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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Mar 28. 2023

깨달은 자가 감당한 삶의 무게에 대하여

<장갑을 사러 간 아기여우>의 작가 '니이미 난키치'의 작품을 읽고 ②

<장갑을 사러 간 아기여우>의 작가 '니이미 난키치'의 작품을 읽고 ① 

니이미 난키치가 작품 속에서 구현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요즘 세상의 관점으로는 너무 순진한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능력주의와 물질만능,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쾌락 혹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희생이 너무 쉽게 무시되는 세상이니까. 어른이  잘못을 뉘우치고 선하게 살려고 한다던가, 타인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 낯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작가의 신념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말씀처럼 세태가 아무리 이상하게 변하고 어지러워도 진리는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바뀔 수 있는 진리라면 이미 진리가 아닐 테니. 다만 진리를 알아보는 사람이 점점 적어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 시야를 혼란스럽게 하는 너무 많은 정보가 있고, 게다가 인공지능까지 나서서 가르치려 드는 세상이니. 이럴 때일수록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문학이든 사실이든)에 귀를 기울이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인공지능기계의 위력에도 휘둘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발전시켜도 어쨌거나 인류 문명의 산물인 기계에게 인간이 전적으로 의지하는 세상이 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래 작품집의 몇몇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달은 자가 감당한 삶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장갑을 사러 간 아기 여우/니이미 난키치/하시카와 코이치,이다운 옮김/부광/2004>

수록작품: 장갑을 사러 간 아기 여우/ 금빛 여우/ 여우 이야기/ 꽃나무 마을과 도둑들/ 농부의 발, 스님의 발/ 소를 맨 동백나무/ 도리에몽, 세상을 돌다 




<꽃나무 마을과 도둑들>

-어린아이의 신뢰가 도둑대장의 인생을 변화시키다


혼자서 도둑질을 일삼던 도둑이 제자들을 받아들이면서 도둑대장이 되었다. 꽃나무 마을에서 도둑질을 하려고 마음먹은 도둑대장은 제자들에게 마을로 내려가 훔칠만한 물건이 있는지 정탐하게 한다. 도둑대장이 산속에서 혼자 빈둥거리는 사이 어느 귀품 있어 보이는 아이가 그에게 송아지를 맡기고 사라져버린다. 뼛속까지 도둑근성을 가진 그는 아무 노력도 들이지 않고 송아지를 훔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하며 헛웃음을 웃어대는데, 이상하게도 웃음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멈출 줄을 모른다. 도둑대장은 과거 시절,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며 힘들었던 일들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을 좋게 보고 송아지를 맡아달라고 한 아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도둑의 본분에는 맞지 않게 송아지를 아이에게 돌려주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는 오지 않았고 제자들을 시켜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급기야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 경찰쯤 되는 관리에게 찾아가 송아지를 맡기고 나오는데, 그 순간 도둑대장은 자신의 삶을 돌이키기로 작정한다. 마을 관리에게 돌아가 지금까지 저지 죄를 실토하였으며, 제자들은 아직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용서해 달라고 한다. 제자들은 도둑대장이 '절대 도둑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다짐한 말을 되새기며 바르게 살기로 작정하고 길을 떠난다. 그 뒤 도둑대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벌을 받았는지는 내용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그 이후에 이전보다 훨씬 마음 편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해 볼 수 있다. 도둑이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고 벌을 달게 받겠다고 하는 데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제자들이 자신 같은 도둑의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농부의 발, 스님의 발> 

     - 고된 노동과 그 산물의 소중함을 깨달아 겸손하게 살아간 농부의 마지막 길  


가난한 농부 기쿠지 씨는 스님의 햅쌀 탁발길을 도우러 따라나선다.  마지막 마을에서 스님과 함께 대접받고 술을 많이 마셔 거나하게 취한 기쿠지 씨는, 다리를 저는 가난한 농부가 시주한 햅쌀이 가득 든 바가지를 땅바닥에 쏟고 만다. 스님이 흙 묻은 쌀을 먹을 수 없다며 발로 밟아 쌀을 망가뜨리자 기쿠지 씨도 함께 햅쌀을 짓밟아버린다. 이 일로 어머니에게 혼이 난 기쿠지씨는 쌀을 짓밟았던 왼발이 아파오기 시작하면서 급기야는 왼발을 절게 된다. 쌀을 함부로 대한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나서야 발의 통증은 사라지지만 다리는 계속 저는 절름발이가 된다. 스님은 다리의 통증도 없었고 다리를 절지도 않았는데, 그 까닭이 자신은 농부로서 쌀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얻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벌을 받았지만 스님은 쌀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 잘못을 뉘우치지도 벌을 받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농부 기쿠지씨는 하늘에게 거듭 용서를 빌고, 그 후 40여 년을 겸손하게 고된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반면 스님은 쌀 한 톨도 아끼라고 설법하면서도 자주 술을 마시고 시주를 많이 받으며 부유하게 살아간다. 

농부와 스님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난다. 두 사람은 저승 가는 길에서 만난다.  저승길에서마저도 스님은 농부를 가르치려들고, 그가 시주를 안 하고 절에도 자주 오지 않은 것을 나무란다. 농부는 스님에게 굽신거리며 겸손하게 대한다. 마지막 갈림길에서 농부는 오른쪽 길로 스님은 왼쪽 길로 헤어지게 되는데, 농부 기쿠지 씨가 가는 길이 극락 가는 길이었고, 스님이 가는 길은 어둠과 두려움이 엄습하는 길이었다. 


농부 기쿠지 씨는 쌀을 짓밟는 경험을 통해 쌀의 소중함과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의 가치를 깨닫고 어리석은 행동을 돌이킬 수 있었다. 그의 선한 삶은 죽고 나서야 극락에 가는 것으로 보답을 받는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권선징악 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권위적이고 받을 줄만 아는 종교인의 모습과 선량하고 순박한 농부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며 작가가 지향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보여준다. 작가는 삶의 참모습을 모르면서 입에 바른 설법만을 일삼고, 농부들이 애써 시주하는 공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스님들을 많이 봤던 것으로 보인다. 어디 스님뿐이랴 종교인, 정치가, 재산가들 중에 받는데만 익숙한 이들이 모두 해당될 것이고, 농부라 해도 선량하게 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업이 인격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대체로 직업을 통해 얻은 경험이 그 사람의 인격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죽으면 당연히 자신이 극락을 갈 것이라고 술기운을 풍기며 으스대는 스님의 모습은 오만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선량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겸손한 마음을 필요로 하는지 깨닫게 한다.


<소를 맨 동백나무> 

- 선한 뜻을 품고 실현하는 인력거꾼 가이조 씨 이야기 


인력거꾼 가이조 씨의 선행은 그의 의지가 매우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점에서 위의 두 작품과는 차이가 있다. 도둑대장은 도둑질이라는 잘못된 행동을 돌이켰고, 농부 기쿠지 씨는 쌀을 함부로 짓밟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선량한 삶을 선택하는데 비해, 가이조 씨는 과오가 없음에도 선한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이조 씨가 친구 리스케와 함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에 다녀오는 사이, 리스케가 동백나무에 매어 놓은 소가 동백나무 잎을 다 먹어버린다. 이 일로 리스케는 지주에게 혼쭐이 난다. 가이조 씨는 길 가까운 곳에 우물이 있다면 이런 일도 없을 것이고, 오고 가는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니 무척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물을 파는 데는 30엔의 돈이 필요했고, 가이조 씨는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을 한다. 그는 먼저 부유한 친구 리스케에게 우물 팔 돈을 내놓는 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본인의 소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음에도, 리스케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사용할 우물을 파는 데 필요한 돈을 낼 수는 없다고 거절한다. 가이조 씨는 동백나무에 모금함을 걸어두고 우물 팔 돈을 모아보는데, 좋은 취지를 적어놓았음에도 아무도 모금함에 돈을 넣지 않는다. 이 정도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가이조 씨는 스스로 모으기로 작정하고 씀씀이를 아껴 2년에 걸쳐 우물 팔 돈을 모은다. 땅의 주인인 지주에게 허락을 받는 과정에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한 욕심보다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보여주어 지주를 감동시킨다. 드디어 길 가까운 곳에 우물이 생겼다. 사람들이 오가며 편하게 물을 마시는 모습을 가이조 씨는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야기의 결말은 다소 슬프게 끝난다. 가이조 씨는 그 후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돌아오지 못한다. 물론 가이조가 판 우물은 그 자리에 남아 지친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고 있다.


이 작품도 무척 교훈적이다. 선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선할 일을 해낸다. 그 자신은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지만 선한 일의 결과는 계속 남아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물한다. 동백나무에 소를 매달아 혼이 난 사람은 리스케인데, 정작 우물을 파기 위해 애쓴 사람은 옆에 있던 가이조였다. 선한 열매는 결국 깨달아 실천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이조가 러일전쟁에 참가하여 돌아오지 못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 그 전쟁이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인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작가가 살던 시대가 그런 시대였고, 가이조 같은 선량한 일본인도 결국은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셈이었다.


<도리에몽, 세상을 돌다> 

-부유한 무사가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유한 무사 도리에몽은 활쏘기 연습을 위해 살아있는 개를 쏘아 죽이는 것을 재미 삼아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이다. 헤이지라는 이름의 하인만이 눈빛으로 그의 잘못된 행동을 질책하는데, 오만한 무사는 하인의 행동에 불쾌감을 느껴 그의 눈을 쏘아서 한쪽 눈을 멀게 만든다.

 더욱 오만해진 도리에몽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먼저 배에 오른 사람을 억지로 내리게 하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하고, 강을 날으는 백로를 쏘아 맞히며 자신이 얼마나 활쏘기를 잘하는지 자랑한다. 뱃사공이 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자 뱃사공에게 앙심을 품는다. 나중에 배에서 내렸을 때 뱃사공에게 활을 겨누는데, 뱃사공은 다름 아닌 헤이지였다. 도리에몽은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고 헤이지의 남은 한쪽 눈에도 화살을 쏘아버린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뒤로 도리에몽은 더 이상 사냥을 하지 못했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헤이지의 말과 그의 멀어버린 두 눈을 떠올리며 고통스러워한다. 도리에몽은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작정한다. 

 어느 산골마을에서 스님으로 살게 된 도리에몽은, 마을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다. 마을 사람들이 종소리를 듣고 싶어 하자, 종을 만들 돈을 모으기 위해 8년 동안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는다. 드디어 산골마을로 돌아가는 길, 가장 큰 도움을 준 마을이 홍수로 재난을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8년 동안 고생해서 모은 돈을 그 마을을 위해 써야 할지 고민한다. 도리에몽은 결국 산골마을을 위한 종을 사는데 모든 돈을 사용한다. 종소리는 마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도리에몽도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어느 날 두 눈이 멀어 떠돌이 거지로 살고 있는 헤이지를 다시 만나면서, 도리에몽은 양심의 소리를 뿌리치고 어려움에 처한 마을을 돕지 않았던 일을 헤이지에게 고백하며 깊은 번민에 빠진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종을 치지 못하고 산골마을을 떠나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다.


동화라기보다는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도리에몽이라는 이름이 만화 캐릭터 도라에몽을 생각나게 해서 여러 번 미소를  지었다. 무사로써 생명을 죽이는 것을 재미 삼아하던 사람이 자신의 양심을 일깨우는 사람을 만나자 그의 눈에 화살을 맞혀 눈이 멀게 하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오만한 사람의 본성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양심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헤이지와의 두 번째 만남 후 깨달음을 얻은 도리에몽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어느 정도 성공한다. 하지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을 도울 기회가 왔을 때 양심의 소리보다는 자신의 욕구를 쫓아 행동함으로써 완전한 구원에는 이르지 못한다. 도리에몽과 헤이지는 이중적인 인간의 본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도리에몽은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죄성이 많은 인간의 본성을, 헤이지는 선하고 이타적이고 겸손한 본성을 상징하는 게 아닐까?




위 네 편의 작품에서 깨달은 것.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든, 인생에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순간은 오게 마련이다. 그 순간에 잘못된 삶을 돌이켜 바른 삶의 길로 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대로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며 살 것인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도둑대장도, 농부 기쿠지 씨도 잘못된 행동을 돌이킬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인력거꾼 가이조 씨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선한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었다. 반면 무사 도리에몽은 앞 이야기의 주인공들에 비해 더 오만하고, 더 부유하고, 더 권위적인 사람이다. 이렇게 많은 것을 누리고 산 사람이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선한 뜻을 품고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도리에몽의 삶이 보여주었다. 물론 선한 삶을 살고자 한 그의 열정은 인정해주고 싶다. 헤이지의 두 눈을 멀게 한 죄는 용서하기 어렵겠지만. 


과학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지만, 점점 더 혼란스럽고 위험하고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악한 세력들에게 나와 가족, 친지, 친우 등이 피해를 당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느껴지는 세상이다. 착하다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바보 같아 보이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런 세상일수록 선한 뜻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귀감으로 삼아야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고 믿으며……



*좀더 자세한 줄거리가 궁금하시면 아래 글을 참고하세요~


https://blog.naver.com/gurumfantasy/223047706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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