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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크네 Mar 02. 2024

<빨강머리 앤>보다 <뉴문의 에밀리>가 좋은 이유

루시 모드 몽고메리와 그의 작품들

문학소녀 출신들에게는 공통지인이 있다. <작은 아씨들>의 마치가문 네 자매,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애벗, <소공녀>의 세라 크루, 그리고 <빨강머리 앤>의 앤 셜리. 이들 중 앤 셜리는 문학소녀들이 성인이 된 후에도 인연이 이어지는 인상 깊은 지인이다. 끝에 E자가 붙은 앤 셜리 양은 스티커와 다이어리, 머그컵 속에서 “지금은 생업으로 고달프다 해도 넌 한때 문학소녀였어!”라고 외치고 있다.


나 또한 앤을 잊지 못한다. 그 증거로 지금 쓰고 있는 마우스 패드는 노란색과 빨강색 꽃에 둘러싸인 소녀시절의 앤이고, 책장에는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삶을 그의 고향인(그리고 소설의 배경인) 프린스에드워드 섬과 엮은 <빨강머리 앤이 사랑한 풍경>이 꽂혀있다. 때때로 추억이 고플 때면 일본에서 제작된 세계명작극장 <빨강머리 앤>을 보며 시간을 죽이기도 한다. 앤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는 모양이다.


그 특별함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앤 셜리는 개성 있고 매력적인 소녀다. 사고뭉치에 낭만적이고 천진한 수다쟁이. 고집이 세고 무모하지만 씩씩하고 아량 있고 순수하다. 입양된 초록색 지붕 집(정확히 말하면 ‘초록 박공 집’)에서 온갖 사고를 쳐 커슈버트 남매를 기함하게 하지만, 늙어가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을 하게 해준 사랑스러운 소녀다.


그 소녀가 선사한 추억은 무궁무진했다. 앤을 처음 만난 건 위에서 언급한 세계명작극장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이었다. 실로폰 소리가 인상적인 오프닝이 울려 퍼지면 나는 (문학소녀 DNA를 물려준) 엄마의 무릎에 앉아 TV에 시선을 고정하곤 했다. 지브리 풍의 그림체와 서정적인 풍경들, 클래식한 배경음악들이 아기자기한 에피소드와 꼭 어울렸다. 나는 앤이 처음 초콜릿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과 교회소풍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을 좋아했다. 다이애나와 미니 메이의 통통한 뺨이 귀여웠고, (수업시간에 제자에게 구애를 하는) 역겨운 필립스 선생이 퇴직하고 새로 부임한 뮤리엘 스테이시 선생님을 앤과 일심동체가 되어 존경했다. 그리고 길버트 블라이스를 좋아했다. 고백하자면, 그는 내 첫사랑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빠가 문고판 <빨강머리 앤>을 사주었다. 조악한 일러스트가 향수에 초를 치기는 했지만 완역버전을 소화하기에 어렸던 나에게 아주 적당한 축약본이었다. 나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지금은 간데없는 책이지만 기억 속 마지막 모습은 모서리가 닳고 여기저기 얼룩이 져 넝마 같은 꼴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을에 처음으로 공립도서관이 생겼다. 나는 꼬박꼬박 출석했다. 학교에서는 흐리멍덩한 눈을 한 놈팽이에 불과했지만 도서관에서는 사냥꾼처럼 기민했다. 사냥감을 찾아 서가를 어슬렁거리던 나는 <비밀의 화원>과 <톰소여의 모험>사이에서 완역본 <빨강 머리 앤>을 발견했다. 환상적이게도 그 옆에 <에이번리의 앤>과 <레드먼드의 앤>이 함께 꽂혀있었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드디어 앤과 길버트가 결혼하는 걸 볼 수 있다!


아, 물론 완역본의 미덕은 로맨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축약본에서 빠진 원작의 에피소드가 모두 실려 있고 주석이 많았으며(당시에 나는 주석이 많은 소설을 좋은 책으로 규정했다. 책에 있어서는 제법 잘난척쟁이였다.) 발로 그린 듯한 일러스트도 없었고 무엇보다 두꺼워서 오랫동안 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세 권을 낚아채 집에 데려왔고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책장을 넘기며 깔깔거렸다.


앤과의 추억은 이어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도 한량처럼 학교생활을 하던 나는 야간자율학습시간마다 <상실의 시대>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팔랑거리는 사이사이에 일러스트레이터 ‘인디고’의 삽화가 수록된 <빨강머리 앤>을 읽었다. 어른이 된 후에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삶을 추적했고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이때 처음으로 소설 배경이 캐나다라는 걸 인지했다. 참 빠르기도 하지.) 앤은 나에게 질리지 않는 콘텐츠였다.


지금도 앤은 내 좋은 친구다. 아니, 나의 스타다. 보통 친구의 굿즈를 사는 데에 돈을 쓰지는 않으니까. 앤은 나를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스티커와 엽서, 노트, 마우스 패드를 사는 데에 20만원을 넘게 쓴 서른세 살 여자로 만들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는데, 일단 내가 행복하니 되었다.


하지만, 솔직히 더 이상 앤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앤 시리즈를 펼친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할 지경이니까.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추억의 편린, 어린 시절의 노스텔지어다. 작가 루시모드 몽고메리가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앤을 탄생시킨 작가 몽고메리는 행복해지고 싶어 평생을 발버둥 치며 살다 간 불행한 사람이었다. 앤 시리즈는 그 발버둥 중 하나였다.


몽고메리는 평생을 우울증과 싸웠다. 그의 곁에는 부모가 없었고, 성마르고 차가운 친인척들이 예민하고 낭만적인 고아소녀 몽고메리에게 끝없이 상처를 주었다. 언젠가 보답을 받으리라는(보는 이에게 절로 연민을 자아내는) 희망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었지만 돌아온 것은 냉소와 무시뿐이었다. 삼십대의 나이에 원가족을 떠나 결혼을 했지만 공교롭게도 배우자는 몽고메리보다 훨씬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다. 결혼에는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의무가 따라온다. 몽고메리는 평생 남편을 돌보았다.


<빨강머리 앤>은 마치 눈물로 젖은 얼굴로 짓는 억지미소 같다.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웃는 모양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두 눈은 슬프다. 기억조차 없는 어머니,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아버지, 그를 구박한 새어머니, 많은 걸 희생해 끝까지 돌보았지만 변변한 사랑 한 조각 돌려주지 않은 조부모.


‘앤 시리즈’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훌륭한 고전이고, 몽고메리의 밝은 면이 담긴 진실된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이전만큼 앤을 사랑하지 않는다. 애정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옮겨갔다. 바로 몽고메리라는 작가에게로. 그리고 ‘앤 시리즈’보다 작가의 삶이 반영된 ‘에밀리 시리즈’에게로.


시리즈의 첫 책인 <뉴문의 에밀리 Emily of New Moon>는 1923년도에 출간되었다. ‘앤 시리즈’를 통해 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후이자 작가의 중년기에 집필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셜리 양처럼 굳이 끝에 E자를 붙여달라고 주변에 요청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에밀리 버드 스타’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까. 전해지기로 주인공의 캐릭터는 몽고메리가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영감을 받아 창조했다고 한다. 자전소설임을 추측할 만한 대목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소설의 시작부분에서 에밀리는 아버지를 잃고 친척집에 맡겨진다. 10살도 채 되지 않아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것이다. 에밀리가 맡겨진 초승달농장New Moon에는 엘리자베스 이모, 로라 이모, 지미 삼촌이 살고 있다. 이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농장에서 에밀리는 성장하고 꿈을 꾸고 사랑을 한다.


언뜻 앤 시리즈와 비슷한 흐름이지만 작품의 색깔은 정반대이다. '앤 시리즈'가 햇살이라면 '에밀리 시리즈'는 달빛이다. 앤이 소설 후반에야 경험한 ‘차갑고 신성한 슬픔의 손길’을 에밀리는 소설 첫 대목에서 겪었는다. 그리고 지속되는 실망,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 멈추지 않는 고난 속에서 성장한다.


'에밀리 시리즈'는 무척 현실적이다. 엘리자베스 이모는 마릴라와 달리 끝까지 성마르고 냉랭하다. 다이애나에 해당되는 단짝친구 일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화를 내는 빈도와 강도가 병적이다. 에밀리 또한 한 성깔 하는 터라 두 사람은 시시때때로 대거리를 한다. 이들의 우정은 싸움을 통해 쌓인 기이한 애정이다.


가장 현실적인 면은 남자주인공 역할에 해당하는 테디 켄트이다. 그는 길버트 블라이스에 비해서는 몸도 마음도 유약하다. 게다가 아주 음침한 어머니를 두고 있는데 결혼 후에는 훌륭한 막장 시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농후해 남자주인공의 매력을 몹시 떨어뜨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남편감 찾는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우정이나 따뜻한 이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에밀리의 주변 사람들은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존재들로 그려진다. 그들은 에밀리를 비웃고 인습의 굴레에 매어두려 한다. 하지만 에밀리는 끝까지 자아를 유지한다. 바로 ‘글을 쓰는’ 자아를 말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한 소녀가 작가로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에밀리는 소설 첫 시작부터 글을 쓰고 있다. 머릿속으로 시를 짓고 죽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다. 글을 쓰며 에밀리는 자신을 위로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발견한다. 시를 쓰는 법, 이야기를 짓는 법, 캐릭터를 만드는 법을 터득한다. 에밀리는 독서를 하고 멘토가 될 법한 선생님에게 꾸준히 첨삭을 받고, 잡지사에 제 시를 보내기도 한다. 훌륭한 책에 열등감을 느끼고, 인정머리 없는 선생님에게 모욕에 가까운 평을 듣고, 잡지사로부터 거절의 편지를 받으면서도 에밀리는 착실히 성장해간다.


소설의 초점은 에밀리의 꿈에 있다. 이에 비하면 가족과 친구, 연인과의 에피소드는 서브플롯처럼 느껴진다. 에밀리는 쉬지 않고 글을 쓰고 굴욕 속에서도 도전한다. 그리하여 잡지에 시가 실리고, 단편소설을 통해 약간의 돈을 벌고, 신문사에서 일거리를 맡게 된다. 결국 스물일곱의 나이에 캐나다 전역에 이름을 알리는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유명한 화가가 된 테디 켄트와 마음을 확인하고(다행히 음침한 예비 시어머니는 영면에 드신다. 아멘.) 에밀리는 일과 사랑을 모두 가진다. 에밀리의 삶에 더 이상 슬픔은 없다.


테디와의 해피엔딩은 싱겁다. 테디는 에밀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일저와 결혼하려고 한다. 일저는 페리를 사랑하지만 그가 에밀리를 사랑하고 있기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테디를 고른 것이다. 결혼은 예식 직전에 깨진다. 페리가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저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그에게 달려가 버린 탓이다. 다행히 페리는 살아있었고 일저는 그에게 청혼을 한다.


일저가 테디를 차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일저의 남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아들에게 에밀리의 진심을 고백하고 떠나지 않았다면 영영 제 마음을 밀어붙일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등 떠밀지 않으면 사랑을 쟁취할 수 없는 남자라니. 에밀리는 아마 아들 키우는 마음으로 결혼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테디의 매력이 흐릿하기에 에밀리의 존재감은 끝까지 생생하다. 테디와 결혼해도 에밀리는 여전히 에밀리다. 심지어 에밀리는 시리즈에서 단 한번도 켄트 부인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저 끝까지 ‘에밀리 버드 스타’이다.


이는 앤이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점점 ‘블라이스 부인’으로만 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이다.


몽고메리가 앤 시리즈를 끝내고 그 다음으로 집필한 책이 바로 에밀리 시리즈였다. 결혼생활과 자녀 양육을 경험한 몽고메리는 작가라는 정체성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했을 것이다. 글 쓰는 자아가 확고해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로 살아 숨 쉬는 소녀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리고 소녀를 통해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싶었다.


나는 '에밀리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를 만난다. 그의 삶에 있었던 여러 부침과 고독, 상실, 슬픔을 느낀다. 죽은 부모는 돌아오지 않고 태워버린 원고는 되찾을 수 없다. 우정과 사랑에서는 완벽을 기대할 수 없고, 현실은 결코 꿈처럼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일을 하다보면(소설에서는 이를 ‘알프스를 오른’다고 표현한다) 결국에는 결실을 맺는다.


글쓰기에는 밥벌이의 자긍심과 성공의 영광이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있다. 에밀리는 글쓰기를 통해 주인공으로 살았다. 몽고메리가 그러하듯.


나는 '에밀리 시리즈'를 서른 살 즈음에 만났고 요즘도 자주 읽는다. 에밀리라는 가면(페르소나)를 쓴 몽고메리에게 위안 받는다. 삶은 불완전한 것. 하지만 목표를 향해 걷다보면 정상에 다다른다. 그리고 정상에 다다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아름답다.


그러니 글을 쓰자. 소명이라 느낀 일을 하자. 매일 매일. 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에밀리가 일기에 썼듯 ‘그것을 위해 이 세상에 보내진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 일은 정말 축복이요 기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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