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점선면 May 31. 2023

잃었던 아들을 찾았더니

또 다른 고통의 시작

9점선면(이하 점): 흠, 제목이 너무 낚시성 아닌가?

이李씨(이하 이): 브런치 입문 3개월 차 학습의 결과라고나 할까?


: 그렇게 관심받고 싶은가?

: 아니, 난 유명해져도 아무도 날 못 알아보기를 원한다니까. 이 매거진은 일종의 실험이니까, 뭐가 먹히는지 한번 던져보는 거야.


: 그럼, 저 제목을 어떻게 책임질 건데.

: 아예, 거짓부렁은 아니니까. 조금 기다려봐.

후우~. 그럼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설說 풀어볼게.


때는 2005년 추석연휴의 마지막 날, 2002년생 그러니까 우리나라 나이로 네 살 된 아들과 7개월 된 딸, 남편 이렇게 넷이서 콧바람 쐴 겸 서울 어린이대공원엘 갔지.


입구 근처에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한 무리의 이질적인 사람들이 있더군.


책에서 사진으로나 봤던 북아메리카 인디언 외모의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긴 악기들로 연주를 하는데, 한동안 우리 가족들이 같이 서서 연주를 지켜봤어. 그게 그날의 비극의 단초가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대공원 어느 지점에서 우리 가족은 멈췄고 남편이 안고 다니던 딸을 유모차에 앉히고 버클을 끼운다고 나와 남편이 딸에게 몸을 기울이고는 일어났지.



아들이 사라지고 없는 거야.


: 아이코!

: 하늘이 노래진다는 말 알지?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 심장이 쿵 떨어진다는 말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데 이상하게 심박수는 로켓처럼 솟아올라서 머릿속에서 맥박이 쿵쿵 울리는 기분. 그게 동시에 일어나는 거야.


거의 반자동적으로 내가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소리치며 다니고 있더라고, 정신을 차리니.


'네 살 된 남자아이 못 보셨어요? 하늘색 티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는데. 혹시 남자아이 못 보셨어요?'


남편이 유모차를 밀면서 나를 따라와서는 진정시키고, 딸과 같이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가 있으라고 하더군.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고, 처음 있던 자리로 가 있으려니, 그제야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느껴졌어. 그런데, 그 시선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는 거야.


같이 걱정해 주는 마음으로 쳐다봤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온통 다 비난의 시선처럼 느껴져서.


아이고, 어쩌다  아이를 잃어버리나, 좀 잘 챙기지, 부모가 되어서 그렇게 소홀하니, 이런 데서는 아이 간수를 더 잘해야지... 하는 어느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지만, 내 귀에는 증폭되어 울리는 그 비난의 소리들이 마치 창처럼 내려 꽂히는 기분.


거기서 기다리는 동안, 내 생각은 죄책감과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한 시련으로 가득 찰 내 미래와, 고난으로 점철된 아이의 미래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 뭐든 최악의 경우를 먼저 생각하는 못된 습성이 그때처럼 괴로울 때도 없었어.


: 하여간, 감정과 정신력을 그런데다 쓰는 건, 딱하다. 하여간!

어쨌든 아들을 찾았으니까 네가 지금 이런 얘기를 쓰는 거겠지?


: 그 숨 막히는 괴로움은, 같은 입장이 아니면 모를 거야. 아직도 그런 시간을 견디며 통과하고 있는 부모님들이 여기서 내 말을 듣는다면, 나는 참 죄송스러울 것 같아.


: 어떻게 찾았어?

: 찾았다기보다는, 아들이 제 발로 걸어왔지. 아주 해맑은 웃음을 웃으면서.

: 호~오.


: 즐겁게 돌아온 아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나한테 붙들려 몇 번 가벼운 주먹질을 당한 후, 오열하는 엄마를 쳐다봐야 했지.

: 아들이 헤어진 곳을 기억하고 있었나 봐. 어디 멀리로 안 가고 그곳에 있기를 잘했네.


: 남편의 생각이 옳았어. 아이가 기억을 하고 있었던 거더라고. 만약 우리가 그곳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갔으면, 그때야 말로 우리 아들이 울 순서였지, 사라진 가족을 부르면서.


아들은 인디언악단이 탄 트럭이 지나는 것을 보고 쫓아가다가, 다행히 어느 시점에서 우리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온 거였어.


: 인생의 큰 경험을 했네.

: 정말, 그랬어. 한 번 그러고 나니,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더라고.


사춘기를 지나며 아들이 부모인 우리들과 거리를 둘 때도. 잃었을 수도, 그래서 우리 곁에 없었을 수도 있었던 아들이다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괜찮아졌지.


그리고, 또 하나의 상상. 부쩍부쩍 자라면서 외모도 체격도 달라지는 아들을 보면서, 만약 그때 우리가 헤어졌고, 어느 날 다시 어느 곳에 우연히 마주쳤을 때 과연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생각했지.


: 아이코. 참. 아들이 이 씨나 남편을 닮았으면 가능하지 않겠어?

: 무심히 집안을 오가는 아들을 쳐다보면서 우리는 서로 닮았나? 알아볼 수 있었을까? 만나면 어떤 혈연의 사인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생각했지.


어렸을 때, 전국적인 '6.25 이산가족 찾기'행사가 TV로 중계되었었어. 드라마에도 이산가족얘기가 종종 나왔고.


왜, 그런 거 있잖아. 시청자들은 둘이 가족인걸 알고 있는데, 정작 드라마에 나오는 당사자들은 한 가족인 걸 모르고 그냥 지나치거나 할 때. 얼마나 안타까왔는지.


: 그런데, 왜 부제에다 아들을 찾고서 고통이 시작되었다고 했어? 감사하게 여기며 잘 살아온 것 같은데.


: 나처럼 어느 날 아들을 잃었지만, 결국은 생의 마지막에 순간에야 아들을 만난 엄마의 이야기를 읽었어.


: 무척 괴로운 시절을 보냈겠군. 그런데 왜 고통의 시작인 거야. 어쨌거나 아들을 만나기는 했는데.

: 엄마는 임종의 자리에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아들을 만나지. 따뜻하고 안아주고, 미안하다고, 잘살아주고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인사하고 세상을 떠나.


: 흠... 뭔가 너무 아름다워서..... 반전이 있을 것 같은데......

: 눈치챘구나. 그렇게 그녀의 임종을 지킨 소년은 진짜 그녀의 아들이 아니었어. 아들의 역할을 한 다른 소년이 있었던 거지.


: 와, 어쩌다가 그렇게. 그럼 그냥 대역을 고용한 거네? 마지막 가는 길,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 그녀의 남편이 부탁해서 그런 역할을 했던 거지.

: 그럼, 진짜 아들은 찾지도 못했던 거야?


: 아니, 찾았지. 그녀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에.

: 이건 뭐. 진짜 아들을 찾았는데, 아내의 임종에는 다른 소년을 보낸다, 마치 아들인 것처럼 행세하라고 주문까지 해서?


: 그 사연 때문에 두 소년이 서로를 알게 되지. 아들 행세를 한 소년 선윤재, 그리고 진짜 아들 윤이수.

: 윤이수의 아빠가 윤이수를 아들로 소개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군. 그리고 그게 윤이수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배신이었겠고.


: 그래, 윤이수의 아빠는 아들을 만나고서 크게 실망했어. 자신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모습들 때문에. 그래서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되지.


선윤재는 이 과정의 관찰자이자, 두 사람이 벌이는 사건들에 깊게 연관되어서, 끝내는 자기 목숨을 거는 모험까지 하게 되고.


: 아.  찾았다. 윤이수와 선윤재의 이야기. 작가 손원평 님의 소설 '아몬드'구만요.  이건 선윤재가 '감정표현 불감증(알렉시티마)'을 가진 소년이어서 화제가 된 소설 아닌가?


: 물론 그렇기 한데, 서두에 말했잖아.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  나는 윤이수를 잃어버리고 나서 극한의 고통의 시간을 보냈던 윤이수의 어머니라는 등장인물에 더 마음이 갔다고.


그리고,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묻고 싶은 거야. 음, 아버지도 포함해서.


잃었던 자식이 내가 생각하고 그렸던 것과는 다른 결의 사람이 되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어떻게, 얼마만큼 그 자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건 꼭, 자식을 잃어봐서만 던져볼 질문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


내 몸의 일부였던 내 자식이 나의 바람대로 성장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녀를 수용해 줄 수 있을까?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를 사랑한다는 것,

나의 욕심과 기준을 내려놓고,

너의 삶을 살아가라고,

그렇게 부드럽고도 힘 있게 자녀의 인생을 응원해 주는 모습, 어떨까?


: 너무 낭만적이기만 한 거 아니야? 윤이수 아빠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오래 만에 찾은 아들이 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성장하도록 아빠의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일 텐데.


: 그래, 내가 좀 감상적으로 간 것 같네. 허나, 씨가 하는 말에는 조금 반박하고 싶어.


윤이수의 아빠는 그래도 이수를 아들로 반겨맞았어야 했어. 그 아이의 모습, 교육 정도, 생활 습관, 아이가 처한 환경에서 만들어진 거니까, 아이를 탓할 수는 없는 거잖아.


윤이수에게는 모든 그의 흠결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그를 아들로 인정해 줄 아빠가 필요했다고 봐.


: 그게 쉽지는 않겠지.그리고, 소설의 특성상 갈등을 만들어야.

: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아버지상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 거야.

성경에 왜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오겠니?

모든 과오와 실수, 미련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

사람들은 결국 그런 사랑에 목말라하는 거라고.


제목의 의미를 마무리 지을게.


내가 베풀 수 있는 사랑의 분량이 적으면, 내가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수용력이 작으면, 다른 이의 허물이 클 수 게 느껴질 수밖에.


윤이수의 아빠는 자신의 생각했던 아들의 이상적 모습과는 한참 멀리 떨어진 아들의 모습을 용납하고 아들을 품는데, 실패했고, 이것이 결국 본인과 아들에게 큰 고통과 갈등을 시작하게 했지.


존재를 부인당한 윤이수가 상처받고 광분하여 아빠에게 반항하지.


우리, 자식을 괴롭히는 부모가 되지는 말자. 돌아온 탕자를 품은 아버지처럼 된다면 좋고요.


: 흠. 이 씨의 자기 선언 잘 들었고요.

이쯤, 사족 하나 보태고 마무리하는 거 어때?


감정표현불감증을 가진 소년 선윤재의 서사도 무척 재미있으니, 안 읽어보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소설 아몬드 영문판 ALMOND(HARPERVIA)/ 100만부 기념판 아몬드(창비)






매거진의 이전글 서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