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유난히 따뜻한 음료를 함께 마시며 서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계절이다. 이른 아침 사무실에 앉아 동료들에게 따뜻한 음료를 건네면, 어느새 한 책상에 도란도란 앉아 서로의 안부를 나누며 웃음꽃이 활짝 핀다. 뜨거운 온기가 담긴 컵을 들고 있는 잠깐의 시간 동안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유는, 곧 차가운 일터로 흩어져야 하지만 손에 담긴 온기가 식을 때까지는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며칠 전 새로 이사한 집으로 소중한 이들을 초대했다. 십여 년간 전전긍긍하며 살았던 작은 원룸에서 벗어나 드디어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 20대를 함께 보낸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은 참 기쁜 일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뚫고 달려와 준 이들과 지나온 추억을 꺼내 보았다. 생각 차이로 싸우기도 하고 오해로 멀어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 같이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갈등의 시간이 감히 넘보지 못할 만큼 함께 쌓아온 따뜻한 우정의 흔적들 덕분이다. '함께'라는 감정이 말라가는 시대에 추억을 나눌 동료가 있다는 기쁨을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손님들이 떠난 뒤,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그들의 칭찬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자가는 아니지만 집을 마련했고 빚 없이 차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그 한마디 속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홀로 남겨진 식탁에 앉아 지나온 삶을 곱씹어 보았다.
'정말 잘 살아왔을까?'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로 보일지 모르나,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외줄을 타듯 버텨온 길이었다. 셀 수 없이 떨어졌고, 신음조차 비난받던 시절이었다. 그땐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평불만밖에 남지 않은 나의 세상에서 ‘이 정도면 괜찮지, 나 정도면 훌륭한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제자리에 머무르며 주변을 비난했지만 비난받는 것은 싫어했다. 주변을 고치려 애썼지만 정작 나를 고치고자 애쓰지는 않았다. 하찮은 자존감에 갇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도 잘 살고 있는 걸까?'
지나온 삶의 실수들은 대부분 내가 잘하고 있다는 거만함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하찮은 자존감'은 잘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렸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신이 빠져나와야 한다는 사실조차 외면한 채 시간을 낭비했다. 안일함에 빠져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오만했음을 깨닫는 혹독한 시간도 있었다. 자존심이 부서진 초라함,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상실감과 자책들. 그러나 그 아픈 과정을 다시 마주 보고 실수를 인정하며 부족함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외면해 왔던 오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비로소 단단하고 견고한 자존감이 찾아왔다.
올바른 자존감은 결코 내가 잘나서 타인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호기가 아니다. 내가 처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다. 부족함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한 고민이 없다면 삶은 반드시 권태와 허무의 늪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정말로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 질문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아있다. 살아있으니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핑계에서 벗어나자. 삶에 불편함이나 간절함이 없다면,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돌아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은 오늘을 기대할 수 있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잠시 물러나 삶과 믿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돌아보자.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갈망과 당장의 불편함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타인을 향한 존중과 연민, 사랑을 어떻게 나타낼지 고민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내 마음에는 여전히 불편함이 남아 있다. 내가 믿고 썼던 이 글을 삶에서 어떻게 증명해낼지 고민하기 때문이다. 내 삶도 감당하기 급급하기에 이 고민은 여전히 불편하고 막막하다. 그럼에도 이 불편함을 이겨내고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우리 함께 주어진 삶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