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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Mar 23. 2023

아기 여우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도 될까?

<장갑을 사러 간 아기여우>의 작가 '니이미 난키치'의 작품을 읽고 ①

니이미 난키치의 작품집에 등장하는 여우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동물의 공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장갑을 사러 간 아기 여우/니이미 난키치/하시카와 코이치, 이다운 옮김/부광/2004>

수록작품: 장갑을 사러 간 아기 여우/ 금빛 여우/ 여우 이야기/ 꽃나무 마을과 도둑들/ 농부의 발, 스님의 발/ 소를 맨 동백나무/ 도리에몽, 세상을 돌다


 나는 여우를 동물원에서도 야생에서도 실제 본 적은 없다. 티브이 다큐멘터리나 동영상에 등장하는 모습을 본 게 전부다. 다큐에 등장하는 여우의 모습은 옛이야기의 둔갑술이 뛰어난 무시무시한 여우에 비하면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여우가 우리 옛이야기에서 무섭고 오싹한 이미지로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가끔씩 마을에 내려와 닭 같은 가축을 훔쳐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니이미 난키치 동화 속의 여우도 인간에게는 거의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 여우는 더욱 순진무구하다.  


<장갑을 사러 간 아기 여우>와 <금빛 여우> 두 작품의 주인공이 여우다.

 <장갑을 사러 간 아기여우>에서 아기 여우는 장갑을 사러 마을로 내려갈 때 '인간들은 정말 무서운 존재'라는 엄마의 경고에 두려워한다. 하지만 자신이 실수로 여우 손을 내밀었는데도 친절하게 장갑을 팔아준 모자가게 주인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은 생각보다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엄마 여우는 아기 여우가 겪은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정말 좋은 존재인지 거듭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 붙잡혀 죽을뻔한 공포를 경험한 엄마 여우가 아기 여우처럼 인간을 바라보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기 여우의 인간을 향한 마음, 세상을 향한 시선은 어린아이가 의 냉혹함을 경험하기 전에 엄마 품에 있을 적에 세상이 더없이 아름답고, 눈이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이 느끼는, 그런 감정 상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기 여우도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할 만큼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인류와 동물 간 평화로운 공존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금빛 여우>에서는 여우의 역할이 더 적극적이다. 사람들에게 못된 장난을 치기 좋아하는 금빛이라는 별명의 여우는 자신이 괴롭힌 청년의 어머니가 죽은 것을 보고, 청년이 병든 엄마를 위해 잡은 물고기에게 장난을 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 뒤 매일 산에 있는 밤 따위를 주워다가 청년의 집에 갖다 놓는데, 어느 날 청년에게 발각되어 청년의 총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여우를 죽이고서야 자신을 도와준 것이 금빛 여우임을 안 청년은 슬퍼한다. 다소 우화적이고 옛이야기 같은 내용이다.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인간에게 정을 주고 도우려고 애쓰는 금빛 여우의 모습은 인간보다 오히려 더 인간적이다.


위의 두 작품 속 여우와 인간의 관계는 인간과 다른 종 사이의 공존의 의미를 생각하게 다. 공존이란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통제하고, 필요에 의해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인간이 상대적으로 우월한 문명을 가졌다고 해서 여우로 상징되는 동물을 함부로 대하고 마음대로 취급한다면 인간과 동물은 공존하는 관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생존을 위해 먹고 먹히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자연의 법칙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래와 같은 피터 싱어의 주장은 자연계의 존재를 대할 때 깊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터 싱어의 주장은 모든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이 똑같이 고통을 경험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행동의 결과를 놓고 장단점을 따지는 윤리적 이론은 우리 종뿐 아니라 모든 종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죠. <필로소피랩/조니 톰슨 지음/최다인 옮김/윌북/36페이지 중에서>


공존의 문제는 동물과 인간 사이에만 적용이 되는 것 같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인간들 사이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세상에서도 경제적으로 혹은 권력, 신분, 성별, 인종 등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은 자신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인간이 동물을 대하듯이 이용하고 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본다.  갑과 을의 관계처럼, 을의 입장에 있는 타인을 공존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확실한 것은 나와 다른 종,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나 자신이  존중받고 배려받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기 여우가 순진한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아도 되는 세상, 금빛 여우가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공존과 공생도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니이미 난키치의 몇몇 작품에서는 공존과 공생의 의미를 깨우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지 보여주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깨달은 자가 감당한 삶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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