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뱀의 허물, 너구리의 장난 그리고 부엉이의 기록
금령과 은서가 부름을 보냈을 때,
모든 동물들이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허물을 벗는 중이었고,
어떤 이는 장난 속에 진심을 숨기고 있었으며,
어떤 이는 날지 않고, 그저 기록하고 있었다.
이 외전은
부름에 응하지 못한 존재들의 이야기다.
도망이 아니라 변화의 지연,
외면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참여에 대한 기록이다.
비가 오기 직전의 숲은 항상 부산했다.
젖지도 않았고, 완전히 마르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
공기는 무거웠고, 모든 생명은 저마다의 속도로
그 무게를 견디고 있었다.
너구리는 그 틈을 좋아했다.
아무도 아직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순간,
웃음 하나면 분위기를 넘길 수 있는 시간.
너구리는 늘 그 경계에서 살아왔다.
그날도 너구리는
뱀이 지나간 자리에 남긴 허물을 발견하고
익숙한 말투로 한마디를 얹었다.
“이야, 이건 뭐야.”
“뭘 지우려고 이 옷은 버리고 간 거야?”
“때를 민 거야, 아니면 네 과거를 지우려는 거야?”
너구리는 허물 끝을 살짝 들어 흔들어 보였다.
장난은 늘 먼저 손이 갔다.
그때 풀숲이 조용히 갈라졌다.
뱀이 고개를 들었다.
“웃을 일은 아니다.”
너구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에이, 너무 심각해.”
“다들 한 번쯤은 벗고 다시 시작하는 거지.”
뱀은 허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은 이미 과거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
“나는 남겨두고 갈 뿐이다.”
그 말은 변명이 아니었고, 다짐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에 가까웠다.
너구리는 괜한 웃음을 멈췄다.
허물을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그럼 저건 뭐야?”
“쓰레기야, 증거야?”
뱀은 잠시 몸을 말았다 풀며 생각했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빚이다.”
그 순간 바람이 멎었다.
숲이 숨을 고른 것처럼 고요해졌다.
그때,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엉이는 이미 그 자리에 있었다.
처음부터 모두를 보고 있었다.
너구리는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저기… 난 그냥 분위기 좀 풀려고—”
부엉이는 너구리를 보지 않았다.
허물과, 그 허물을 남긴 방향만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은 판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무거웠다.
뱀은 부엉이를 향해 고개를 낮췄다.
“이건 지워달라는 게 아니다.”
부엉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 짧은 순간, 너구리는 깨달았다.
자기가 웃음으로 덮어왔던 말들,
장난으로 흘려보냈던 선택들이
전부 저 허물처럼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주워 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웃고 넘겼다고 기록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부엉이는 큰 사건만 기록하지 않았다.
작은 새의 날갯짓, 바람을 가르다 멈추는 그 미세한 떨림과
풀숲 아래서 숨을 고르는 작은 쥐의 눈빛,
연못 속에서 방향을 바꾸는 작은 물고기들의 망설임까지
모두 같은 무게로 적고 있었다.
은서는 그 기록을 천천히 읽었다.
글자가 아니라 숨결처럼 남아 있는 흔적을.
부름에 오지 않은 이유는 늘 하나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지금 벗어야 할 허물 속에 있었고,
어떤 이는 움직이지 않음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어떤 이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숲의 균형을 떠받치고 있었다.
은서는 고개를 끄떡였다.
부름에 응하는 것만이 참여는 아니라는 것을.
이 숲은 모인 존재들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오지 못한 자리, 비워진 시간,
늦춰진 선택들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숲이 된다.
부엉이는 기록하고, 뱀은 남겨두고,
너구리는 흔들며 지나가고,
작은 생명들은 각자의 속도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
은서는 고개를 들고 숲을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앞서가는 자와 뒤처진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리듬으로 같은 생을 건너는 존재들만 있었다.
부름에 온 동물도, 오지 못한 동물도
결국은 같은 숲의 숨결 안에 있다.
그래서 이 숲은 기다리지도, 재촉하지도 않는다.
다만 서로의 자리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간다.
은서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는 이미 함께 살고 있었어.”
숲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작은 날개 하나가 다시 한번 공기를 흔들었다.
다음 최종회
K-Zodiac - 에필로그입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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