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李씨(이하 이): 오늘의 책과 영화는 19세 여성이 썼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설, SF의 시조라 불리는 프랑켄슈타인.
1994년 극장에서 이 영화를 혼자 보고 울었던 게 생각이 나. 다른 장면은 희미한데, 괴물이 설원을 걸으며 절규하는 장면에서 훌쩍거리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시선이 상공에서부터 시작해서 눈 밭 위의 괴물에게 까지 가 닿은 꽤 긴 시간, 눈을 헤치고 허우적거리며 걷는 그가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졌는지.
친밀한 관계를 갈구하지만, 철저하게 배척당하고 소외당하고 오해받으며 고립된 존재, 처절하고도 처절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마음이 느껴졌다고 할까. 나에게는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이었어.
점선면(이하 점): 괴물은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남성으로 표현되는 걸 보니, 이 씨가 제목에서 말한 세 남자 중 다른 두 명이 궁금해지네.
이: 학교 국어시간에 배운 소설의 형식 중에 '액자 소설'이라는 거 기억해?
말 그대로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액자처럼 끼어들어 있는 소설형식인데, 이 소설이야말로 액자소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지. 소설은 크게 3중 구조로 되어 있거든.
첫째 화자는, 선장 월턴. 극지 탐험선을 이끄는 그가 고향의 누나에게 쓰는 서신으로 소설이 시작되고, 소설의 마지막도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기술하며 끝나.
두 번째 화자는, 광기의 과학자 프랑켄슈타인. 그가 월턴과 만난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어떻게 해서 인간의 부활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그래서 그가 무엇을 했는지, 그로 인해 그가 어떤 결과들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세 번째 화자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인 괴물(끝내 그는 이름을 얻지 못한 채, 괴물이나 창조물로 불렸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고향을 찾아가 마침내 그를 유인하고 그와 대면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실에서 도망 나오고 나서 어떻게 목숨을 유지했는지, 산속 오두막에서 어떻게 계절을 나면서 글을 깨치고 말을 배웠는지.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고 자신의 탄생을 알게 되었는지. 외로움에 지친 그는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같은 여성의 존재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해.
점: 괴물의 요구에 대해서 프랑켄슈타인이 어떻게 했는지 화자가 되어 선장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이어지는 거구나.
선장-프랑켄슈타인-괴물-프랑켄슈타인-선장의 구조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요청대로 여성 괴물을 만들어 준 건가?
이: 이게 소설과 영화에서 다른 부분인데. 영화는 긴장을 끌어올려 극대화하는 장치로 프랑켄슈타인이 그런 피조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는 걸 보여줘. 괴물도 그의 성공을 목격하지.
영화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한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그 일을 실행하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잘못으로 죽음에 이른 두 여자를 되살려내기 위한 일종의 광기와 집착이야. 한 여성은 괴물에 의해 죽임 당한 막내동생 윌리엄을 돌봤던 유모 저스틴. 그녀는 윌리엄의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거든. 또 한 여성은 자신의 연인 엘리자베스. 신혼여행 숙소에서 괴물에게 살해를 당했어.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여성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자신의 기괴함을 알아챈 여성괴물은, 스스로 불길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복도를 내달리다가 아래로 몸을 던지지.
그 결말의 비참함 때문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에 대한 집착적인 광기와 살의를 느끼며 그를 추적하기 시작해.
점: 그럼 소설에서는 실제 여성 괴물은 등장하지 않는 거네?
이: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위협(사랑하는 사람들을 살해하겠다는)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극도의 긴장과 공포를 느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여성창조물을 만들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글로 읽을 때 느껴지는 그의 고뇌와 공포가 얼마나 절절한지 작가가 날카로운 메스로 그의 정신을 한 올 한 올 잘라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영화가 전해주지 못할 긴장이 가득하지.
자신이 시작한 일의 결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알게 되니 과연 그가 여성 괴물을 만들어 내는 걸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없어서.
점: 이 씨가 생각하는 소설의 키워드라면?
이: 집착, 고독.
세 남자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가지고 있어.
월튼은 선원과 자신의 목숨보다 극지를 최초로 탐사한 인물이 되고 싶다는 야망과 열망에 사로잡혀있었어. 그러기에 험난한 항해를 시작해서 이제 그 끝, 성취를 이루어낼 것이라는 의지에 차 있지만, 그에게 닥친 상황은 그대로 나아가다가는 선원들의 목숨을 위험에 몰아넣게 될 위기였어.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광기와 집착에 사로잡혔지. 일상생활이나 연인과의 로맨스도 잊어버릴 만큼.
괴물 역시 집착하는 게 있어서. 바로 연결이었어. 한 인격으로 인정받는 것, 타인과 관계 맺는 것.
월튼은 선장으로서 홀로 짊어진 책임과 야망 때문에 고독한 존재였지.
프랑켄슈타인 역시 자신의 열망에 쫓겨 살았지만, 그것을 누군가와 나눌 수 없었어. 더군다나 자신이 초래한 결과가 만드는 비극에 대해서는 고독한 책임을 느낄 수밖에.
괴물은 거부당하는 고독감을 느껴야 했지. 외모만으로 그를 오해하고,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바로 자신을 만든 창조자로부터도.
여기에, 프랑켄슈타인이 가진 격렬한 감정 하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네.
바로 죄책감.
죄의식이라는 것은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선택으로 생명을 얻은 괴물을 보면서 감탄하기보다는 끔찍해했어.
가장 사랑하는 존재들이 괴물에 의해 죽임 당한 것을 봐야 했어.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은 더 무서운 광기로 괴물을 추적하게 만들었고. 괴물을 생각할 때마다 죄의식과 자기혐오에 시달렸겠지.
그렇게 신의 영역을 탐했던 자신의 오만과 금기된 욕망의 결과를 맞닥뜨렸고, 그 죄에 대한 벌을 스스로 내리고 있었던 거라 생각해.
점: 프랑켄슈타인에게 구원이 가능했을까? 한때는 오만함, 나중은 참회와 분노로 자기 파괴적인 삶을 살았던 그에게?
이: 소설에서는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프랑켄슈타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그건 괴물을 수용하고 사랑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자신의 창조물을 인정해 주고 그가 살아갈 방법을 찾아주고 베풀어주는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설령 자신을 힘들게 한다 해도 그것이 이 세상에 그를 존재하게 한 자로서 해야 할 의무였고, 그것이 그를 구원할 방법이었다고.
알아, 쉽지 않은 일이지.
신의 사랑, 우리의 모습의 추함과 상관없이 끝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자녀라 불러준 하나님 사랑에 비해, 인간이 품는 사랑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괴물이 자신의 탄생에 얽힌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일지를 읽고, 그를 아버지라 생각하고 인정과 사랑을 구했을 때, 만약 프랑켄슈타인이 그를 수용했더라면, 소설을 후반부는 어땠을까?
괴물과 싸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괴물을 위. 해. 서 싸우는 이야기가 된다면?
그래, 그런 설정 쉽지 않겠어.
혈육의 아버지도 자식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인간 세상에 허다한데.
책임을 회피하고 도망치고자 하는 자, 결국 그 끝은 해결되지 않는 죄책감이라는 지옥, 고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