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영어가 신기하고 재밌었다. 중학교 때 즈음에는 국어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되어 있었다. '교환학생'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엄마한테 졸랐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며칠 뒤에, '우리가 그럴 사정까지는 되지 않아 보내줄 수 없다. 미안하다."고 대답하셨다. 그냥 "그렇구나, 아쉽다." 싶으면서도 사실 어린 나의 요구를 진지하게 시간을 들여 생각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미국에 사는 할아버지가 10여 년 전에 우리 가족에게 신청해 둔 미국 가족 초청 비자가 승인 됐다. 그 말은 미국 영주권이 생겨 미국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사는 것은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유학은 항상 멋있어 보이는 도전이었다. 우리 가족은 각자 한국에서의 삶이 바빠 갑자기 나오게 된 영주권에 당장 미국행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나는 문과생이었고 당시 취업난에 졸업 후를 생각하면 항상 막막했기 때문에, 유학이라도 다녀와서 경쟁력을 키우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니던 학교를 휴학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캘리포니아 주는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 - CC) 제도가 잘 되어 있어 2년 간 좋은 성적을 유지하면 University of California (UC) 계열 학교에 쉽게 편입(Transfer)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빠에게 얘기했더니 아빠는 왜 한국 학교에서 바로 편입은 되지 않느냐고 하셨다. 나는 그런 확률은 애초에 받는 자리가 적어 낮다고 대답했는데, 왜 해보지도 않고 안 되냐고 하시면서 CC 학교를 반대하셨다. 그래서 나는 1년간 휴학하면서 편입 지원서를 준비하고 필요한 토플 성적을 만들기로 했다. 강남의 토플 학원에 다니며 원하는 성적을 얻고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지원한 학교는 전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어 성적은 수능 최저처럼 지원 자격을 얻기 위한 것이라 커트라인만 넘으면 될 뿐 입학 당락에는 큰 영향이 없었을 것 같고, 편입을 위해서는 한국 학교에서 들은 수업이 편입 조건에 맞았어야 했는데 그걸 뒷받침해 주는 서류도 없이 내가 들은 수업들이 그걸 충족한다고 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유학원의 도움도 없이 인터넷에 있는 정보만 가지고 혼자 준비했기 때문에 이런 자세한 편입 절차에 대해서는 그때의 나로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편입 후에 4살 어린 친구들과 같이 공부하면서 이때 늦어진 1년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1년을 그렇게 허비하고 CC로 드디어 가기로 결정한 뒤의 일이다. 아빠가 나와 동갑인 사촌(할아버지가 고모네도 이민 초청)도 CC에서 UC로 편입이 쉬워서 CC로 간다고 했다. 아빠는 마치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는 듯 그리고 그걸 알아낸 사촌이 대단하다는 듯 얘기했다. '내가 말할 때는 제대로 듣지도 않고 흘려보낸 정보가 내 사촌이 말할 때는 대단한 정보가 되는구나...' 솔직히 절망스러웠다. 내 잃어버린 1년 때문에 정말 화가 났지만 이미 1년은 지난 후였다. 하지만 당시에도 나중에도 아빠한테 어떤 부당한 소리를 들어도 나는 대든다거나 큰 소리를 내 본 적이 없다. 마음이 너무 힘들면 그저 울 뿐이었다.
지금은 아빠와는 연락을 끊은 지 몇 년이 됐는데 아빠와는 기본적인 대화 자체가 되지 않았다. 정말 평범한 대화 중에, "아빠, 아는 친구의 친구한테 들었는데, 그 학교 가면 차는 필요 없대요."라고 했다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 말을 듣고 아빠가 틀렸다며 바락 바락 대드는 딸로 몰려 세상천지 불효자가 돼서 미국 한인마트 식당가 한가운데서 몇십 분 동안 히스테릭한 언행을 듣고 있어야 하는 지경이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할 때쯤, 내가 살아야 해서 아빠와는 연락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나도 많고 아직도 상처지만 그냥 개인사로 묻어두겠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은 그 어떤 누구라도 설령 그것이 부모일지라도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다면 인연을 끊어서라도 적어도 나는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2013년 가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CC 학비는 저소득층에게는 무료이다. 나는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모의 소득을 보지 않고 내 소득이 낮으면 학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은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경제적으로도 독립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또 부모 소득 증명은 미국에서의 세금 보고 서류 등이 필요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내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의 숙소는 캘리포니아 엘에이 근처에 있는 새 할머니의 언니 집에 있게 됐다. 고모네도 처음에는 그 집에서 생활했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시세보다 월세를 적게 냈다. 그럼에도 용돈은 항상 부족했다. 나는 4형제 중 둘째다.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이 죄송스러워서 힘들어도 웬만하면 더 달라는 말은 하지 않고 무조건 아껴 썼다. 물론 이 정도라도 지원받을 수 있던 것에 감사하다. 하지만 사실 영주권이 없었더라면 나는 미국 유학은 전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