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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Jul 28. 2023

글의 사람

영화를 보다

중학교 2학년, 처음 극장에 갔습니다.


학교에서 단체관람을 해서, 조금 늦게 극장에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첫 부분을 놓쳤는지, 아니면 극장 안 생전 처음 경험하는 어둠과 영사기의 불빛, 화면에 넋이 나갔는지 영화 자체에 대한 기억이 진하지 않았습니다.

얼마간 제목을 기억했다가 잊었던 거 같습니다.


생각나는 장면은 노예선에서 손발이 묶인 채 노를 젓는 남자주인공의 건장한 몸과 날 선 눈빛,

문둥병에 걸렸던 모녀가 나음을 입어서 행복해하는 장면 딱 둘이었습니다.


어느 해 던가, '벤허'를 보다가 가 처음 극장에서 본 영화가 바로 그 영화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 영화를 본 이후, 학교에서 단체관람으로 두 번째 영화를 봅니다.

가슴 졸이면서 긴장하다가 프레디의 잔학한 칼과 표정이 튀어나오면 으악! 비명을 질렀습니다.

제목이 생생하게 남았습니다. '나이트메어'입니다.



글의 기억은 그보다 훨씬 앞섭니다.


초등학교 언제쯤이던가, 사촌들이 읽었던 세계문학전집 한 질이 통째로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베개만 한 크기의 책들이 각진 어깨들을 대고서 줄을 맞춰 서서 책장을 가득 채운  모습이 웅장했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와 띠동갑 오빠가 정기구독한 '합격생', '학원' 몇 권 말고는 볼만한 책이 없던지라, 세계문학전집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오빠는 육지에 나가 살고 있었고, 그 책들은 주인없이 짐으로 머물러 있던 것들입니다.)


지금도 생각해 보면,  귀한 아들로 태어난 오빠는 그 시대에 흔치 않은 잡지구독까지 했다는 게 참 놀라울 뿐입니다. 왜냐면, 저는 늘 책이 고파도 어머니는 책 한 권 사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웃집에 가서 보따리로 싸서 책을 빌려다 주기는 했습니다. 어린이 명작동화 같은 책들인데, 어떨 때는 아껴읽지 않고, 너무 빨리 읽었다고, 그래서 또 빌려 오라고 한다며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뒤늦게 독서의 즐거움을 맛보고는 그때를 이야기하면서 저에게 미안해하셨습니다. 참, 세상은 살고 볼 일입니다.


자, 책장 안에 앉아있는 저 책들 속에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오빠가 쓰던 책상에 앉아, 오빠가 쓰던 의자에 발을 달랑거리며 앉아서, 펼치면 제 몸통 만큼 한 책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경건하게 읽어 넘기는 작은 소녀인 저의 모습이 참 사랑스럽네요.


그때의 몰입과 즐거움은 세상 어떤 것들보다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즐겨보지 않습니다. 드라마도 잘 보지 않습니다. TV 모니터 없이 산지 18년 차입니다.


영화는 짧은 시간 안에 인간사 희로애락이 압축되어 휘몰아치는 탓에, 정신을 두고 보다가, 끝이 나면 감정을 혹사당한 기분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연속 드라마는 결혼 후 얼마간 TV 있을 시절에 봤는데, 다음 회차를 기다리는 감정소모가 너무 커서 안 보기로 했습니다.


결국은 늘 친근한 벗, 책은 내 곁에서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고, 그와 동행하는 것은 훨씬 넉넉하고 편안했습니다. 너무 감정이 휘몰아치면 잠시잠깐 책을 덮고 마음과 생각의 갈피를 가다듬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책 덕분에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생겼습니다.

호기심 때문이죠.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을까?'


반대로, 가족들과 영화를 보고 나서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호기심입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어떤 이야기인가?'


영화를 가끔 보기 때문에 방대하고 자세한 '소설_영화 라이브러리'가 되는 건 꿈도 못 꿀 일입니다.

그저 저의 개인적인 기록담으로 이 매거진을 시작합니다.

느린 걸음으로 한 발씩 디뎌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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