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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리 May 27. 2023

8.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하루

1인가구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내가 지금 너랑 해외여행이나 다닐 때야?



또 모진 말이 나왔다. 유독 남자친구 앞에선 말들이 뇌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마음을 지나오기라도 한건지 의심스러운 말들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가 뱉음으로써 그 말들은 세상에 형체가 되어 우리 사이에 남았다.


가깝게 지낸 회사 동기들과 후배들이 우르르 결혼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결혼적령기를 지나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나 또한 그랬다는 것. 나와는 다르게, 그들에게 결혼은 인생의 짜여진 시간표처럼 땡땡땡 종이 울렸고 당연한 듯 시작되었다. 그들은 직장인에게는 유일무이한 5일짜리 휴가를 받을 예정으로 수개월전부터 각자 유럽이나 하와이로 신혼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오키나와에 가자고 했다. 남자친구와 나는 아직 결혼계획이 없었다. 그냥 남들이 부럽다고 솔직히 말하면 될 걸 모진 말을 뱉고서도, 되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남자친구가 미웠다. 오랜기간 함께 지내 익숙해진 탓인지 아끼고 아끼던 마음이 무뎌져 내 집에 들인 물건처럼 돌보려 애쓰지 않았다. 그해 모두가 신혼여행을 갔고 우리는 오키나와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코로나19가 번졌다.





그 해는 유독 남자친구와 다투는 일이 많았다. 한번 깨어진 조각처럼 조금만 힘을 주면 다시 어긋나버리는 관계였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 나는 마음껏 남자친구와 소리내 싸울 수도 펑펑 울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독립을 하기로 했다. 서른하고도 2/3를 넘은 나이와 엄마의 잔소리라는 명분이 있었다. 이따끔씩 엄마 아빠가 싸우는 소리도 듣기 싫었다. 나는 결혼만 하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십년동안 같이 살았으면서도 왜 때문에 서로에게 아직도 맞출 수 없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수십년을 함께 살아도 엄마 마음을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친구엄마는 친구한테 시집 가지말라고 눈물을 흘렸다는데 어째서 엄마는 나를 빨리 이 집에서 못 내보내서 안달이냐고, 내가 아무나한테 시집가면 엄마 속이 시원하겠냐고 독을 쏘고 집을 나갔다. 그래봤자 도망친 곳이 부모님집에서 지하철 1정거장에 버스 몇정거장 거리의 7평짜리 원룸이었다. 내가 가진 건 고작 그만한 용기와 그만한 현실이란 걸, 엄마 마음은 몰라도 그것만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첫 독립을 했고 남자친구와는 여느때처럼 다퉜다. 이제는 덩그러니 혼자 있는 집에서 인형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래도 외로운 마음이 가시는 건 아니었고, 엄마도 나처럼 혼자 외로운 건 아닌지 문득문득 생각했다.






나도 남들못지 않은 좋은 집을 가지면 돼.


엄마가 2만원 씩 넣어주던 주택청약통장에 600만 원이 채워지도록 나머지 금액을 불입했다. 첫 독립으로 인해, 나는 서울 소재 102 제곱미터의 아파트 청약을 신청할 수 있는 무주택 세대주가 되었다. 늦지 않게 청약광풍의 배에 무사히 탑승할 자격을 얻었고 그게 뭐라고 뿌듯해했다. 몇백대 몇천대 몇만대 일의 경쟁률의 아파트에 너나 없이 청약을 하던 시기였다. 나 또한 놓칠 순 없었다. 몇 해전 결혼한 동기는 결혼으로 집을 장만하였으니 이미 큰 부자가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로또를 쥔 사람처럼 뜬구름 같은 행운이 내게는 떨어질거라 기대하며 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모두가 선당후곰식의 청약을 했고 나에게 떨어진 로또아파트는 없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혼자 살아보는 것이었다. 인생의 첫 도전이었고 진짜 세상에 홀로 선 어른이 되는구나 했다. 유튜브의 일상브이로거들처럼 예쁜 공간에서 나만의 하루를 보내는 것을 꿈꾸었다. 두려움 보다는 설레임이 더 컸다.


딱히 어려운 것은 없었다. 고양시에 오래 살아온 터라 쉽게 고양시 소재 임대아파트를 구했고 월세부담도 적었다. 부모님 집에서 조금씩의 짐을 옮기면 됐고 필요한 물건은 돈주고 사면 됐다. 회사도 가까웠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해 집밥을 열심히 해먹었다. 늦은 밤에도 짜파게티를 끓여먹을 수도 있었고 더이상 엄마 취향의 마트표 이불에서 자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지만 쉬울 것도 없었다. 물이나 휴지를 사는 것에도 내 돈이 들었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분리수거가 세상에서 제일 귀찮다는 것을 알았고 과대포장된 택배박스를 뜯을 땐 짜증이 났다. 냉장고에 넣어둔 야채들에도 곰팡이가 생기는 걸 두눈으로 봤고 늘 치워도 보이는 머리카락 때문에 엄마가 내 방을 매일매일 청소했다는 것을 알았다.


초반에는 친구들도 초대하고 했는데 어느새 누구도 집에 들일 수 없게 되었다. 사계절이 지나니 집안의 물건이 순식간에 늘었기 때문이었다. 벽면에 설치한 행거에는 부피가 큰 겨울옷들이 걸리자 곧 무너질 듯이 여유가 없었다. 원룸이다보니 어느 시선에서나 눈에 걸렸다. 바닥에 내팽겨져있는 겨울니트들을 수납하느라 어쩔 수 없이 수납장 1개를 더 들였고 도저히 더위를 참을 수가 없어 이동식 에어컨을 샀다. 물건이 또 채워졌고 그만큼의 지낼 수 있는 공간이 줄었다. 가지고 싶은 옷들과 그릇, 책들도 샀다. 어느새부터 정리되지 않는 물건들 속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졌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새 청약광풍의 시대는 호로록 가버렸고 여전히 남자친구와의 결혼 계획은 없었다. 물건들로 너저분해진 집과 나를 돌보지 않는 나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대체 그 집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었던 걸까?



불과 몇주 전까지 살았던 집인데도 그 안의 나를 떠올릴 수도 없을 만큼 기억이 아득했다. 오래전 과거에 살았던 집처럼 느껴졌다.


집들이랍시고 친구를 초대해 퇴근 후에 까르보나라를 만들어줬었는데 자신이 없는 맛에도 친구는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그 친구가 선물한 무릎높이 만한 화분에 든 식물을 한달도 못가 죽이고 말았었다. 이 집을 떠날 때가 되서야 그 화분을 버려야 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남자친구의 생일에는 예쁜 파티를 해주고 싶어 컵케이크 모양의 생일 풍선을 불어 달았다. 그 앞에서 케잌을 들고 같이 사진을 찍었다. 며칠간 그대로 두었는데도 바람이 빠지지 않고 잘 붙어있었다. 오동통한 모습이 귀여워서 3년 내내 달고 인테리어 소품처럼 두고 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춰있는 듯 했다. 한번도 가구의 위치를 바꾸거나 물건의 위치를 바꾸지 않았다. 그냥 바꾸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두기로 했으니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고 물건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한번 들였으니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지고 싶은 물건을 가지게 되었으니 내게는 더 소중해져야 했는데 어째서인지 그걸로 끝인 관계였다.


내가 고민한 만큼 예쁘지 않거나 잘 사용되지 않는 물건들이 있다면, 그 물건에 대한 나의 선택이 틀렸음을 인정해야했는데 잘 숨겨두고 시선을 주지 않았고 다시 잘 사용해보려는 노력도, 버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물건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 물건들이 어느새 집안 구석구석에 정리된 듯 아닌 듯 자리를 점점 자리를 늘려가고 있었다. 물건 탓이 아니었다.


일상 브이로그 속에 보이는 모습들처럼, 예쁜 옷을 입고 하루를 시작해 예쁜 그릇들로 맛있는 음식을 해먹으면 그게 행복이고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서울로 출퇴근을 하면서부터는 그마저도 지켜낼 수 없게 되었고, 나는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고 싫기만 했다. 화장실 청소도 하고 맘 잡고 싹 분리수거도 하고 수납장 속 니트들도 새로운 방법으로 개어 정리했다. 나름의 결심과 노력도 해본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치운다 한들 며칠 뒤면 금방 또 지저분해질 것을 내심 알았다. 진짜 결심과 노력이 아니었다. 그런 하루들이 계속 되었다. 오늘 하루 열심히 살아보자 결심해도 내일이 그다지 기대가 되지 않는 매일이었다.






저 출퇴근이 너무 힘들어서 이사갔어요.



점심을 먹으며 만나는 주변 지인들에게 나의 이사 소식을 전했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이사라 들뜬 마음에 말을 꺼냈지만 주변 지인들은 나의 이사에 생각보다 관심이 없었다. 어 그래 잘됐네 ~ 라는 반응 정도가 평균이었다. 어쩌면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5.7평짜리 원룸에 산다는 사실에 마음을 조린 건 나 스스로뿐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어색했다.


이제 이사 온 작은 집에서의 내가 남았다. 평수를 줄여오는 이사를 준비하며 어쩔 수 없이 미니멀라이프 도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한 것들을 하고 있다. 그래봤자 입지 않고 박아두었던 옷이나 그릇들을 비우고 나의 취향인 아닌 향수들을 욕심내 사려고 하지 않고, 한 개의 로션과 한개의 샴푸, 한개의 바디워시만을 남기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열심히 사용하는 것이 전부이다. 거기에 조금의 정리를 더해, 사용한 물건은 원래 있던 자리에 두도록 하는 것, 테이블 위의 물건이나 개수대 위에 마른 그릇이 없도록 하고 퇴근 후엔 가방을 보이지 않는 옷장에 넣고, 옷장 안에 정리되지 않은 상태의 옷이 없도록 조금의 노력을 하는 것이다. 해야할 일이나 치워야할 것들이 눈에 밟혀 그 일로 버겁거나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다.


아주 작은 것들만을 결심하고 해내는 하루를 보내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몫만 잘해내고 싶어졌다. 흘러가는 일상이 아니라 아주 조금을 더 움직이고, 조금의 실천을 하고, 조금 더 나의 집과 하루에 마음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사 온 작은 집에서 온전한 하루를 보낸 것에 소중함을 느꼈다. 대단한 걸 하는 것이 아님에도 조금은 달라진 나로 살고 있다는 느낌만으로 충분했다. 자연스럽게 오늘 내가 해낸 것과 이룬 것에 감사했고, 그것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는지 스스로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했다. 내가 여기서 갑자기 더 좋은 집에 살게 되거나 갑자기 더 많은 물건을 가지게 된다 한들, 뿅하고 무지개빛 인생이 펼쳐지거나 내가 남들보다 백배천배 행복할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짧은 시간 안에 내뜻대로 이룰 수 없는 것들을 바라며 왜 나는 가지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탓하거나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하루를 잘 보내기로 했다. 그런 하루들이 알알이 모여 나를 지켜주기를 소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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