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평 원룸에 집들이 오셔요
이사 온 집에는 전에 살던 집에는 없었던! 붙박이장이 있다. 쓰리도어에, 속옷이나 양말들을 넣을 수 있도록 슬라이딩 도어 수납도 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것도 2단으로. 1층에는 속옷을 정리하고, 다른 층에는 잠옷과 운동복을 정리해 넣었다. 나에겐 그 존재만으로 훌륭한 붙박이장이었다. 드디어 행거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절대*절대로 내가 가진 옷들을 다 넣을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 미니멀라이프를 외치며 품고 있던 많은 옷들을 버렸지만 그 옷들은 내가 수년간 입고 묵혀두었기에 버리기가 가능한 면이 있었고, 나는 나름(?) 옷을 좋아해 멀쩡한 옷은 없어도 가진 옷은 많았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사계절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이사오자마자 노린 것은 신발장이었다. 신발장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기 때문에 많은 물건을 수납할 수 있을뿐더러 칸칸이 나누어져 있어 내눈엔 더 완벽할 수가 없이 완벽한 옷장으로 보였다. 가지고 있던 옷장은 애초에 옷 수납용으로 디자인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니트들을 수납해 쓰긴 했지만 알맞지 않았다. 차곡차곡 쌓아서 정리도 해보고 돌돌 말아 옆으로 세워 세로로 수납하는 방법에도 도전했지만 니트 하나만 꺼내도 정리해 둔 모습이 다시 헝크러지기 일쑤였다. 꺼냈다 뺐다 출근 몇 번만 하면 발사직전의 수납장으로 변신했다.
그런데 신발장의 아주 아름답게 적정한 높이로 나누어져 있는 가로 칸칸이는, 남는 공간을 아끼려 너여섯장씩 쌓아 올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한 장의 니트를 꺼내면서 쌓은 옷들이 다시 흐트러질 일도 적었고, 몇 번째 칸에 어떤 니트가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다. 새 집이었기 때문에 신발장에 입는 옷을 수납하는 것에도 찝찝함도 적었다. 신발장 앞 현관에는 침대 옆에 두고 쓰던 협탁을 두었고, 그 협탁 위에서 택배를 개봉했다.(택배박스에는 벌레나 세균이 많다고 어디선가 보았다) 자주 신는 신발도 협탁 위에 두어 정리했고, 현관 바닥에 두는 신발은 분리수거용 혹은 편의점 산책용으로 신는 크록스 하나였다. 더 이상 예전처럼 신발장 밖으로 여러 신발이 꺼내져 있거나 뜯지 않은 택배박스, 쌓아둔 생수병들이 현관을 어지럽히게 두지 않았다. 가끔 내가 팬티차림으로 현관에서 신발장 문을 벌컥 열고 오늘 입을 옷을 고르고 있구나 •• 하는 인식만 감수할 수 있으면 아주 대만족인 정리였다.
이사 온 집에서 또 하나 내가 노린 것은 깨끗한 부엌이었다. 원룸은 말 그대로 원룸. 하나의 공간뿐이다. 어느 정도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거실과 침실, 주방의 구분이 적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통은 주방과 화장실이 있기 때문에, 집의 첫인상 일 수도 있는 주방을 나는 늘 깨끗이 하고 싶었다. 이사를 준비하며 내 자신이 무언가 차곡차곡 바르게 정리하는 것에 매우 취약한 사람임을 깨달았기에, 이제 나에게 깨끗한 정리라는 것은 “아주 깨끗하게 물건을 안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원한 것은 식기건조대를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설거지도 귀찮은데 건조대 위에 말려둘 그릇의 위치까지 생각해 가며 보기 좋게 설거지하는 것은 더 귀찮았다. 저녁밥을 해 먹고 나면 늘 건조대 위에 씻고 난 그릇들이 어지러이 쌓였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침대를 놓은 위치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침대에 누워 고개를 벽 반대쪽으로 돌리면 사용하던 실리콘 건조대 위에 쌓인 그릇들이 시선에 밟혔다. 그 그릇들과 벽면한쪽을 채운 행거를 바라보며 늘 정리되지 않은 듯한 집 안에서 매일을 잠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사 후에는 건조대를 아예 수납장 안에 넣어버리는 것을 계획했었다. 굳이 식기를 밖에서 꺼내 말려야 하나 싶었다. 수납장 안에 건조대를 넣고 수납장 문을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물기를 말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다 말린 후에는 수납장 문을 닫아버리면 보이지도 않고 다음 식사준비를 할 때도 구태여 꺼내 정리할 필요도 없으니 귀찮음도 적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이사 온 5.7평의 원룸 주방에는 슬라이딩 도어 수납공간 하나가 없어 이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보통은 주방의 슬라이딩 도어 수납공간에 자주 꺼내는 수저류들을 정리해 두거나 혹은 위생팩, 더 대단한 집은 냄비나 프라이팬까지 세로 수납을 한다. 그러나 이 집에서는 그것들이 다 모두 그림의 떡이었다. 나는 매일 집밥을 해 먹었기 때문에 이미 가지고 있는 주방용품들과 상온에 두고 사용하는 기름이나 간장류들을 한가득 가지고 있었는데 새로 온 원룸의 주방의 수납공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가지고 있는 것들도 겨우 채워 넣은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식기건조대에게 내어줄 수납공간은 없었다.
개수대도 손 두 뼘 정도의 크기였으니 개수대에 걸어 사용하는 건조대도 사치로 보였다. 사용하던 실리콘 건조대는 다 펼쳐 사용할 수도 없는 정말 쁘띠쁘띠한 사이즈의 개수대였다. 대안을 찾으려 이케아나 자주 같은 생활용품 사이트에 들어가 사용가능해 보이는 식기 건조대를 찾았지만 딱 이거다! 하고 꽂히는 물건이 없었다. 일단 건조는 해야 하니 가지고 있던 실리콘 건조대를 가져와 두었다. 펼칠 수 없는 부분은 그냥 한마디 정도 접어서 두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말 마음에 들었다! 쁘띠쁘띠 개수대를 많이 침범하지도 않을뿐더러,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건조대가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침대에 누워서는 수납코너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 새로운 물건을 늘리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내가 가진 물건이 내게 가장 좋은 것이었구나 하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주방 하이라이트 밑에 세탁기가 있다. 오피스텔에는 베란다가 없기 때문에 주방에 세탁기가 있는 인테리어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전 집에서는 베란다에 통돌이형 아기전용 세탁기를 두고 사용했다. 또 세탁기 놓는 위치 위로 수납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누가 봐도 “이곳에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두고 사용하시오”라는 공간이 있었다. 아기전용 세탁기라서 알림이 울리면 섬유유연제를 넣으러 다시 베란다에 나가야 했지만, 소량 세탁이 가능해 세탁이 빨리 끝나 나는 그것에 아주 만족했다.
그러나 아기전용 세탁기이다 보니 당근마켓에 내놔도 팔리지를 않아 이사를 준비하며 가장 애를 먹은 물건이었다. 다른 사람이 쓰던 걸 아기에게 사용할 엄마는 없었고 은근히 좋은 세탁기들이 중고로 많이 올라왔다. 결국 가격을 후두려쳐 이사 전날 가져간다는 분을 만나 아빠까지 불러 세탁기를 문밖에 꺼내두었는데, 거래당일 아침 물건을 가져간다는 구매자는 밤이 되도록 잠수를 탔다. 혹시나 말없이 가져갔을까 몇 번이고 현관문을 열고 닫으며 확인했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자정 무렵 새로운 구매자를 찾으려 했을 때야 구매자에게 죄송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렇게 이삿날 아침에 역경을 딛고 디뎌 처분한 애증의 세탁기였다.
이사 온 집에서 나는 생전 처음으로 드럼 세탁기를 가졌다. 옵션이었기 때문에 내가 새로 살 필요도, 나중에 처분하거나 다시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야호! 그러나 이미 주방의 수납공간은 주방의 물건들로 포화상태였다는 것. 나에게 등장한 새로운 문제는 드럼세탁기는 가졌지만, 세탁세제를 정리해 둘 수납공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2리터 3리터짜리 커다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액체세제는 주방에 수납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베란다에 둘까 했지만 세탁기는 주방에, 세탁세제는 베란다에 있게 되는 동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민을 하다가 액체세제는 무겁디 무거워 그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참에 잘 됐다 싶었다. 그전부터 나는 뚜껑을 돌려서 열고 닫는 것도 귀찮아 용기채로 세탁기에 붓기가 일쑤였고, 늘 그럴 때마다 입구에 묻은 세제가 쪼르르 용기 밖으로 흘렀다. 그 향은 어찌나 강한지 소량이어도 향기가 엄청 나 왠지 초강력 인조 성분들로 만들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분명해보였다.
이별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쉬웠다. 제로웨이스트에 관련된 책에서 본 종이시트 세제를 기억하고 있어서 바로 이것을 대체품으로 사용하면 되겠다고 떠올렸다. 책에서 본 종이시트 세제는 콤팩트한 사각형 종이박스에 들어 있어 플라스틱 용기처럼 부피가 커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아 보였고, 액체가 줄줄 흐를 일도 없으니 끈적끈적할 일 없이 깔끔한 사용이 가능했다. 이미 나는 이사를 준비하며 각종 디퓨저와 바디로션을 버렸는데, 이 과정에서 용기에 든 액체류들을 극혐 하는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액체세제와의 이별을 더욱더 결심했다.
그럼 이제 세탁세제를 어디야 두어야 좋을까. 보통의 신발장이 그렇듯이 우리 집 신발장에도 각종 공구 같은 것을 넣어두는 작은 슬라이딩 수납공간이 있었다. 그곳이 내가 세탁세제를 두기로 결정한 위치였다. 일단 세탁기와 현관 신발장은 한걸음 정도의 거리라 위치적으로 탁월했다. 세탁세제를 주방용품과 같이 두기에도 뭔가 분류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이 곳에 둔다면 그 점도 극복 가능했다. 밖에다 따로 꺼내두고 사용하는 경우라면 파랑 빨강으로 프린트되어있는 용기들 때문에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적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또 그 물건을 올려둘 다른 물건을 구입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수납공간의 깊이도 꽤 깊어 세제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것 같았다. 생각한대로 척척 흘러가니 마음에 술술 들었다.
그러다 이사 후 사용하기로 맘먹은 천연수세미를 사려고 사이트에 들어갔다가(천연수세미도 위에서 언급한 제로웨이스트에 관련된 책에서 보았다.) “고체세탁세제“라는 것도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체세제는 동전처럼 생겼는데 빨랫감과 함께 넣기만 하면 되었다. 이 역시 네모난 종이포장재에 담겨 있어 공간을 차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놈의 플라스틱 용기를 수십 번 헹궈서 버려야 하는 고통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다. 종이시트 세탁세제와 같은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다.
설명에 의하면 3kg 기준 1개의 고체세제를 사용하라는데, 그 정도의 빨랫감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1인가구라 빨래가 많지 않았고, 가지고 있는 빨래바구니도 크지가 않아 며칠이 지나면 수북이 쌓이기 때문에 그때끄때 조금씩 세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1개의 고체세제를 칼 손잡이를 이용해 2-3조각으로 부셔서 그 조각조각을 사용했다. 세탁도 문제없이 아주 잘 되었다.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언젠가 날 잡아서 다 부셔놓을테야 마음을 먹다가 드디어 해냈다. 입 심심용으로 먹는 검정콩이 든 용기가 열고 닫기 편해 그 용기에 담고 싶었지만 열심히 콩을 먹지 못해, 새로 산 면봉이 들어있던 플라스틱 용기에 세제 조각들을 옮겨 담았다. 환경을 위해 종이 포장재에 담아둔 고체세제를 굳이 플라스틱 용기에 옮겨 담고 말았지만, 종이포장재에 든 상태로는 조각난 세제를 꺼내기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끝은 이제 액체세제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액체세제는 무겁디 무겁고 내게는 내가 원하는 만큼 부어지지도 않는 버거운 물건! 이라는 결론이다.
여전히 이 집에는 대단한 가구나 그럴듯한 가전제품 하나가 없다. 누가 놀러와도 우와 - 하고 탄성을 지를만한 것도, 이게 뭐야? 하고 신기해할만 한 것도 없다. 예쁘게 꾸미고자 하는 욕심도 없고, 이제는 그냥 "잘 치우고 살자" 하는 마음으로 지냈다. 이 집이 어떻게 보일지가 아니라 이 집에서는 잘 살아보자 하는 마음을 먹으니,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내는 것으로 채워져갔다. 신발장에 옷을 넣고, 이따만한 실리콘 건조대를 한마디 접어 2/3만 사용하고, 동전만한 고체세제를 다 부셔서 사용하며. 내 멋대로일지라도 뚝딱뚝딱.
어쨌든, 살아보니 5.7평 원룸에도 살아는 진다. 내 마음대로 부실 건 부시면서 잘 지내고 있다. 아니 잘 지내보려고 이것저것 해보다 보니, 어느새 충분히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