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유학, 이민이 그렇겠지만 미국에 도착해 보낸 첫 2년은 참 힘들었다. 그때는 아직 어려서 그랬는지 아무것도 없으면서 일단 가서 열심히 살면 되겠지,라는 생각 하나로 미국에 간 게 정말 무대뽀 정신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한국에 있었어도 젊음 하나 빼고는 어차피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지도 모르겠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엘에이에 도착했다. 미국에 가니 가족도, 돈도, 집도 없는 천애 고아 신세가 되어 버렸다. 처음 신세 아닌 신세를 지게 된 곳은 엘에이 다운타운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새 할머니의 언니 집이었다.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었는데 남편과는 사별했고 하나뿐인 딸은 근처 어딘가에서 독립해 살고 있다고 했다. 처음 도착한 날, 엄마가 넉넉지 않은 형편에 내 손에 들려 보내 준 월세 봉투를 드렸는데 아무 말 없이 그냥 웃으면서 받으셨다. 나중에 다른 월세집을 찾아 나갈 때 뒷말을 하시면서 그때 자기가 별말 없이 받았지만 너무 적은 돈이었다며 불평하셨다. 어르신들끼리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일도 처음이고 친척 비슷한 집안 어르신 집이어서 월세를 내야 하는 것인지도 잘 몰랐다. 아마 엄마도 그러셨을 것 같은데 그래도 남의 집에 신세 진다고 성의를 보내신 거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어서 속상했다. 지금 생각하면 월세 같은 이야기는 내가 미국에 가기 전에 어르신들끼리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중요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서로 다른 기대에 서로 실망했던 것 같다.
사실은 나도 웬만하면 아는 사람 집에서 계속 있고 싶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종종 나를 세워두고 다양한 불평불만을 길게 늘여놓으셨다. 딸과 불화가 있는 이야기. 사별한 남편이 작고하시기 전에 일본 여자와 바람이 났던 일. 이후 남편에게서 사과가 아닌, 너랑 사는 것이 고약했다는 욕을 들은 이야기. 심지어는 예전에 젊을 때 한국에서 만난 남자 얘기까지. 이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자신이 젊은 시절 염문을 뿌렸던 남자들 이야기였는데 자주 하시기도 했고 당시 사진도 보여주시면서 열정적으로 얘기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온 20대 초반이었던 나를 보니 그런 시절이 있던 자기 자신도 생각이 나셨을까 싶기는 하다. 그런데 이야기는 한 번 시작하면 끝이 없었고, 나는 차마 어르신의 말을 끊고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편도로 1시간 넘게 걸리는 엘에이 다운타운이나 이곳저곳 다양한 일 처리를 가실 때 항상 내게 같이 갈지 물어보셨는데 내 성격에 그때마다 거절을 하기도 힘들었다. 또 전기세, 수도세에 굉장히 민감하셔서 저녁에 TV를 제외하면 집안에 불을 켜 두는 일이 없으셨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손빨래를 할 일이 있어서 물을 조금 오래 쓴 적이 있었는데 나와보니 할머니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 뭐 때문에 그렇게 오래 있었냐며 캐물으셨다. 사실 생리가 속옷에 새서 혼자 처리하려고 했던 것이라 대충 둘러 대느라 곤란했다. 또 저녁에 화장실에 잠깐 갔다 왔더니 그새 할머니가 내 방에 다녀가 불을 꺼 둔 일도 있었다. 그 뒤로는 화장실을 갈 때는 항상 불을 끄고 갔다. 그렇게 집에 있을 때마다 매 순간 눈치를 보게 됐다. 또 그 집은 에어컨도 고장 나 있었다. 엘에이의 여름은 정말 더웠다. 하루는 너무 더워서 침대에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너무 더워서 어딘가로 피신을 가고 싶어도 당장 차도 없고 갈 데도 없어서 그저 침대 위에 늘어져 잠만 잤다. 그랬더니 머리가 너무 아팠는데 그때 처음으로 더위라는 걸 먹어봤다. 또 할머니는 주방을 쓰지 못하게 하셔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여의치 않으면 그냥 굶는 일도 있었다. 할머니는 퇴직 전에 빨래방을 하셨기 때문에 세탁도 전적으로 본인이 하시겠다 해서 그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한마디로 엘에이 할머니 집에 있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었고 전체적으로 내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인 커뮤니티에서 방 렌트 글을 알아봐서 방을 구하는 대로 이사를 갔다.
내 기억으로는 그곳에서 2달은 지내고 3달은 채 못 채우고 이사를 갔던 것 같다. 그때는 할머니가 남은 거라며 주신 오래된 피쳐폰을 썼기 때문에 아쉽게도 사진도 기록도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