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야거 르 쿨트르의 상황은 IWC보다 안 좋은 상태였다. 1868년 회사 창업 시부터 무브먼트와 함께 완성품 시계를 판매해왔던 IWC와 달리 Jaeger LeCoultre는 1833년의 창업연도와 무관하게 1905년 Jaeger와 만난 이후 비행기와 자동차의 계측기 등 무브먼트 사업 외에 정밀 카메라 개발 등 다른 일들을 벌이며 시계 브랜드로서의 시작은 IWC에 비해 출발이 늦었다. 시계 브랜드로서의 역사가 짧아지면 역사책에 등장하는 시계 모델이 적어지는 것이다. 시계 브랜드로서의 JLC의 역사는 Reverso와 함께 출발하게 된다. JLC의 역사에서 리베르소 모델이 중요한 이유이다.
1905년 항공기 계측기 메이커였던 에드몽 야거에 이어 1931년 인도에서 폴로 경기를 보며 리베르소를 착상했던 세사르 드 트레이(Cesar de Tery)와의 인연은 시계 역사에서 JLC가 등장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다. 1930년 트레이가 회전 가능한 시계에 대한 특허권을 인수하며 리베르소 개발의 시작이었다. 무브먼트를 제조할 수 없었던 트레이는 오랜 친구인 쟈크-데이비드를 만나 함께 리베르소를 개발하게 된다. 리베르소를 처음 개발했을 때 자체 판매보다는 시계 판매를 위해 무브먼트를 공급하던 파텍 필립, 카르티에 등을 찾아다녔다. 결국 하이엔드 메이커들이 수십 개만 주문하며 망설이자 자체 브랜드로 판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리베르소를 처음 발매할 때도 마땅한 상표가 없어서 'REVERSO'라는 시계 명칭을 브랜드로 사용할 정도로 Le Coultre는 소비자들에게는 낯선 브랜드였다. 그 결과 1931년 이후 1937년 Jaeger를 인수할 때까지는 항공기와 자동차 계기판에서 유명 브랜드였던 'Jaeger'의 브랜드로 시계를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케팅 부담이 큰 완성품 시계를 판매하는 대신 무브먼트 공급 등 최종 판매 회사의 하청 업체로 남는 것이 경제적 격변기에는 도리어 유리한 것이다. 스와치 그룹에서 무브먼트 제조 대기업인 ETA가 중요한 이유이다. 1983년 오메가의 SIHH와 합병할 당시에도 ETA S.A.는 흑자였다고 한다. 오메가 등 스위스 브랜드들을 살리기 위해 ETA가 희생한 합병이었던 것이다. 물론 완성품 브랜드에 납품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무브먼트 업체를 생각한다면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논리에 도달하게 된다. 스위스 브랜드와 무브먼트 공급업체의 공생을 위해 탄생한 것이 ETA를 기반으로 한 스와치 그룹의 역사인 것이다.
1833년 창업 이후 1937년까지 100년 이상 하이엔드 브랜드에 무브먼트 납품 업체였던 Le Coultre는 회중시계 시대에 대부분의 브랜드가 몰락했던 1차 대전과 대공황으로 이어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시기에 여기저기에 공장과 판매점이 생기자 'SAPIC'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하여 Jaeger의 시계 사업, 리버소를 개발한 트레이의 사업을 통합하게 된다. 그리고 한 동안 이들 업체의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합병 기업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 시기 자크-데이비드는 LeCoultre 가문의 흩어진 지분들을 모으고, 파텍 필립의 지분을 일부 구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1932년 파텍 필립의 인수전에 참여했다가 다이얼을 만들던 스턴 가문에 지게 된다. 하지만 스턴 가문이 파텍 필립을 인수하며 자체 무브먼트 개발을 시작하자, 1938년 바쉐론 콘스탄틴의 지분 일부를 인수하여 SAPIC에 합병함으로써 1965년까지 바쉐론 콘스탄틴과 한 가족이 되었다.
1930년대 이후 1970년대까지 제조된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들의 무브먼트는 대부분 JLC 무브먼트이다. JLC가 품질(무브먼트)에서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수준이면서 가격은 IWC와 롤렉스의 가격이라 가성비가 좋은 시계라는 명성을 얻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1850년대부터 파텍 필립에 무브먼트를 공급했던 LeCoultre는 1930년대부터는 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에 무브먼트를 공급하게 된다. 르 쿨트르가 '스위스 하이엔드 시계의 심장' 혹은 '와치메이커의 와치메이커'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1937년 Jaeger S.A.의 시계 부문과 통합하면서 Jaeger-LeCoultre가 만들어졌고, 이후 본격적인 시계 브랜드로 출발하며 다른 브랜드에는 없는 개성 있는 시계들을 발매하게 된다. 고급 무브먼트 납품 사업과 자체 브랜드의 시계를 판매하는 사업을 병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1년에 발매한 리버소의 인기로 JLC는 무브먼트 자체 개발 능력을 통해 다른 브랜드에서는 제조하기 어려운 틈새시장을 발굴하게 된다.
1951년에 등장한 벌케인(Valcain) 크리켓(cricket)에 자극을 받아 개발한 'Memovox', 자동 무브먼트와 함께 발표한 퓨처매틱 등이 개발되어 다른 브랜드와 차별화된 JLC의 개성적인 시계를 만들던 시기이다. 이후 자동 알람, 다이버 알람 등 알람시계는 리베르소(Reverso)와 함께 손목시계 역사에서 JLC만의 독보적인 분야로 남게 된다. 'Memovox'는 1956년 자동 모델로 발매되고, 1959년에는 'Deep Sea Alarm Automatic' 다이버 시계, 1965년에는 폴라리스(Polaris)로 출시된 JLC의 전성기에 판매된 대표적인 시계였다.
무브먼트와 각종 정밀 기계 제조 전문에서 시계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 JLC는 1948년 쟈크-데이비드 르 쿨트르가 죽자 서서히 내리막을 겪게 된다. 카르티에 형제들이 죽은 후 카르티에가 내리막 길을 걷다가 지분을 매각하고 결국 브랜드 전체가 남들의 손에 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다.
VDO가 인수한 JLC의 지분은 파베 로우바가 가지고 있던 SAPIC의 55% 지분이었다. VDO는 1978년 파베 로우바의 지분을 인수하자마자 바쉐론 콘스탄틴이 보유한 JLC의 지분 25%와 은행이 보유한 지분 20%를 전부 인수하게 된다. 그 후 르 쿨트르의 공장에서 제조하는 무브먼트에 의존하던 오데마 피게에 JLC의 지분 40%를 팔아 현금을 확보하게 된다. 즉, JLC는 VDO가 인수했을 때 지분 100%를 보유했던 IWC와 달리 VDO가 60%의 지분을 오데마 피게가 40%의 지분을 보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분 구조 외에도 IWC가 독일 국경에 위치하여 독일어를 사용하는 회사였고, JLC가 프랑스에 가까운 발레 드 쥬에 위치하여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회사였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JLC의 부활은 IWC에 비해 늦어지게 된다.
귄터 블륌레인은 JLC 인수 당시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뒤섞인 상태였다. JLC는 크리스천 디오르에 납품할 펜과 라이터 등의 럭셔리 제품들도 만들고 있었다. 물론 회사의 중심 사업은 무브먼트를 제조하는 것이었으나 중요한 것은 회사의 어느 부문도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렵 프랑스의 시계 브랜드인 예마(Yema)를 물려받았다가, 프랑스의 쿼츠 무브먼트 개발과정에서 경영에 어려움을 느끼고 1982년 예마(Yema)를 매각한 앙리-존 벨몽(Henri-John Belmont, 1934-2022)이 1985년 LMH에 입사하게 된다. 시계 업체를 운영한 경험을 가진 앙리-존 벨몽이 JLC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블륌레인과 함께 JLC를 시계 브랜드로 회생시키는 작업이 시작된다.
1978년 JLC를 인수한 VDO는 JLC가 파베 로우바에 인수되었던 시절인 1972년 이태리의 판매 대리점에서 JLC 공장에 남아 있던 200개의 케이스를 사용하여 발매되어 매진을 기록한 리베르소를 통해 재탄생했으나 품질 문제로 실패했던 리베르소를 1979년 바젤 페어에 출품하게 된다. 당시 JLC에서 개발한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한 쿼츠 시계였다. JLC의 리베르소의 개발이 지지부진하자 다른 소형 업체들에서 리베르소의 카피제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1974년의 재판매가 실패한 이유가 방수 문제였으므로 1981년에는 방수 기능을 가진 리버소의 케이스 개발이 JLC 내에서 진행되어 1985년에는 방수 기능을 가진 리버소가 개발된다.
이어 1986년 350개 한정판으로 메모복스 쥬빌리 모델로 판매한다. 그리고 1989년에는 IWC의 다빈치에 사용된 퍼페츄얼 캘린더를 채용하여 Grand Reveil가 발매된다. 태생이 무브먼트 공급업체였던 JLC는 IWC와 달리 다양한 무브먼트를 제조해 왔으므로 JLC의 부활은 IWC에 비해 늦었지만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1990년대 중반부터 논쟁의 중심이 된 인하우스 무브먼트 논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IWC의 컴플리케이션은 밸쥬 7750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하게 되어 결국 2000년대에 인하우스 무브먼트 개발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IWC 방식의 부활을 생각하던 귄터 블륌레인과 벨몽은 JLC를 시계 브랜드로 정착시키기 위해 리버소를 대표 상품으로 선정하게 된다. 1985년에 시작되어 1993년까지 진행된 IWC의 컴플리케이션 모델들의 성공에 착안하여 1980년대말 JLC도 리버소의 컴플리케이션 모델들을 준비하게 된다. ETA의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컴플리케이션을 개발한 IWC와 달리 JLC는 새로운 인하우스 무브먼트들을 개발하여 1991년 150 주년의 기념 모델을 시작으로 투루비용, 크로노그래프와 같은 컴플리케이션 리버소가 등장하게 된다. IWC 보다 몇 년 늦게 시작되었지만 JLC의 부활도 IWC와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던 것이다.
컴플리케이션 경쟁이 한창이던 1991년 만네스만이 VDO를 인수하게 된다. 만네스만은 귄터 블륌레인을 사장으로 유임시키며 그가 추진하던 사업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이 무렵 블륌레인은 IWC를 부활시키고, JLC를 무브먼트 제조 업체에서 시계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1991년 리버소가 성공한 후 1992년 블륌레인은 가장 기본적인 원형 시계 모델로 'Master Control'을 준비하도록 지시하게 된다. IWC의 성공에 이어 시계 브랜드 JLC의 부활이 어느 정도 확고해지기 시작한 1989년부터 블륌레인은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