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점선면(이하 점): 흠, 제목이 너무 낚시성 아닌가?
이李씨(이하 이): 브런치 입문 3개월 차 학습의 결과라고나 할까?
점: 그렇게 관심받고 싶은가?
이: 아니, 난 유명해져도 아무도 날 못 알아보기를 원한다니까. 이 매거진은 일종의 실험이니까, 뭐가 먹히는지 한번 던져보는 거야.
점: 그럼, 저 제목을 어떻게 책임질 건데.
이: 아예, 거짓부렁은 아니니까. 조금 기다려봐.
후우~. 그럼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설說 풀어볼게.
때는 2005년 추석연휴의 마지막 날, 2002년생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네 살 된 아들과 7개월 된 딸, 남편 이렇게 넷이서 콧바람 쐴 겸 서울 어린이대공원엘 갔지.
입구 근처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한 무리의 이질적인 사람들이 있더군.
책에서 사진으로나 봤던 북아메리카 인디언 외모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긴 악기들로 연주를 하는데, 한동안 우리 가족들이 같이 서서 연주를 지켜봤어. 그게 그날의 비극의 단초가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대공원 어느 지점에서 우리 가족은 멈췄고 남편이 안고 다니던 딸을 유모차에 앉히고 버클을 끼운다고 나와 남편이 딸에게 몸을 기울이고는 일어났지.
그
런
데
아들이 사라지고 없는 거야.
점: 아이코!
이: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 알지?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 심장이 쿵 떨어진다는 말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 이상하게 심박수는 로켓처럼 솟아올라서 머릿속에서 맥박이 쿵쿵 울리는 기분. 그게 동시에 일어나는 거야.
거의 반자동적으로 내가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다니고 있더라고, 정신을 차리니.
'네 살 된 남자아이 못 보셨어요? 하늘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는데. 혹시 남자아이 못 보셨어요?'
남편이 유모차를 밀면서 나를 따라와서는 진정시키고, 딸과 같이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있으라고 하더군.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고, 처음 있던 자리로 가 있으려니, 그제야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어. 그런데, 그 시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는 거야.
같이 걱정해 주는 마음으로 쳐다봤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온통 다 비난의 시선처럼 느껴져서.
아이고, 어쩌다 아이를 잃어버리나, 좀 잘 챙기지, 부모가 되어서 그렇게 소홀하니, 이런 데서는 아이 간수를 더 잘해야지... 하는 어느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지만, 내 귀에는 증폭되어 울리는 그 비난의 소리들이 마치 창처럼 내려 꽂히는 기분.
거기서 기다리는 동안, 내 생각은 죄책감과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한 시련으로 가득 찰 내 미래와, 고난으로 점철된 아이의 미래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 뭐든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하는 못된 습성이 그때처럼 괴로울 때도 없었어.
점: 하여간, 감정과 정신력을 그런데다 쓰는 건, 딱하다. 하여간!
어쨌든 아들을 찾았으니까 네가 지금 이런 얘기를 쓰는 거겠지?
이: 그 숨 막히는 괴로움은, 같은 입장이 아니면 모를 거야. 아직도 그런 시간을 견디며 통과하고 있는 부모님들이 여기서 내 말을 듣는다면, 나는 참 죄송스러울 것 같아.
점: 어떻게 찾았어?
이: 찾았다기보다는, 아들이 제 발로 걸어왔지. 아주 해맑은 웃음을 웃으면서.
점: 호~오.
이: 즐겁게 돌아온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한테 붙들려 몇 번 가벼운 주먹질을 당한 후, 오열하는 엄마를 쳐다봐야 했지.
점: 아들이 헤어진 곳을 기억하고 있었나 봐. 어디 멀리로 안 가고 그곳에 있기를 잘했네.
이: 남편의 생각이 옳았어. 아이가 기억을 하고 있었던 거더라고. 만약 우리가 그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갔으면, 그때야 말로 우리 아들이 울 순서였지, 사라진 가족을 부르면서.
아들은 인디언악단이 탄 트럭이 지나는 것을 보고 쫓아가다가, 다행히 어느 시점에서 우리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온 거였어.
점: 인생의 큰 경험을 했네.
이: 정말, 그랬어. 한 번 그러고 나니,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더라고.
사춘기를 지나며 아들이 부모인 우리들과 거리를 둘 때도. 잃었을 수도, 그래서 우리 곁에 없었을 수도 있었던 아들이다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괜찮아졌지.
그리고, 또 하나의 상상. 부쩍부쩍 자라면서 외모도 체격도 달라지는 아들을 보면서, 만약 그때 우리가 헤어졌고, 어느 날 다시 어느 곳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과연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생각했지.
점: 아이코. 참. 아들이 이 씨나 남편을 닮았으면 가능하지 않겠어?
이: 무심히 집안을 오가는 아들을 쳐다보면서 우리는 서로 닮았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만나면 어떤 혈연의 사인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지.
어렸을 때, 전국적인 '6.25 이산가족 찾기'행사가 TV로 중계되었었어. 드라마에도 이산가족얘기가 종종 나왔고.
왜, 그런 거 있잖아. 시청자들은 둘이 가족인걸 알고 있는데, 정작 드라마에 나오는 당사자들은 한 가족인 걸 모르고 그냥 지나치거나 할 때. 얼마나 안타까왔는지.
점: 그런데, 왜 부제에다 아들을 찾고서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했어? 감사하게 여기며 잘 살아온 것 같은데.
이: 나처럼 어느 날 아들을 잃었지만, 결국은 생의 마지막에 순간에야 아들을 만난 엄마의 이야기를 읽었어.
점: 무척 괴로운 시절을 보냈겠군. 그런데 왜 고통의 시작인 거야. 어쨌거나 아들을 만나기는 했는데.
이: 엄마는 임종의 자리에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을 만나지. 따뜻하고 안아주고, 미안하다고, 잘살아주고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세상을 떠나.
점: 흠... 뭔가 너무 아름다워서..... 반전이 있을 것 같은데......
이: 눈치챘구나. 그렇게 그녀의 임종을 지킨 소년은 진짜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어. 아들의 역할을 한 다른 소년이 있었던 거지.
점: 와, 어쩌다가 그렇게. 그럼 그냥 대역을 고용한 거네? 마지막 가는 길,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이: 그녀의 남편이 부탁해서 그런 역할을 했던 거지.
점: 그럼, 진짜 아들은 찾지도 못했던 거야?
이: 아니, 찾았지. 그녀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
점: 이건 뭐. 진짜 아들을 찾았는데, 아내의 임종에는 다른 소년을 보낸다, 마치 아들인 것처럼 행세하라고 주문까지 해서?
이: 그 사연 때문에 두 소년이 서로를 알게 되지. 아들 행세를 한 소년 선윤재, 그리고 진짜 아들 윤이수.
점: 윤이수의 아빠가 윤이수를 아들로 소개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군. 그리고 그게 윤이수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배신이었겠고.
이: 그래, 윤이수의 아빠는 아들을 만나고서 크게 실망했어. 자신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모습들 때문에. 그래서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되지.
선윤재는 이 과정의 관찰자이자, 두 사람이 벌이는 사건들에 깊게 연관되어서, 끝내는 자기 목숨을 거는 모험까지 하게 되고.
점: 아. 찾았다. 윤이수와 선윤재의 이야기. 작가 손원평 님의 소설 '아몬드'구만요. 이건 선윤재가 '감정표현 불감증(알렉시티마)'을 가진 소년이어서 화제가 된 소설 아닌가?
이: 물론 그렇기 한데, 서두에 말했잖아.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 나는 윤이수를 잃어버리고 나서 극한의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윤이수의 어머니라는 등장인물에 더 마음이 갔다고.
그리고,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묻고 싶은 거야. 음, 아버지도 포함해서.
잃었던 자식이 내가 생각하고 그렸던 것과는 다른 결의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얼마만큼 그 자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건 꼭, 자식을 잃어봐서만 던져볼 질문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
내 몸의 일부였던 내 자식이 나의 바람대로 성장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녀를 수용해 줄 수 있을까?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
나의 욕심과 기준을 내려놓고,
너의 삶을 살아가라고,
그렇게 부드럽고도 힘 있게 자녀의 인생을 응원해 주는 모습, 어떨까?
점: 너무 낭만적이기만 한 거 아니야? 윤이수 아빠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오래 만에 찾은 아들이 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성장하도록 아빠의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일 텐데.
이: 그래, 내가 좀 감상적으로 간 것 같네. 허나, 점씨가 하는 말에는 조금 반박하고 싶어.
윤이수의 아빠는 그래도 이수를 아들로 반겨맞았어야 했어. 그 아이의 모습, 교육 정도, 생활 습관, 아이가 처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거니까, 아이를 탓할 수는 없는 거잖아.
윤이수에게는 모든 그의 흠결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그를 아들로 인정해 줄 아빠가 필요했다고 봐.
점: 그게 쉽지는 않겠지.그리고, 소설의 특성상 갈등을 만들어야.
이: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아버지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거야.
성경에 왜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오겠니?
모든 과오와 실수,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
사람들은 결국 그런 사랑에 목말라하는 거라고.
제목의 의미를 마무리 지을게.
내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분량이 적으면,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수용력이 작으면, 다른 이의 허물이 클 수 게 느껴질 수밖에.
윤이수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했던 아들의 이상적 모습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아들의 모습을 용납하고 아들을 품는데, 실패했고, 이것이 결국 본인과 아들에게 큰 고통과 갈등을 시작하게 했지.
존재를 부인당한 윤이수가 상처받고 광분하여 아빠에게 반항하지.
우리, 자식을 괴롭히는 부모가 되지는 말자. 돌아온 탕자를 품은 아버지처럼 된다면 좋고요.
점: 흠. 이 씨의 자기 선언 잘 들었고요.
이쯤, 사족 하나 보태고 마무리하는 거 어때?
감정표현불감증을 가진 소년 선윤재의 서사도 무척 재미있으니, 안 읽어보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소설 아몬드 영문판 ALMOND(HARPERVIA)/ 100만부 기념판 아몬드(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