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강원도 동해시 묵호진동 산 ○○번지

고향(故鄕):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by 박지각
1993년 2월 7일(일)
1993년 2월 7일(일)


아버지의 부재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덮쳐온다. 예를 들면 마트에서 누군가 아빠,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버지와 꼭 닮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연의 영화가 TV에 나왔을 때, 유튜브 알고리즘에 암 환자 관련 영상이 떴을 때, 그리고 가족관계증명서를 발급할 때다.


가족관계증명서 상단에는 ‘본적(本籍)’지가 있다. 내가 태어났을 때 당시 살았던 집의 주소다. 나의 본적지는 ‘강원 동해시 묵호진동 산 ○○번지’다. ‘논골담길’로 불리며 최근 몇 년 사이 관광지로 유명해진 곳이다. 묵호항 앞 언덕배기 위엔 따개비처럼 작은 집들이 따닥따닥 붙어있다. 그곳에 우리 가족과 아버지의 형제들이 살았다. 그곳은 나의 고향이기 전에 아버지의 고향이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작지만 예쁜 곳이었다. 대문을 열기만 해도 짙푸른 동해 바다와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다. 대문 안쪽으로는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오른쪽엔 수도가, 왼쪽엔 낮은 장독대가 있었다. 나는 언니와 그곳에서 엉덩이를 리드미컬하게 맞부딪히며 ‘몽쉘통통’이라고 외치는 놀이를 자주 했다.


집 전면에는 은색 알루미늄 새시 서너 쌍이 즐비어 있었다. 새시 안쪽으로는 가로로 된 긴 복도가 있었는데 복도 안쪽으로는 작은 방 2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나는 거실 겸 안방, 하나는 언니와 내가 자던 작은 방이었다. 복도의 오른쪽 끝에는 당시에 흔치 않던 양변기 화장실이 있었고, 복도의 왼쪽 끝에는 아버지가 캔 나부 뿌리로 만든 장식품과 나무 지게가 있었다.


내 생의 첫 기억이 그 복도에 있다. 몇 살이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였다. 방에서 자다가 깼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꾹 참고 복도로 걸어 나갔는데 복도에 흰색 러닝셔츠 차림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아버지는 유리창 너머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내가 아빠라고 불렀는지, 무심결에 돌아봤는데 내가 있던 건지. 때마침 아버지가 고개를 돌렸고, 나를 발견하고는 번쩍 안아주었다. 그리고 방금까지 아버지가 보던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해였다. 크고 붉게 타오르던 해. 해는 수평선 안까지 전부 붉게 불태우고 있었다. 마치 밭 태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의 고향 집은 이토록 아름다운 해와 바다를 매일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내 생에 가장 작지만 큰 행복을 누렸던 때였다.


하지만 그곳은 내 생의 첫 ‘폭력의 기억’을 선사한 곳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손 위 형제가 손아래 동서의 뺨을 쳤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두 사람을 말리기 바빴다. 어른들 사이엔 분명 오래된, 깊은 감정의 골이 있었다. 맞지만 않았을 뿐,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게 된 이유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우리는 야반도주하듯 묵호를 떠나 내륙 지방의 소도시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난생처음 '장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어머니는 밤잠도 포기하고 동대문시장을 오가며 물건을 사입해 팔았다. 장사는 꽤 잘됐다. 언니와 나는 학교가 끝나면 집이 아닌 학원으로 갔다.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또 다른 학원으로 다니다 보면 어느새 밤이 됐다. 엄마와 언니와 나는 매일 밤 열 시가 되어서야만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왔다. 아버지가 오는 날이 온 가족이 쉬는 날이었다. 언니와 나는 학원을 가지 않았고, 엄마는 동대문에 가지 않았다. 시 외곽에 있는 댐의 수문을 열면 댐으로 놀러 가고, 다 같이 온천에 갔다가 해장국을 먹기도 했다. 네 식구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행복했다.


우리의 행복은 일 년에 두 번 금이 갔다. 설날과 추석이었다. 완행열차를 타고 하루를 꼬박 가야만 묵호에 다다랐다. 여섯 시간이 넘게 기차를 타고 묵호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는 건 명절 음식과 아버지의 형제들이었다. 고향을 떠나 잘 산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는 아버지 형제들의 모진 눈초리와 나쁜 말들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 가족이 더 큰 집으로 이사하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형제들은 악다구니를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문제는 ‘돈’이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형제들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어머니와 결혼하고 17년이 지난 후였다. 그 후로 우리는 묵호에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형제들을 다시 만난 건 아버지의 투병 생활이 시작된 후였다. 그들과 다시 만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들은 본색을 드러냈다. 상복을 입은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의 ‘사망 보험금’을 언급했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형제들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울부짖는 어머니와 손가락질을 하며 받아치는 그들 사이로 보이던 영정 사진 속 아버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후로 우리는 묵호에서 제법 먼 곳으로 이사했다. 이따금씩 아버지의 친구들이 보내는 귤 한 상자, 대게 한 상자와 함께 아버지의 형제들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의 누나는 병을 얻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동생은 경기도로 이사를 했는데 얼굴이 썩 좋아 보이진 않더라고 했다. 우리는 고개만 끄덕였다.


49재를 지내고, 이사를 하고도 한참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우리는 묵호에 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간 묵호엔 골목골목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남아있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어달리까지 달리던 도로, 손잡고 거닐던 시장 골목, 우리가 살았던 묵호진동 산 ○○번지 집까지. 그 후로도 지금까지, 우리는 이따금씩 묵호에 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형제들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번 묵호에 갈 때마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만약에 아빠 가족들 만나면 어떻게 할 거야?”

“만나면 만나는 거지. 반갑게는 아니겠지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럼 상이든 잔치든 치른다고 와달라고 하면 갈 거야?”

“응. 대신 혼자 말고 너랑 같이 가야지.”

“나는 왜?”

“혹시 모르잖아. 하나가 싸우면 하난 말려야지.”


시간이 흐른 만큼 우리는 아버지 형제들의 이야기에 덤덤해졌다. 언제 마주치더라도 인사 정도는 할 수 있고, 부른다면 갈 수 있을 정도로. 사실은 은근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묵호에서 밥을 먹을 때면 늘 ‘오늘은 마주치려나. 만나면 당당하게 인사해야지.’ 하고 상상했으니까.


묵호도 마찬가지다. 야반도주하듯 떠날 정도로 지긋지긋했던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힘들고 떠나고 싶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올릴 정도로 그리워하는 ‘나의 고향’이다. 오늘도 마음으로 바라본다. 꿈속에서라도, 아버지의 품에 안겨 보았던 묵호의 짙푸른 바다와 붉은 해를 다시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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