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장
take off the grave clothes & let it go
점선면(이하 점): 네가 도전을 해보겠다고?
이李씨(이하 이): 며칠 동안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이야. 너도 알잖아. 난 즉흥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아.
점: 그래. 인정. 계기는?
이: 세상에는 이미 좋은 책들이 많지. 좋은 글을 쓰는 작가들도 많아. 이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그 많은 좋은 책, 좋은 글을 다 읽기에도 한평생이 모자랄 지경인데, 내가 뭘 글로 써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
점: 맞지.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네 글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근데 왜?
이: 조금, 내 기분대로 살고 싶어서. 브런치스토리에서 3개월 동안 글을 쓰다 보니, 깨달은 게 있는데, 내가 글을 쓴다고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 안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행여 나의 글이 공해가 되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그럴 걱정이 필요 없다는 걸 안 거지. 공해의 존재보다도 가벼워서,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차라리 무에 가까우니까.
내가 너무 전인류와 전지구적인 효율과 의미를 생각했었어. 이런! 내 글 하나 있든 없든 세상은 달라질 게 없다.... 근데 이게 나한테는 꽤나 재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그래서 온전히, 나의 유희를 위한 글을 써보려고.
점: 너무 자기 생각만 하는 거 아니야? 니 멋대로 쓰는 영양가도 없고 심지어 아름답지도 않은, 그래서 누구도 관심 가져주지 않고, 심지어는 있던 구독자들마저 '이게 무슨 해괴한 잡설인가'하면서 구독 취소를 한대도?
이: Yes. 나란 인간을 제대로 말해보자면 이런 거야. 유명해지고 싶지만,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좋겠어. 댓글이 많이 달린 글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 언제 이런 대댓글을 다 쓸까? 나라면 피곤하겠다. 생각하지. 글을 쓰는 것보다 대댓글 다니는 게 더 어렵더라니까.
점: 그럴 거면, 혼자 조용히 네 일기장 노트에나 쓰지, 왜 브런치에다 쓰려고 하냐?
이: 내 말이! 나는 혼자 놀고 싶은데, 실은 혼자 노는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거지. 보든 말든.
여기 꿋꿋이 혼자 서도 잘 노는 사람 있어요. 하고 말이지.
점: 그럼, 날 어떻게 부려먹을 거야?
이: 부려먹기는? 내가 글을 씀으로 인해서, 너는 존재하는 거야. 내가 글쓰기를 멈추면, 넌 존재하지 않아. 할 일이 없다고. 넌 나의 요청을 들어야 해.
점: 흠. 좋아. 우리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쯤 된다고 봐야 하나?
이: 아무거나 생각난다고 갖다 붙이지 마라.
점: 그럼 본캐가 이씨고 부캐가 점씨인가?
이: 그런 셈이긴 한데. 네가 잘 나가면, 점씨가 본캐가 되고 이씨가 부캐가 되는 날이 올 수도!
점: 으앗. 좀 설레기는 하는데, 그래도 우리 서로 아는 체는 안 하는 걸로. OK?
이: 내가 바라는 바야.
점: 자, 그럼 앞으로 뭘 어떻게 할까, 생각은 해 봤고?
이: 그럼. '시인 오계아 님을 기억합니다' 연재 막바지에 침대에 누워서 생각했지. 나는 생각하는 인간이야!
점: 오, 그 생각을 들려줘 보시게. 무슨 주제인가?
이: 그게, 딱히 뭐라고 한 주제를 정하기가 어렵다는 거지.
내가 10년 이상을 지속하면서 좀 좋다 싶었던 거, 잘했다 싶었던 게 몇 가지 있어.
점: 으음~. 갑자기?
이: 끝까지 들어봐. 신앙생활 35여년. 교직생활 21년. 결혼생활 22년. 엄마로 산 시간 22년. 아! 뭐니 뭐니 해도 인간으로 살아온 세월, 만 51년! 뿌듯하다.
점:으헉. 만오십일년이래! 어떻게 인간이 만년을살아?
점: 글 주제를 말해보라는데, 뭐야?
이: 그니까, 내가 살아온 세월들을 망라하면, 얼마나 잡다한 이야기들이 있겠냐고? 이것들 중에서 한 주제를 선택해서 꾸준히 일관성 있게 쓴다는 게, 솔직히 말해서 귀찮아. 기억과 경험을 분류하고 심지어, 시간적인 흐름까지 생각해서 질서 있게 만들려면, 에구. 힘들고 귀찮아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는 거지.
점: 으응~ 그게 뭔가?
이: 브레인스토밍으로 아이디어를 인출하고 나서 그다음에 유목화,유..아, 한자 찾기도 귀찮아. 영어가 빨라서 영어로 쓴다, categorizing하는 거야. 쓰고 나서 주제 생각하기 정도?
점: 이거, 정말 막가는구나. 읽는 사람에 대한 성의가 없어, 성의가.
이: 왜, 브런치에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글들을 하루에도 얼마나 많이 생산해내고 있냐?
이 와중에 매거진에 얼마나 신통한 일관성을 부여한다고 해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결과가 되냐고. 그냥 맥락 없이 한 편씩 읽고 가는 경우가 더 많지 않냐. 그러니, 그냥 맘대로 쓰고, 얼마간 글이 쌓이면 그때 비슷한 주제글들을 굴비 엮듯 브런치북 하나로 정리한다! 얼마나 신박한 생각이야, 생각의 전환이란 이런 걸 말한다고요.
점: 너, 좀 잘난 체 하는 거 아니야?
이: 오, 무슨 말씀을. 저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점: 그런 말이, 더 싫어. 진짜 겸손하면 위에 문장을 지울 법도 한데, 그냥 둘 거잖아. 어때 내가 널 바로 봤지?
이: 흠..
점: 이씨가 브런치에 와서는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없다고, 좀 막가려는 게 보여. 세상은 좁아. 조심해.
이: 하긴, 언젠가 밤 12시 30분쯤에 알람이 떠서 봤더니, 현실언니가 내 글에 댓글을 단거야. 맙소사! 도대체 어떻게 알았냐고! 며칠 있다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인터넷에서 '오계아'이름을 검색했더니 내 글이 떠서 어찌어찌해서 구독신청까지 했대. 근데, 그 후로 한 번도 내 글을 안 읽었어. 나 참. 그래서 다행이다 싶었지. 매번 읽고 댓글까지 달까 봐 걱정했네.
점: 걱정도 참. 사람들이 얼마나 살기에 바쁘냐. 현실 언니가 그 정도인데. 조회수와 구독자가 십의 자리를 못 넘어가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지어다!
이: You can say that again!
점: 또 영어 쓴다. 그만해!
이: 널, 골려주는 게 재밌네. 히히. 적어도 너랑은 실컷 떠들고 있잖니? 세상에 돈 들어가는 취미생활도 많은데 이건 뭐, 돈도 안 들고 얼마나 좋아. 아, 너랑 노는 게 아니라 브런치스토리에 글 쓰는 걸 얘기하는 거다.
점: 네~. 맘껏 해 보슈.
이: 좋아. 그럼 너도 동의하는 거다?
점: 갑자기, 무슨 동의야?
이: 이 매거진은 둘이 같이 하는 걸로?
점: 왜, 점선면이 혼자 하는 게 아닌 거야? 내가 말하는 게 아니었어?
이: 둘이 같이 하자.
점: 세상,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매번 이렇게 둘이 떠들자고? 이제까지 브런치에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건 한 번도 못 봤어. 정말 막 가려고 하고 있네.
이: 워~ calm down 하셔. 자고로 대화는 두 사람의 긴장을 촉발할 수 있는 좋은 장치이며. (목소리 근엄해지는 중), 산문의 형태보다도 먼저 대중에게 사랑받은 문학의 장르로, 바로 그리스 비극을 들 수 있겠다.
점: 그니까, 너랑 나랑 같이? 이렇게?
이: 오. You got it!
점: 아호. 그 영어 좀 그만 써. 여기 영어 울렁증 있는 사람들 많을 수 있다고. 처음부터 미운털 박힌다, 너.
이: 미안, 짧은 단문만 영어로 말한다는 영어교사의 애환이랄까, 직업병이랄까.
점: 그래. 미움받을 용기도 때론 필요하지. 근데 나까지 싸잡아 미움받을까 봐 그런다. 너는 맘대로 떠드시되, 나의 품위는 훼손시키지 말아 줘. 이제까지 브런치북하나, 매거진 하나에서 나는 꽤나 진지했었다고.
이: 그러니까, 내가 제목을 도전이라고 붙였지, 친구야.
점: 흠. 그런 뜻인 거야? 부제목은 뭐야? 이것도 영어야, 참.
이: 수의를 벗겨내고 가게 하라는 뜻이야.
점: 자세히.
이: 나중에.
점: 나중 언제?
이: 이 매거진 어느 대목쯤엔가.
점: 너, 앞으로 어떻게 하려는 거니?
이: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친구야. 가다 보면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