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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Aug 31. 2023

인간의 야만성, 폭력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소설 <파리대왕>의 등장인물 탐구


요즘 극악무도한 묻지 마 범죄들이 자주 발생해서 온 사회를 경악하게 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심보가 발동하면 그런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하는 것일까. 설령 욕구를 채웠다 하더라도, 그 후 본인이 당할 고통은 자신이 얻은 쾌락의 수십 수백 배 더 큰 고통이 아닌가. 타인이 받을 고통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 놓고 보더라도 얼마나 계산이 안 맞는 선택인가. 정신 이상 때문에 혹은 약물에 취해서 그랬다는 식으로 합리화하기에는 결과가 너무 참혹하다.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에 나오는 소년들도 이와 비슷한 선택과 행동을 하고 다. 무인도에 고립된 소년들은 문명과 동떨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이성을 잃어버리고 욕망에 집착하게 되는데,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쾌락만 좇는 점에서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광적으로 변질되는데 주동자가 되소년 잭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이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지 가늠해보고자 한다.





잭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문명 세계에 있을 때는 학교 성가대원의 리더가 될 만큼 모범적인 아이였던 잭이 어쩌다가 친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야만인으로 변하고 말았을까?


첫째, 잭은 우두머리가 되어 조직을 이끌고 싶어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핵전쟁을 피해 아이들을 싣고 가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폭파 직전 일부 아이들을 무인도에 내려주는데, 잭은 자신이 이끌던 성가대원 친구들과 함께 남겨지게 된다. 남겨진 무리 중에 자신을 이끌어줄 어른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잭은 대장이 되어 아이들을 이끌고 싶어 하지만, 소라를 불어 아이들을 소집한 랠프라는 이름의 키 크고 준수해 보이는 소년에게 대장 자리를 빼앗기고 만다. 이것은 잭에게 몹시 굴욕적인 일이었고, 잭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랠프가 성가대원들은 잭의 것이라며 성가대원들을 이끌라고 하자 그제야 겨우 만족한다.


둘째, 잭은 눈앞의 욕망에 집착한다.


대장 랠프와 잭, 사이먼은 함께 산꼭대기를 정찰하고 내려오는 길에 나무덩굴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멧돼지 새끼를 발견한다. 잭은 사냥하려고 즉시 칼을 빼드는데 차마 찌르지 못하고 머뭇대는 사이에 멧돼지 새끼가 도망가버린다. 난생처음으로 칼을 들고 피를 흘리게 만드는 살생을 해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감이 잭의 행동을 붙잡았던 것이다. 잭은 사냥 실패에 대한 굴욕감과 분노를 느낀다. 이후 잭은 멧돼지 사냥에 집착하면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데, 흰 찰흙, 붉은 찰흙, 숯막대기로 얼굴에 칠을 하고 자신의 본모습을 완전히 감춰버린다. 잭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춤을 추면서 스스로 사기를 북돋운다. 이때부터 잭은 분장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가면에 만족해하며, 이성과 교양을 갖춘 소년 잭이 아니라 칼과 창으로 짐승을 사정없이 죽일 수 있는 야만인의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다. 


셋째, 잭에게는 성가대원이라는 부하들이 있었다.


성가대원 친구들처럼 자기의 뜻을 따라주는 동료가 없었다면 잭이 그렇게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사람이 혼자일 때는 쉽사리 실행하지 못하는 일도 무리 지어 할 때에는 훨씬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있다. 잭의 성가대원들은 강압적인 잭의 방식을 불편해하면서도 대체로 그의 뜻에 따라줄 만큼 순종적이었다. 잭이 얼굴에 칠을 하면서 무자비한 야성을 드러냈을 때, 성가대원 아이들은 잭의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게 되었고, 그중 로저라는 아이는 나중에 잭 못지않은 잔인성을 드러낸다.


넷째, 잭은 무리의 대장이 된 랠프의 권위에 대해서는 쉽사리 도전하지 못한다.


잭은 선출된 대장인 랠프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처음 얼마 동안은 랠프가 이끄는 대로 따라주려고 노력한다. 한 번은 잭이 멧돼지 사냥을 하느라 구조를 위해 가장 중요한 장치인 산꼭대기의 봉화불을 꺼트리자 랠프가 그를 몹시 질책하는데, 잭은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사냥 성공을 칭찬하지 않는 랠프에 대한 불쾌감을 참아내느라 랠프 옆에서 참모 노릇을 하고 있는 돼지(별명)를 놀리고 비난하고 때리는 행동으로 분풀이한다. 이후로도 잭은 랠프에 대한 거부감을 돼지에게 종종 화풀이한다. 


다섯째, 사냥무리의 추장이 된 잭은 '구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


잭은 섬의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사냥한 멧돼지를 구워 고기파티를 연다. 첫 번째 고기파티를 할 때 랠프와 돼지가 찾아오자 고기를 먹게 해 주면서 의기양양해한다. 잭은 이후에도 사사건건 랠프와 부딪치는데, 나중에는 자신처럼 고기를 먹게 해주지 못하는 랠프의 무능을 비난하며 그를 대장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한다. 이것이 실패하자 잭은 자신에게 동조하는 아이들을 이끌고 무리를 떠난다. 이후 잭은 추장으로써 더욱 전열을 가다듬고 아이들을 재촉하여 멧돼지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행복한 표정으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암멧돼지를 잔인한 방법으로 사냥하는 데 성공한다. 잭은 암퇘지의 머리를 잘라 나무 막대기에 끼워 바위틈에 세워놓아 산꼭대기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괴물에게 바친다. 이후 잭과 무리들은 흥분한 상태로 고기 파티를 벌이면서 광란의 춤과 구호(짐승을 죽여라! 목을 따라. 피를 흘려라!)를 외쳐대는데, 번개가 치고 비가 세차게 내리는 중에 더욱 이상한 광기에 사로잡힌 무리는 사이먼이라고 하는 선량한 소년을 짐승으로 착각하여 집단 살인하는 비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고 만다. 이후 잭은 더 이상 구조도, 봉화도, 문명세계도 안중에 없게 된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섬의 지배자가 되는 것뿐이다.


여섯째, 잭의 광기는 멧돼지 사냥에서 인간 사냥으로 변질된다.


잭은 해변을 급습하여 섬에서 유일하게 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인 돼지의 안경을 빼앗는다. 안경이 없으면 앞을 거의 볼 수 없는 돼지를 위해 랠프는 안경을 돌려받기 위해 잭을 찾아간다. 잭은 자신의 영역에 랠프와 돼지가 들어오지 못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잭은 자기 앞에서 여전히 당당한 랠프와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돼지에게 분노하였고, 이에 맞추어 잭의 친구이자 부하였던 감시자 로저가 바위를 굴러 떨어뜨리자 돼지가 바위를 맞고 벼랑에 떨어져 죽고 만다. 잭과 부하들은 마지막 남은 적인 랠프에게 화살을 던져대는데, 랠프가 도망치자 잭은 마치 멧돼지 사냥을 하듯이 랠프를 몰아붙여 죽일 궁리를 한다. 도망친 랠프가 적이 찾아내기 어려운 곳에 숨자, 랠프를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 산에 불을 피운다. 그 불은 랠프를 숨은 곳에서 뛰쳐나오게 했지만 섬 전체로 번져서 엄청난 연기를 만든다. 랠프는 죽을힘을 다해 해변으로 달렸고 잭은 그 랠프를 잡아 죽이기 위해 쫓아가는데, 해변에서 기다리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그들을 구조하러 온 군인들과 구조선이었다. 잭이 랠프를 잡기 위해 놓은 산불의 연기가 구조선을 섬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거의 죽을 것처럼 도망치는 소년과, 그 뒤를 창을 들고 쫓고 있는 얼굴에 칠을 한 소년들의 모습을 본 해군장교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면서도 아이들의 전쟁놀이 정도로 치부하고 싶어 한다.


일곱째, 결국 잭은 섬의 대장이 되고 싶었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구조하러 온 해군장교가 무리의 대장이 누구냐고 묻자 랠프가 자신이라고 대답하는데, 그 뒤에 있던 잭은 대장이라고 나서려다가 그만둔다. 잔인하게 멧돼지를 사냥하고, 친구들을 사냥과 광기에 끌어들였으며, 결국 두 소년을 죽게 만들면서까지 섬의 대장 되고 싶었던 소년은 어른들의 세계이자 문명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되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상황이 종료되고 구조받게 된다는 것을 실감하자 랠프부터 시작해서 모든 아이들이 서럽게 울어댄다. 


이 아이들의 울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드디어 구출된다는 기쁨의 울음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경험하고 저질렀던 사건들에 대한 서러움과 참회의 울음일까. 잭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까? 추장으로 섬을 지배하며 살고 싶었던 잭에게는 너무 빠른 구조였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문명세계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섬에서 있었던 일은 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야만적인 행동과 친구를 죽이는 행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소년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무인도라는 극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사회는 그들에게 아무런 죄도 묻지 않고 품어줄 수 있을까? 소년들의 광기는 섬에 도사리고 있는 파리대왕이라는 악령에 사로잡혀서 저지른 짓들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니 섬을 벗어나면 모두 없었던 일이 되고 다시 문명의 일원이 되어 규칙을 잘 지키는 문명인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개인의 일탈과 집단의 일탈은 많은 온도차가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왜곡된 신념이나 욕망은 집단 전체를 악행을 일삼는 범죄자 소굴로 만들기도 하고, 혼자서 악을 저지를 때는 무고한 타인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파리대왕>의 소년들은 문명과 동떨어져 고립된 세상에서 악을 저지르지만, 단지 고립됐기 때문에 변질된 것은 아니다. 랠프를 비롯한 몇 명의 소년은 끝까지 문명인으로서의 원칙을 지키며 잭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잭 무리의 광기에 대적할만한 힘이 없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건, 억눌린 감정을 표출하기 위해서건, 무고한 타인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왜곡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 소설 <파리대왕>에서는 야만인이 되고 만 잭이 실체가 확인되지도 않은 괴물에게 바치는 암퇘지의 머리에 파리가 덕지덕지 달라붙어 그 살을 뜯어먹고 있는 모습을 '파리대왕'으로 칭하면서 악마의 원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정신이 굴복하고 마는 악마의 모습이 어쩌면 이런 파리대왕의 모습이 아닐까? 잭은 스스로 만들어낸 악마인 파리대왕에게 그 자신이 오히려 먹히고 만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은 인간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선의, 존중, 인내 등의 본성을 잃어버리고 악마에게 영혼을 먹힌 것처럼 욕망에만 집착하는 경우에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근원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스스로 던져버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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