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훌륭하고 강력한 생명체가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자생하는 생명체.
니체는 그것이 건강한 생명체의 정의라고 설명한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며 동물은 다른 생물을 먹는다.
생명체는 주변의 환경을 극복하고 대상을 복속시키며 자신의 의지를 실현시켜 왔다.
생명의 핵심은 자기주장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19세기 유럽의 사람들이 점차 생명활동의 기초를 지탱하는 이것들을 점차 망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작금에는 세계인들의 병폐가 더 심해지고 있다고 보인다.
보통의 대한민국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절대 선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지배 아래 사회가 운영되는 것을 좋은 것이라고 취급한다.
난 이 민주주의라는 시스템이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말살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전 선동은 유용한 도구가 되었고 가스라이팅은 쉬워졌다.
민중은 진영화 되었고 자유주의적 의지보다는 집단화된 다수의 의지가 우선시 된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희생시키면서 사회가 조장한 논리에 순응하도록,
그를 통해 사상과 역사관에 맹목적 추종하도록 철저하게 조련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훌륭하고 강력한 생명체가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자생하는 생명체.
그러지 못하는 생명은 ‘죽은 생명체’라고 자유론에서 스튜어트 밀은 또한 이야기한다.
숨만 붙어 있는 것이지, 생명체가 자신의 에너지를 건강하게 분출하고 있는 상태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사유하고 스스로 극복하는 기초적 메커니즘이 인간 주체로부터 소거되었다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 죽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난 왜 살아가는 것인가,
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것인가.
난 요즘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에 골몰한다.
죽음 앞에서는 만물이 동일하다는 결론에 귀착할 때
정말 인생과 행복이 뭔가 하는 더욱더 고차원적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높은 자살률, 낮은 출산율, 최악의 행복지수.
돈, 아파트, 주식, 좋은 차, 비트코인.
29번의 탄핵과 뒤따른 계엄, 2번의 최고통치자 탄핵.
그저 부가 행복의 척도라고 맹신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조장된 정치행위에 부화뇌동하여 촛불 들고 노래 부르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신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찾지 못하면서 불행을 자처하고
오히려 주변의 더 큰 권력에 의존하고 집단활동에 매몰된다.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다.
타성에 젖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숨만 붙어있지, 영혼은 죽어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한 인간이 아니라고 일갈하며 인간이 끝없이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 이상주의적 목표를 제시한다.
그렇다.
그 유명한 니체의 ‘초인적 인간’.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며 이전의 자신을 뛰어넘어야 하는 존재이며, 인간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상태로 존재하며 만족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주체,
즉 ‘초인’ 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초인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은
근원적인 생명의 에너지가 충만한 존재이며, 자유를 중시하고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대부분 인간은 시스템에 길들여진 채,
소수의 정보전달자들로부터 정제된 뉴스를 맹신하고,
특정 역사관과 사상 등을 주입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다수가 생각하는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며 그것이 평화롭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대한민국이 경쟁사회라고 이야기하지만,
전교 1등이 무조건 의대 가고 90프로 이상이 대학교 가는 현 사회는 진정으로 스스로의 에너지를 자유롭게 발산하고 확립하기 위한 경쟁은 명백히 아니다.
오히려 기존 사회의 기준에 더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며 인형을 양산하는 경쟁이다.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며 생명의 에너지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너는 왜 독서실에 앉아있는가.
내가 왜 취업준비를 하고 있지? 남들이 다들 회사 다니니까?
‘순응적인 노력’.
춤추는걸 좋아했던 아이를 다시 독서실로 밀어 넣고,
축구를 잘하던 학생을 수학학원으로 보내는 대한민국 사회는 그 순응을 강박하고 있다.
니체는 19세기 민중들을 비판하면서 적어도 소수의 엘리트들만이라도 순응적인 시대적 분위기를 극복하고,
스스로 운명의 창조자가 되었으면 한다고 희망한다.
초인은 주변의 힘에 잡아먹히지 않고 오히려 주변의 다수와 대결하며 자신의 힘을 입증한다.
요즘 주변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면 항상 듣는 대답이 있다.
‘아니 주변사람들한테 물어봐바. 다 그렇게 생각하지.’
이 대답에 나의 대답은 항상 같을 것이다.
‘난 다수가 아니라 오직 ‘너’에게 ‘너’의 견해를 묻고 싶은 거야’.
이상,
‘너’는 초인인가.
아니면 시스템과 정치논리에 굴종하는 인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