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DO의 회장이었던 알베르 켁과 LMH의 사장인 블륌레인은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를 인수했지만 독일인들이다. 두 사람 모두 독일의 국립 시계 학교 출신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 시계 학교의 교수 중 동독의 글라슈테에서 시계 기술을 배웠던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학교 수업 중 동독 글라슈테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을 것이다. 2차 대전으로 패망한 독일인들의 입장에서도 독일의 자긍심을 일깨워 이를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할 생각도 작용했을 것이다.
자국에 일정 규모의 시장을 확보하는 것은 세이코와 시티즌에서 보듯이 브랜드를 위기상황에서 보호하여 호황기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20세기에 모든 스위스 브랜드들이 경쟁이 심한 유럽을 벗어나 미국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월쌈, 엘진, 블로바, 타이멕스 같은 미국 태생의 브랜드들인 것이다. 소비자들의 애국심 외에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각 나라의 보수적인 정책이 자국 브랜드의 방패막이되어주는 것이다. IWC는 독일어권의 시계회사이지만 스위스 브랜드였다.
1980년대 독일은 대중적인 시계를 판매하는 융한스, 중급 시계를 판매하는 Sinn, Hanhart 등의 소규모 브랜드는 있었지만 초고가의 하이엔드 시계를 만드는 브랜드는 전무했던 것이다. 자국 시장은 작고 경쟁업체가 난립하는 스위스보다는 독일 시장을 겨냥한 하이엔드 브랜드를 론칭하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도전이었다.
Lange & Sohnne
1945년 세계 2차 대전이 종전이 되자, 전범 국가인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어지게 된다. 독일의 고급 시계 생산지였던 글라슈테는 동독에 속하게 되었다. 16살에 강제 동원되어 2차 대전 참전했다가 다리 관통상을 입고 글라슈테로 돌아왔던 랑게의 4대째 후손인 Walter Lange(1924-2017)는 랑게의 공장을 재건하려다 사유재산의 국유화에 저항하다가 우라늄 광산의 노동자로 갈 것을 명령받게 된다. 우라늄 광산에 가는 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느낀 Walter Lange는 1948년 글라슈테를 떠나 서독의 시계 중심지인 블랙 포리스트로 탈출한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도 글라슈테를 탈출하여 합류하여 랑에 가문은 2차 대전 후 서독으로 이주하게 된다.
한편, 1951년 동독의 공산정권은 글라슈테 지역의 유명한 7개의 시계 회사들을 통합하여 Glashutte Original(GO)의 전신인 V.E.B.라는 국영 시계 회사를 만들게 되면서 랑에를 포함한 글라슈테의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계 회사들이 모두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989년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브의 글라노스트 정책에 따라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는 이벤트와 함께 동독과 서독이 통합되었다. 블랙 포리스트에서 시계 판매업으로 살아가던 발터 랑에는 66세로 이미 은퇴한 상태였다. 통독이 이루어지자 마자 발터 랑에는 글라슈테로 돌아온다. 예전의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던 중 VDO의 블뤼레인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랑에의 재건 작업은 MHN의 자금 지원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되었다.
1989년 11월 블럼레인은 모그룹인 VDO의 합동 이사회를 열어 랑에를 재건에 투자하는 계획을 보고하게 된다. 이때 그룹 이사회 회장이 알베르 켁이었다. 블륌레인이 MHN의 사장으로 취임한 후 적자이던 회사들이 이익을 내며 흑자로 전환된 것에 만족해하던 알베르 켁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블륌레인은 이사회의 승인을 받는다. 그 직후 블륌레인은 발터 랑게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 결과로 1990년 11월 29일 프랑크프르트의 공증인실에서 발터 랑에와 불륌레인은 랑에 설립에 대한 계약서에 사인하게 된다. 이어, Adolph Lange에 의해 1845년 설립된 지 꼭 145주년이 되는 12월 7일 'Lange-Uhren GmbH'를 드레스덴 지역 재판소에 등기하고, "A. Lange & Sohne"라는 상표를 등록함으로써 5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랑게의 재건 작업이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발터 랑에와 블럼레인은 랑에의 옛 공장을 인수하여 랑에를 출범시킬 생각이었지만 아직 사유화되지 않고 GUB의 공장으로 사용되는 상황이어서 여의치 않게 되자 인근의 Strasser & Rohde를 인수하여 랑에의 새로운 회사로 사용하게 된다. 이어 글라슈트의 전통적인 시계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을 모집하지만 오랫동안 동독에서 살아온 기술자들은 서독으로 탈출했다가 복귀한 발터 랑에와 자본주의 회사인 VDO의 랑에 창업에 부정적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48명의 기술자들이 랑에의 재건에 참여했다.
블륌레인은 랑에의 재건작업에 참여한 기술자들을 샤프하우젠의 IWC로 보내 최신의 기술들을 배우게 한다. 스위스의 독일어권 회사인 IWC는 기술감독인 커트 클라우스를 중심으로 랑에의 무브먼트 및 신제품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블륌레인은 과거의 글라슈트의 회중시계의 전통을 되살리면서 최신의 장비를 이용하여 랑에 내에서 밸런스 스프링까지 새로 만드는 방식으로 파텍 필립과 경쟁할 독일의 최상급 시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정하게 된다. 계획이 점차 확장되면서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수백만 마르크가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으로 확장되었다. 통독후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던 시계 기술자들은 글라슈테 지역에 남아 랑에에 취업하면서 1994년 랑에는 직원 700명의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낸 발터 랑에와 블륌레인은 글라슈테로부터 수많은 표창장과 훈장을 받으며 글라슈테의 부흥에 기여한 인물들로 남게 되었다.
랑게의 손목시계는 하나씩 연구되고 발표된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별로 별도의 팀에 의해 다양한 무브와 시계의 디자인에 대한 연구가 독립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4년 후에 발표되는 Lange one의 무브먼트인 L901, Tourbillon의 무브먼트인 L902, Arcade의 무브먼트인 L911 등이 처음부터 동시에 착수되었다. 랑게의 무브먼트 넘버의 앞의 두자라 숫자는 무브먼트 개발에 착수한 해를 표시한다. 이렇게 3년 이상을 투자하여 글라슈테의 전통에 따라 3/4 플레이트의 디자인과 고전적인 스완넥 레귤레이터와 문양이 조각된 콕을 사용하는 고풍스러운 수동 무브먼트가 탄생하게 된다.
대표 모델로 새로운 랑에를 상징하는 모델이 'Lange one'이었다. 투루비용을 제외한 다른 3개의 모델은 모두 2개의 날자창을 가진 것이 특징이었다. 이 기술은 JLC의 재건을 위해 연구되던 기술이었으나 글라슈테의 성당에 설치되어 있던 랑에가 만든 시계의 디자인에 착안하여 랑에의 첫 시계들에 채용되게 되었다.
1994년 10월 24일 100여 명의 시계 관련 잡지 기자들과 주요 딜러들을 초청하여 드레스덴의 옛 궁전에서 50여 년간 완전히 잊혔던 랑게의 시계 발표회가 열리게 된다. 4년간 연구 개발된 4개의 모델이 동시에 발표되었다. Lange one, Lange Tourbillon, Saxonia와 Arcade의 4개 모델이었다. 기자들 외에 리테일러들도 참석했으며 당일 첫 물량으로 준비한 123개의 시계들이 모두 완판 되며 새롭게 등장한 랑에는 전 세계의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호평을 받게 된다.
기계식 시계가 럭셔리 제품으로 완벽히 복귀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인하우스 무브먼트 논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고, 하이엔드 시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필수적인 시절이었다. 랑에는 그런 논쟁을 즐기던 시계 컬렉터며 마니아들에게 가장 완벽한 하이엔드 시계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랑에의 새로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계로 인정되는 것이 1999년 바젤 페어에서 발표되었던 다토그래프이다. 파텍 필립, 롤렉스를 비롯하여 스위스의 하이엔드 브랜드에서도 소량만 생산하는 크로노그래프는 밸쥬나 레마니아에서 제조한 에보슈를 구입하여 해당 브랜드의 스펙에 맞도록 수정하여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랑에는 1940년대 론진 이후 처음으로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자체 개발하여 1999년 플레티늄 케이스에 검정 다이얼을 가진 '다토그래프'를 발표했다. 손목시계에서 처음 등장한 고전적인 3/4 플레이트 무브먼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랑에의 시계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 1999년 내내 모든 컬렉터와 마니아들은 이 시계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밸쥬나 레마니아가 아닌 하이엔드다운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가진 가장 인상적인 시계였고, 기계식 시계의 완벽한 부활을 알린 사건이었다.
다토그래프가 발표된 1999년은 랑에의 역사를 다시 한번 바꾸는 한 해가 되었다. 역사상 최대의 M&A로 자주 언급되는 영국의 보다폰과 독일의 만네스만 간의 합병이 만네스만의 허를 찌른 보다폰의 역공으로 보다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합병과정에서 LMH는 만네스만을 떠나 리치몬트에 매각된다. 1999년 부활에 성공하여 하이엔드 브랜드로 복귀한 IWC와 JLC에 이어 1994년에 등장하여 파텍 필립과 비교될 정도의 프레스티지를 얻었던 랑게를 보유한 LMH는 리치몬트 외에도 LVMH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리치몬트의 LMH인수
리치몬트의 LMH인수는 M&A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이자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진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까지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 기록으로 남아 있는 독일 만네스만과 영국 보다폰의 합병이다. 1999년 영국의 보다폰이 독일의 만네스만을 인수함으로써 통신회사인 보다폰에는 의미가 없는 LMH가 매각되게 된다. 1999년이면 IWC와 JLC는 매년 흑자를 기록하는 스위스의 대표적인 하이엔드 브랜드로 자리를 잡고 있었고, 랑에는 다토그래프로 주목을 받으며 파텍 필립과 경쟁하는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로 인정받던 시기였다.
LMH의 인수에는 LVMH 그룹, PPR 구찌 그룹 등이 경쟁을 벌이게 된다. 1996년 바쉐론 콘스탄틴을 인수하여 관심이 없어 보이던 리치몬트는 은연중 JLC의 지분 40%를 가진 오데마 피게에 접근하여 오데마 피게의 지분을 2억 8천만 스위스 프랑에 인수하는 것으로 은밀히 LMH의 인수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시계 브랜드 인수 역사상 최대의 금액인 28억 스위스 프랑에 LMH를 인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