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의 고리오 영감은 부성애의 끝판왕이라 할만하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사랑이 원칙 없이 맹목적일 때 얼마나 비참한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부모의 자식사랑이란 어때야 하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참고한 책은 <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박영근 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권>이다.
위 책 본문 121~125페이지에는 고리오 영감의일대기가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요약해 보자면,
장 조아솅 고리오는 프랑스 대혁명 전에는 단순한 제면 직공이었다. 1789년 첫 번째 폭동 때, 희생당한 주인의 자산을 샀고, 위험한 시절을 현명하게 처신하여 파리에서 곡물을 가지고 많은 돈을 벌었다. 곡물 사업에 있어서 만큼은 그는 일인자였다. 부유한 농부 집안의 딸이었던 아내와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나, 결혼 칠 년 만에 아내가 죽고 말았다. 주변의 상인들이 그에게 재혼을 권유했지만 그는 재혼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은 두 딸에게로 옮아갔다. 그는 두 딸을 교육시키는데 무리했다. 매년 육만 프랑 이상을 벌어들였지만, 딸들에게 승마를 시켰고 마차를 사주었다. 그는 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었고, 자신을 위해서는 일 년에 천이백 프랑 이상은 쓰지 않았다. 딸들은 아버지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결혼했다. 첫째 딸 아나스타지는 레스토 백작과 결혼하여 상류사회로 뛰어들었다. 둘째 딸 델핀은 돈을 좋아해서 독일 태생 은행가인 뉘싱겐과 결혼했고, 뉘싱겐은 신성로마제국의 남작이 되었다. 딸들과 사위들은 고리오가 제면업자로 계속 장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들의 끈질긴 간청으로 그는 제면업을 그만두었다. 두 딸은 결혼 후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잘 대해주었지만, 아버지가 상류 계층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반복하자 자기들의 집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찾아오지도 못하게 했다.
고리오 영감은 대략 이런 사연을 갖고 소설 속에 등장한다.
"내가 안 것은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잉여 인간이라는 사실이었어"(370p)
고리오 영감은 딸들이 자신을 창피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딸만 바라보고 산 아버지가 딸에게 버림받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리오는 사위들은 미워할지언정 딸들에 대해서는 더 해주고 싶어서 애달픈 마음을 계속 드러낸다. 딸이 보고 싶어서 딸이 지나가는 홀 근처에서 서성거리다가 한번 눈이라도 마주치면 감격해하는 모습은 맹목적인 자식사랑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상류사회에 물든 그의 두 딸은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면서도 그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할 만큼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 첫째 딸 아나스타지는 품위 유지를 위해 아버지의 고가 물건들을 다 팔게 만들었고, 둘째 딸 델핀도 지참금을 남편에게 빼앗겨버리고 생활비도 받지 못한 채 아버지에게 받는 돈으로 생활하는 신세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결혼지참금' 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찾아보니 나름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제도였다. 전근대 시대에 여성은 유산 상속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지참금은 딸에게 재산을 미리 증여하는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이혼을 하게 되면 여성이 다시 가져가게 되어있었고, 남편과 사별을 하면 그 지참금으로 남아있는 아내가 생활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지참금이 나름 긍정적인 역할도 했던 것 같다. 물론 나라별로 지참금제도가 악용되는 일도 많았고, 아랍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지참금을 주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딸에게 지참금으로 자신의 전 재산을 다 주었으니, 고리오 영감의 생활은 무척 궁핍해졌을 것 같지만 일 년에 일만 파운드 이상의 돈을 가질 수 있는 연금을 확보하고 있어서 생활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가 낙심한 것은 귀족이 된 딸들이 서민 티를 벗지 못하는 아버지를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액의 지참금으로 결혼했으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았어야 하는데, 남편의 사랑과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결국은 또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 모습은 참 분노를 유발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 고리오 영감은 장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딸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해주다 보니 점점 가난해져서 케케묵은 하숙집에서도 가장 값싼 방에 묵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딸들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이라도 팔 기세인 것을 보면 그의 딸 사랑은 과해도 너무 과하다. 그에게 딸들은 애인이자 아내 같은 존재였다. 그는 여신을 숭배하듯이 딸들을 숭배했다. 위 책의 주인공 라스티냐크는 고리오 영감이 델핀(둘째 딸)에게 하는 집착적인 행동들을 보고 질투심을 여러 번 느낀다. 딸을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까지야 어떨까마는 고리오 영감은 딸의 발에 키스하려 하고, 그 밖의 온갖 주책없는 짓거리를 다 해서 라스티냐크를 당황시킨다.
고리오 영감의 자식 사랑은 살아생전에 별다른 보답을 받지 못한 채 비극적인 결말을 맺고 만다. 그는 딸들이 처한 불행에 괴로워하고, 두 딸이 자신 앞에서 다투자 슬퍼하다가 결국 쓰러져 사경을 헤매게 된다. 아버지가 이 지경이 돼도 딸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 앞에서도 자신이 당면한 불행을 호소하기에 급급한다. 남편과 얽힌 갈등은 결국 그녀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한다. 지참금으로 인한 갈등으로 남편에 의해 집안에 감금되다시피 한 두 딸들. 장례행렬에는 두 딸의 남편 가문의 문장을 단 마차만이 사람이 타지 않은 채로 동행한다. 비참하게 죽고,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장례식을 치른 고리오 영감. 아버지의 사후에도 두 딸들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자신의 불행을 더 괴로워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젠 더 이상 그녀들에게 아버지의 그늘은 없다는 것, 돈이 아무리 궁해도 더 이상 손을 벌릴 곳이 없다는 것 때문에.
고리오 영감의 사랑과 헌신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할 수만 있으면 자식에게 다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해주고 싶어도 해 줄 수 없으니 못해주는 것이다.
고리오 영감은 부유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 같다. 너무 일찍 엄마를 잃어버린 딸들에게 아버지인 자신이 어머니 몫까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은 비천하게 살 지언정 딸들은 귀족처럼 살기를 바랐다. 그는 딸들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물질적 풍요를 선택했다. 갖고 싶은 것은 뭐든 해 주는 아버지 밑에서 그녀들은 부유함에 익숙해졌고, 더 사치스러운 것, 더 귀족적인 것을 원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었을 때도, 파티에 입고 갈 옷값을 치르기 위해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리러 갈 정도로. 허영심은 그런 것이구나 싶다. 허영심도 중독되면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멈춰야 할 때의 굴욕을 참기 힘든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딸들의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해 연금 채권까지 팔아버린다. 둘째 딸을 위해 연금채권을 팔고 나니 돈이 궁해진 첫째 딸이 찾아와 돈이 없다는 아버지에게 연금채권은 어디에 뒀냐고 묻는다.
딸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고리오 영감이 가장 잘못한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딸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주는 것이 딸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고 잘못짚은 것이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딸들의 허영심을 채워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탓한다. 그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는 일은 예견된 일이었다. 현대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종종 있다. 자식을 위해 재산을 미리 다 증여해버린 부모가 자식이 돌봐주지 않는다고 소송을 건다거나, 자식의 사업자금을 대기 위해 집을 저당 잡혔다가 자식이 쫄딱 망하자 집을 빼앗겨 길거리에 나앉는다던가. 노인빈곤 문제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자녀 돌봄이다. 자식이 죽게 생겼다고 도와달라고 하면 내 노후자금이니 안된다고 끝까지 버틸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참 어려운 문제다. 자녀 학원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부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녀의 일은 부모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측면이 있고, 그저 잘 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기도 하다. 고리오영감도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허영심과 사치로 똘똘 뭉친 딸, 그 딸을 이용하기에 급급한 사위들, 두 딸에게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버림받은 채 궁핍하게 살아가다가 결국 하숙집 사람들에 의해 극빈자처럼 장례를 치르게 된 고리오 영감. 글을 쓰다 보니 정말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남의 일이 아니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 내몰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해 볼 일이다.
자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방식에 원칙이 있어야 된다.
첫째, 자녀를 사랑하되 자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고리오 영감은 딸들에게 끊임없이 애정표현을 하고 그녀들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려고 그녀들이 좋아하는 허영심과 사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자녀를 위해 내 노후를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내가 건강하고 평안해야 자녀들도 편안하다. 자녀들은 많은 것을 주면 좋아하겠지만, 부모가 노후에 자신들의 짐이 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는다.
셋째, 자녀에게 부모의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자주 알려줘야 한다. 부모에게 받기만 하는데 익숙해지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부모에게 감사함을 표현할 줄 아는, 필요하면 부모를 도울 줄 아는 존재로 키워야 한다.
등등.
솔직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더 이상은 못쓰겠다. 나는 잘 실천하면서 이런 말들을 쓰고 있는가 반성이 돼서다. 다행히도 고리오 영감만큼 자녀에게 헌신적이진 않은 것 같다.^^ 내가 너에게 어떻게 했는데, 네가 그럴 수가 있느냐? 이런 식의 자녀를 대하는 사고방식은 요즘 자녀세대에겐 참 고리타분한 것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나의 좁은 소견에서 나온 결론은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