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자역학의 시선으로
양자역학은 어렵다, 그런데 사람은 더 어렵다.
‘사람은 빛을 닮았다’라는 말은, 자칫 사람을 거룩한 존재로 치켜세우는 선언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문장은 찬가라기보다, 모처럼 친구들과 나눈 대화 속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가르치는 사람조차도 끝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양자역학의 세계에, 이해하지 못한 채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그날의 화두는 양자역학이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지, 정작 이해하지 못한 채 이미 실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묘한지. 알지 못하면서 함께 살아간다는 점에서, 문득 이런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알겠느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전공은 제각각이었다. 물리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언어학자까지. 각자 서 있는 자리는 달랐지만, 양자역학이라는 주제 앞에서는 모두 비슷한 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 워낙 많은 이야기와 에피소드가 쌓인 분야였고, 세부는 달라도 핵심만큼은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관점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이해가 더 또렷해지기보다는 질문이 더 많아졌다. 그 수다의 한가운데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자의 수다
“사람들이 헷갈리는 건 이해가 안 돼서가 아니라, 직관이 안 맞아서야. 우리는 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본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양자역학은 말해. 보는 방식이 결과를 바꾼다고. 관측하지 않으면 상태는 정해지지 않아. 이게 제일 불편한 지점이지.”
수학자의 수다
“나는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문제라고 봐. 양자역학은 말로 설명하면 이상한데, 수식으로 쓰면 놀라울 만큼 잘 맞아떨어져.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건 개념이 아니라 번역이야. 확률, 벡터, 함수 공간 같은 것들은 직관이 아니라 구조로 이해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꾸 그림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양자역학은 느끼라고 만든 이론이 아니라, 계산하라고 만들어진 언어야.”
생물학자의 수다, 나도 끼어들었다.
“나한텐 그게 그렇게 낯설진 않아. 생명은 원래 고정된 게 아니거든. 환경이 바뀌면 유전자 발현도 달라지고, 같은 종이라도 조건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로 살아. 빛이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생명도 늘 상태로 존재하지, 결과로 존재하진 않아.”
심리학자의 수다
“사람 마음도 똑같아. 관찰받는 순간 행동이 바뀌잖아. 검사받을 때 점수가 달라지고, 누군가 지켜보면 말투도 달라지고. 그래서 나는 ‘객관적인 마음 상태’라는 말이 늘 의심스러워. 측정하는 순간, 이미 마음은 다른 상태가 되니까.”
언어학자의 수다
“나는 오히려 말이 문제라고 봐. 입자냐 파동이냐, 이런 구분 자체가 언어의 한계야. 우린 늘 명사로 세계를 고정시키려고 하지. 하지만 세계는 동사에 가까워. 빛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이름 붙이는 순간 이미 왜곡이 시작돼.”
각자의 말은 달랐지만, 묘하게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빛은 이상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단순했을 뿐이라는 점.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사람이 빛을 닮았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라, 어쩌면 설명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빛을 닮았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있을 때 서로 다른 모습으로 행동한다. 말의 속도와 높낮이가 달라지고, 옷차림과 표정, 몸짓 또한 상황에 따라 바뀐다. 혼잣말을 할 때의 목소리와 전화를 받을 때의 톤이 다른 것처럼, 우리는 관계에 따라 스스로를 조율하며 살아간다.
나는 이 차이를, 사람이 빛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빛의 성질을 규명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아주 유명한 양자역학 실험을 수행했다.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양자역학의 핵심 내용만을 간추려 살펴보고자 한다.
빛은 오랫동안 하나의 성질로 설명되기를 거부해 왔다. 고전 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으로 이해되었다. 물결처럼 퍼지고 서로 겹치며 간섭무늬를 만들어내는 성질은 파동의 전형적인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세기 초, 빛을 다루는 실험들은 이 단순한 이해에 균열을 일으켰다. 특정 조건에서 빛은 연속적으로 퍼지는 파동이 아니라, 잘게 나뉜 에너지의 묶음처럼 행동했다. 이 묶음은 오늘날 ‘광자’라 불리는 빛의 입자적 단위다.
전자는 이중 슬릿을 통과한 뒤, 관측이 없는 조건에서 전자는 파동처럼 퍼지며, 그 중첩이 스크린에 간섭무늬로 기록된다.
전자는 이중 슬릿을 통과한 뒤, 관측이 개입되면 간섭하지 않고 두 개의 자리로 스크린에 남는다.
이중슬릿 실험은 이 모순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빛을 두 개의 좁은 틈으로 통과시키면 스크린에는 파동이 겹쳐질 때만 나타나는 간섭무늬가 형성된다. 그러나 빛을 하나씩 아주 약하게 쏘아 보내면, 각 빛은 분명한 위치에 하나씩 도착한다. 마치 입자처럼 말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입자 하나하나가 쌓여 결국 파동의 간섭무늬를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양자역학은 이 모순을 억지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이 모순 자체를 빛의 본질로 받아들인다. 빛은 본래 입자이거나 파동인 것이 아니라, 관측되기 전에는 여러 가능성으로 퍼져 있는 파동함수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관측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가능성은 하나의 결과로 수축된다.
이 때문에 양자역학에서 ‘관찰’은 단순한 확인 행위가 아니다. 관찰은 현상을 드러내는 조건이며, 결과를 결정하는 사건이다. 빛은 측정이라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형태를 얻는다.
여기서 말하는 ‘관찰’은 눈으로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이란, 측정 장치를 통해 빛과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사건을 의미한다. 관측이 이루어지는 순간, 빛은 여러 가능성으로 열려 있던 상태에서 하나의 결과로 드러난다. 빛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방식이 결과를 만들어낸다.
결국 빛이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말은, 자연이 모순된 성질을 동시에 지닌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정된 분류와 언어가 자연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는 고백에 가깝다. 빛은 관측되기 전에는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 관측되는 순간 현실로 굳어진다. 양자역학은 이 과정을 통해, 세계가 이미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관찰 속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자역학은 먼 실험실의 이론이 아니라,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 병원의 영상 장비 안에서, 내비게이션의 정확한 위치 계산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결과 위에서 매일의 일상을 살아간다.
빛을 둘러싼 논쟁은 사실 하나의 질문을 두고 시대마다 다른 답을 붙여온 역사에 가깝다. 17세기에는 빛이 직선으로 날아가는 작은 알갱이처럼 보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빛을 입자로 이해했다. ¹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빛이 서로 겹치고 퍼지며 간섭무늬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빛은 파동으로 설명되기 시작했다. ² 그렇게 한동안 파동설은 빛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언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20세기 초, 빛이 에너지를 연속적으로 가 아니라 덩어리처럼 전달한다는 실험들이 등장하면서, 빛은 다시 입자의 얼굴을 드러냈다. ³
각주 )
1. 아이작 뉴턴, 빛의 입자설
2.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토머스 영, 오귀스탱 프레넬 — 빛의 파동설과 간섭 실험
3.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광전 효과와 광자 개념
이 서로 다른 설명들은 서로를 부정하기보다, 각 시대의 관찰 방식이 빛의 서로 다른 측면을 드러낸 결과에 가깝다. 양자역학은 이 충돌을 하나로 묶는다. 빛은 본래 입자이거나 파동인 것이 아니라, 관측되기 전에는 여러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중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람 역시 그렇다. 우리는 하나의 성격이나 본질로 고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선 아래 놓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는 존재다. 이는 이미 완성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맺음과 바라봄 속에서 계속 형성되어 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물리학자는 말한다. 세계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순간 선택되는 가능성의 한 단면이라고.
수학자는 말한다. 세계는 이해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작동하는 구조로 먼저 존재한다고.
생물학자는 말한다. 생명은 하나의 답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발현되는 상태라고.
심리학자는 말한다. 마음은 숨겨진 실체가 아니라, 관찰되는 순간 달라지는 반응의 패턴이라고.
언어학자는 말한다. 세계는 말로 붙잡히는 것이 아니라, 이름 붙이는 순간 잘려 나가는 흐름이라고.
이들은 서로 다른 학문을 말했지만, 모두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 바라보는 자리마다 다르게 드러날 뿐이라는 것." "사람은 빛을 닮았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고정된 성격이나 단일한 본질로 규정하려는 태도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사람은 관찰되기 전에는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 관계 속에서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사람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고, 불리고,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계속해서 형성된다. 그래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규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놓인 관계와 조건을 함께 살피는 일에 가깝다.
빛을 이해한 뒤에야, 사람을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었다. 사람을 이해하려 들수록 더 조심해져야 할 것은, 사람을 정의하는 순간 이미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사람을 하나의 유형이나 고정된 성향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이제마의 사상체질론이나 MBTI 같은 분류 체계가 사람을 이해하려는 하나의 언어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사람을 설명하는 최종 답이 될 수는 없다고 느낀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된 성질로 완성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적응해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오랜만에 참으로 길고 어려운 사유의 길을 걸었다. 빛을 이해하려다 보니,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의하는 일이 아니라, 그가 놓인 조건과 관계를 함께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는 것. 빛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듯, 사람 또한 쉽게 말해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