부활과 함께 가장 성공한 AHCI 멤버로 성장하게 된다. 슈퍼 컴플리케이션은 기능이 증가할수록 시계가 두꺼워져서 실생활에 사용하기 불편한 시계였지만 2000년대 이후에도 브랜드의 기술력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을 주기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파텍 필립 칼리버 89


한편, 파텍 필립은 컴플리케이션이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는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한 1970년대 말 쿼츠 개발에서 한 발 물러나 그 이전에는 루이 엘리제 피게와 빅토리안 피게 등 발레 드 쥬의 컴플리케이션 전문가들에게 의뢰하던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최종적인 목표로 1989년의 150 주년을 기념하는 시계로 그레이브스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을 넘어서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계를 자체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다. 이를 통해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자체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만들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정규 제품으로 퍼페츄얼 캘린더와 크로노그래프를 판매하던 파텍 필립에서도 몇 년에 하나 팔리는 미니츠 리피터 손목시계는 빅토린 피게의 무브먼트에 의존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필립 스턴은 기존의 복잡 시계팀에 컴퓨터로 무브먼트를 설계할 인물을 영입하게 된다.



장-피에르 무시는 뇌샤텔의 공과대학에서 마이크로 엔니지어링을 전공한 후 에보사 S.A.의 R&D팀의 설계 엔지니어로 입사한다. 여기서 4년간 근무한 후 1977년 오메가의 SSIH로 옮긴다. 오메가에서 무시에게 주어진 업무는 1.35밀리의 쿼츠 슬림 시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장-피에르 무시는 얇은 시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파텍 필립 기술감독 Jean-Pierre Musy


1980년 파텍 필립은 쿼츠 개발에 대한 투자에 이어 기계식 시계에서의 돌파구를 컴플리케이션에서 찾고 있었다. 한편 에드먼드 캡트가 시작했듯이 이 무렵은 컴퓨터를 이용한 설계 방식인 CAD와 컴퓨터를 이용하여 부품들을 자동으로 생산하는 CAM 기술이 시작된 시절이었다. 이 무렵부터 대학에서 정밀 기계 기술을 배운 엔지니어들이 시계 업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으로 그리는 설계 도면과 시행착오를 통해 무브먼트를 개발하던 전통적인 시계 기술자들을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는 엔지니어들이 대체하던 시기였다. 이후 무브먼트의 설계는 엔지니어들이 담당하고, 조립은 전통적인 시계 기술자들이 행하는 현재와 같은 업무분담이 이루어지게 된다. 필립 스턴은 당시 테크니컬 감독과 협의하여 컴퓨터 설계 기술에 능통한 무시를 영입하여  1989년의 150 주년의 기념 모델을 목표로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던 R&D팀에 배치하게 된다. 파텍 필립 내에서도 가장 오랜 경력을 가진 노장들이 즐비하던 컴플리케이션팀에서는 컴플리케이션에 대해서는 경험이 없는 젊은 엔지니어가 R&D팀의 중심이 되는 것에 대해 반대도 많았다고 한다.



에보사와 오메가에서 쿼츠 무브먼트 개발과 슬림 시계 개발에 참여했지만 컴플리케이션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없었던 Musy는 컴플리케이션팀의 노장들로부터 컴플리케이션에 대해 배워가며 이를 CAD 프로그램으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필립 스턴이 업무로 맡긴 컴플리케이션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대학에서 시계 기술이 아닌 마이크로 엔지니어링을 배운 젊은 기술자들로 자신의 소규모 팀을 구성하자 필립 스턴은 64만 달러를 투자하여 CAD와 CAM 장비를 구입하게 된다. 노장들의 회의적인 시각과 달리 컴퓨터 기술을 활용하여 그레이브스 제조 때와는 달리 파텍 필립의 자체 기술로 1984년에 칼리버 89의 프로토타입이 완성되게 된다. CAD를 활용하자 회중시계 제조로 추친되던 컴플리케이션 기술 중 미니츠 리피터에 대한 기술을 손목시계 사이즈로 축소하고 자동 무브먼트로 개발하는 작업이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Musy는 이 무렵 미니츠 리피터의 소리에서 잡음을 제거하여 명료한 소리를 얻기 위해 이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던 발레 드 쥬의 기술자들도 찾아다니며 미니츠 리피터의 소리를 내는 핵심기술은 공(gong) 스프링의 개발에 전념하게 된다.



1989년 파텍 필립은 그레이브스의 슈퍼 컴플리케이션을 넘어서는 칼리버 89 회중시계 4개를 만들어 발표함과 함께 이때 개발된 자동 미니츠 리피터와 퍼페츄얼 캘린더를 결합한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게 된다. 이로써 자동 미니츠 리피터가 파텍 필립의 가장 고가의 컴플리케이션을 구성하게 된다.


2001년 스카이 문 투루비용

이에 대한 업적을 인정받아 Musy는 1990년 파텍 필립의 무브먼트 개발팀의 부책임자를 거쳐, 1993년에는 테크니컬 디렉터로 승진하며 1980년대 이후 파텍 필립의 기술을 책임지고 있다. 1996년 애뉴얼 캘린더 개발, 2000년 칼리버 89를 넘어서는 스타 칼리버 2000 회중시계와 2001년 양면시계인 스카이문 투루비용 등도 그가 테크니컬 감독으로 개발한 시계들이다.



2001년 스카이 문 투루비용 개발을 마지막으로 Musy는 당시 롤렉스, 율리스 나르당, 지라드 페레고 등이 주축이 되어 진행 중인 기계식 시계의 한계인 오일을 사용하지 않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실리콘을 밸런스 스프링과 이스케이프먼트 재료로 사용하는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업무에 종사하게 된다. Musy는 대학에서 정밀 기계 공학을 전공한 후 쿼츠 혁명 시기에 시계 업계에 입문하여 CAD/CAM 기술을 이용하여 얇은 시계 경쟁, 컴플리케이션 경쟁과 실리콘 기술 경쟁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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