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부터 1980년까지 진행된 얇은 시계 전쟁에 이어 1985년부터 1993년까지 비버의 블랑팡과 블륌레인의 IWC가 중심이 되어 컴플리케이션 전쟁이 진행된다. 이 기간 동안 율리스 나르당은 전혀 새로운 스타일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얇은 시계 전쟁이 끝나고 컴플리케이션이 주목을 받자 오데마 피게와 파텍 필립은 물론 피아제, 오메가 등 컴플리케이션에 관심이 없던 브랜드들에서도 퍼페츄얼 캘린더가 등장하는 상황이었다. 이후 퍼페츄얼 캘린더는 세이코에서 쿼츠 시계로도 판매하는 상황이라 새로운 컴플리케이션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1983년 율리스 나르당을 인수한 롤프 쉬나이더는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시계 기술을 배운 루드윅 외슬린과 만나 블랑팡과 IWC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컴플리케이션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외슬린의 천문 클럭에 대한 경험을 컴플리케이션의 제조에 도입한 독특한 브랜드 율리스 나르당의 재창업 과정과 천문시계 삼부작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자.
1983년 롤프 쉬나이더(Rolf Schcyder, 1935-2011)는 스위스의 생 모리츠로 잠시 귀국하여 스키를 타다가 율리스 나르당이 매물로 나온 것을 보고 이를 인수하게 된다. 율리스 나르당(1846~)은 스위스에서 거의 유일한 마린 크로노미터 전문 브랜드였다. 마린 크로노미터 전문기업이었던 율리스 나르당은 전자 기술이 마린 크로노미터를 대체하게 된 20세기부터는 크로노미터 회중시계와 손목시계를 제조하는 소규모 브랜드였다.
1935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난 쉬나이더는 1956년 제네바에서 JLC의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게 된다. 1957년 신문에서 스위스의 무역회사에서 태국에서 근무할 직원을 채용하는 광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다. JLC에서 근무했던 경력 때문에 시계 판매부서에 배치되어 스위스 시계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태국에 가게 된다. 쉬나이더는 유럽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태국, 라오스, 발리, 캄보디아, 베트남을 탐험하게 된다. 1966년 6개월간 남아시아에서 남미로 이어지는 탐험을 떠나 미국의 필립 모리스에서 동남아시아의 담배 시장을 개척하는 업무 계약을 하게 된다.
필립 모리스의 업무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쉬나이더는 스위스에 있던 필립 모리스의 유럽본부를 방문하여 다이얼 제조 회사를 운영하던 파텍 필립의 사촌들과 만나게 된다. 오랫동안 태국에 살았던 쉬나이더는 손재주가 좋은 태국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면 저렴한 노동력으로 품질 좋은 다이얼을 공급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게 된다.
1968년 쉬나이더는 스위스와 아시아의 투자자들을 모아 Cosmo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태국에서 다이얼과 케이스를 제조하는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Mido, Rado, 티솟, 포티스 등으로부터 계약을 따낸 쉬나이더는 사업에 성공하지만 투자자들과의 갈등으로 지분을 팔아 1973년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 새로운 공장을 열게 된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경제개발을 위해 10년간 수입원자재에 대한 면세 정책이 시행 중이었다. 스위스에 연락 사무실을 차린 쉬나이더는 사무실이 ASUAG 근처였으므로 사장인 에른스트 톰케와 만나 동남아시아에서 ETA에서 개발한 쿼츠 모듈의 일부를 제조하는 계약을 따게 된다. ETA에서 자동생산이 가능한 쿼츠 무브먼트의 생산을 동남아시아와 홍콩에서 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68년부터 시작한 시계 관련 사업이 호황을 누리며 재산을 모은 쉬나이더는 다소 늦은 48세에 1983년 율리스 나르당을 인수하여 본격적인 시계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중국과 인도에 익숙했던 쉬나이더는 인구가 많은 이 지역에서 수리가 어려운 쿼츠 시계보다는 시계방에서 수리가 가능한 기계식 시계를 선호한다는 것에서 기계식 시계가 부활할 가능성을 느꼈다고 한다.
율리스 나르당은 그 무렵 회사의 대표 제품인 마린 크로노미터를 제조하고 수리하기 위해 시계 기술자 한 명만 남은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스위스 시계 업계의 현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1970년대 말부터 시계 브랜드들에서 근무하던 시계기술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되어 1980년대 중반까지 기계식 시계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던 시기였던 것이다. 여러 스위스 회사들에 다이얼과 시계 케이스를 공급하던 쉬나이더는 컴플리케이션이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존에는 없던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율리스 나르당의 계약직 직원으로 스위스의 전통기술자들에 익숙하던 장-자크 할디만의 추천을 받아 루체른을 방문하게 된다. 루체른에 스포에링이라는 나이 든 기술자가 새로운 투루비용을 개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스포에링의 공방을 방문하여 컴플리케이션 개발에 대해 상담하러 방문했던 쉬나이더는 공방에서 신기하게 생긴 대형 천문 클럭을 발견하게 된다.
클럭에는 '아스트롤라븀(Astrlabium)'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유럽의 교회에서나 보던 천문시계에 흥미를 느낀 쉬나이더는 그 시계를 제작한 사람에 대해 물어보게 되고, 스포에링은 자신에게 시계 기술을 배우고 있는 루드비히 외슬린을 소개해 주게 된다. 당시 베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천문 클럭을 개발하던 외슬린과 3주 후에 만나게 된 쉬나이더는 외슬린에게 천문 클럭을 손목시계로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묻게 된다. 다소 황당한 질문에 외슬린은 '만들 수 있긴 한데 그렇게 작은 걸 누가 삽니까?'하고 되묻게 된다. 쉬나이더는 '내가 사겠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루드윅 외슬린(1952~ )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역사학자이자 시계 기술자이다. 이태리에서 태어나 1972년 그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고대 역사와 철학에 대한 인문학을 전공하여며 1976년에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러나 외슬린은 졸업과 함께 공부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학업을 계속하기에는 재능이 부족하게 느껴졌고 과연 학업을 계속해서 학자로 먹고사는 일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보다는 기술을 배워 먹고살기로 결정하고 일대의 시계 샵들을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수습 기술자로 근무를 시작하는 것이 16세 정도라 24살이었던 그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루체른에 위치한 스푀링의 공방에서 자리를 구하게 된 외슬린은 스푀링으로부터 클럭을 제조하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한편 시계 기술을 배우면서 학문적 호기심도 생긴 외슬린은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저녁이면 시계 공방에서 클럭을 수리하는 일을 하게 된다.
1979년 그는 로마 바티칸 도서관에 전시된 천문시계를 수리할 사람을 찾는 것을 알게 되어 로마로 간다. 1982년까지 진행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외슬린은 도서관에서 천문시계에 대해 상세히 공부하게 된다. 그리고 1983년 스위스로 돌아온 외슬린은 천문 시계의 역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로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푀링의 공방에서 천문시계의 기본이 되는 아스트롤라븀 클럭을 만들고 있었고, 율리스 나르당의 새로운 등장을 알릴 컴플리케이션의 아이디어를 찾아 스푀링의 공방을 방문했던 쉬나이더가 보게 된 것이다. 투루비용을 첫 제품으로 생각하던 쉬나이더는 외슬린이 스탠딩 클럭으로 만든 천문시계를 보자마자 이를 손목시계로 축소하여 손목시계에서는 등장한 것이 없는 천문시계를 컴플리케이션으로 발표하게 된 것이다.
1985년 외슬린이 자신이 설계한 클럭을 손목시계로 축소한 '아스트롤라븀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발표된다. 기존의 컴플리케이션과 전혀 다른 태양계의 행성들의 움직임을 다이얼에 재현한 독특한 시계였다. 이 시계는 기네스북에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로 등재되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상업적 성공에 힘 입어 외슬린은 율리스 나르당에서 기술고문으로 일하며 1989년 플라네타리움 코페르니쿠스, 1992년 '텔루리움 요하네스 케플러'의 '천문시계 삼부작'(Trilogy of Time)이 완성된다.
이 무렵 외슬린은 스푀링과 함께 독일의 시계 리테일러인 튈러의 의뢰를 받아 튈러의 상점에 전시할 천문 클럭을 만들게 된다. 1986년부터 10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외슬린이 스푀링에게서 시계 수리를 배우면서 천문시계의 대가로 성장한 후 스푀링과 함께 손목시계로는 표현할 수 없는 천문시계를 클럭으로 표현한 중요한 작품이다.
외슬린이 튈러의 천문 클럭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율리스 나르당의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쉬나이더는 1986년 젊은 크리스토퍼 클라레를 만나게 된다. 당시 미니츠 리피터 회중시계를 전시하고 있던 클라레에게 쉬나이더는 이태리 '산 마르코 성당'의 자크마트를 다이얼에 설치하는 미니츠 리피터 무브먼트를 의뢰하게 된다. 클라레는 20개의 주문을 받자, 오데마 피게를 그만두고 개업하여 자금에 어려움을 겪던 르노 & 파피를 찾아가 셋이서 CRP를 설립하여 1989년까지 율리스 나르당에서 주문한 물량을 제조하게 된다. 르노&파피에서 IWC의 의뢰를 받고 미니츠 리피터 모듈이 개발되던 시기이다. 이후 클라레는 르노&파피를 떠나 자신의 공방을 설립하게 된다.
자크마트(jaquemart)는 '종을 치는 인형'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교회의 대형 시계들에서 시보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 이를 인형의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장치였다. 쉬나이더는 산 마르코 대성당의 자크마트를 단순화하여 미니츠 리피터의 다이얼에 도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규모 브랜드로서 기존의 컴플리케이션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하여 기자들의 관심을 끄는 방식이 쉬나이더만의 독특한 마케팅이었다. 그 결과 1983년 율리스 나르당은 컴플리케이션 경쟁에서 오데마 피게, 파텍 필립, 블랑팡, IWC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타입의 컴플리케이션을 발표하며 시계 잡지들과 리테일러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천문시계 삼부작과 자크마트 미니츠 리피터가 보여주듯이 쉬나이더는 다이얼을 통해 시각적으로 컴플리케이션을 보여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다. 1996년 율리스 나르당의 창업 150주년을 기념하여 크라운 하나로 설정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기능적인 퍼페츄얼 캘린더를 발표하며 시계의 이름으로 외슬린의 이름인 '루드비히'로 명명하게 된다. 퍼페츄얼 캘린더의 기능 중 날자를 표시하는 모든 기능을 디지털 방식의 작은 창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그 때문에 퍼페츄얼 캘린더로서는 다이얼상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일견 평범한 타임 온리 시계처럼 보이는 시계이다. 시계의 이름인 '퍼페츄얼 루드비히'는 외슬린의 이름을 시계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쉬나이더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시계를 출시한 적이 없다.
율리스 나르당과 외슬린의 협동 작업은 2001년 프리크(Freak)의 발표로 정점을 이루게 된다. 기존의 이스케이프먼트 케이지만 회전하는 투루비용과 달리 시계의 무브먼트가 12시간에 한 번 회전하는 시곗바늘로 표현된 새로운 개념의 투루비용이었다.
한편 1983년부터 율리스 나르당의 기술고문으로 일을 시작한 후에도 외슬린은 스위스 대학들에 강의를 다니면서도 마스터 와치메이커 자격을 얻기 위한 공부를 계속하여 1993년에는 마스터 와치 메이커 자격도 획득하게 된다. 외슬린이 율리스 나르당을 떠난 것은 쉬나이더가 죽은 2011년이었다. 외슬린은 2011년 개관한 라쇼드퐁의 시계박물관의 큐레이터로 3년간 근무하며 MIH 등 다양한 시계 사업에 참여하게 되며, 2006년 아들과 함께 창업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쉬나이더가 75세로 죽자 그의 두 번째 아내였던 말레이시아 출신의 차이 쉬나이더는 3년 후인 2014년 율리스 나르당을 구찌 그룹에 매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