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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크네 Jul 04. 2024

베이킹은 창조적인 외유다

원데이 클래스에서 티라미수를 만들며


지역 문화 교실에서 쿠킹클래스를 연다는 소식이 들리면 바로 참석한다. 재료비나 날짜 따위는 확인도 하지 않고 신청서부터 작성하고 본다. 비싸봤자 기둥뿌리 뽑을 수준도 아닐 것이고 팔자 좋은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시간은 만들면 된다. 나는 대단한 먹보이기 때문에 새로운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경험은 결코 놓치지 않는다.


한때는 고상한 척을 하느라 인테리어소품 만들기, 라탄공예, 가죽공예 교실 등에 들락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매번 결과물이 눈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다. 라탄으로 짠 텀블러가방은 피사의 사탑모양으로 기울어있고(짜는 동안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천연스톤으로 만든 양초스탠드는 틀에 넣어 굳히는 과정에서 공기를 덜 빼 제주도 현무암처럼 구멍이 뻥뻥 뚫렸다. 가죽으로 만든 리갈패드는 박음질을 잘못해 몇 간이 비어있는데 어떤 연유로 망쳐버렸는지 아직도 아리송하다. 분명 집중해서 하나하나 꿰었는데......


소품 만들기 클래스의 최악의 단점은 결과물이 망해도 쉽사리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수업비용과 들인 품, 만들며 쌓인 미운 정(?)이 있으니까. 결국 집안의 애물단지가 된다. 눈에 띌 때마다 분노가 끓어오른다. 내가 쓰레기를 하나 빚어왔군, 젠장!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둔다 해도 눈 가리고 아웅이다. 어디에선가 내가 만든 쓰레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은 마치 새벽녘 화장실에 가려고 불을 켜자마자 침대 밑으로 뽀르르 몸을 숨긴 돈벌레처럼 일상 중간중간 상기되어 몹시 거슬리고 꺼림칙한 기분을 선사하는 것이다.


쿠킹클래스는 다르다. 선생님이 미리 개량해 둔 재료대로 만들기만 하면 되기에 크게 망칠 가능성이 적고 설사 망친다 해도 먹어 없애면 되기 때문에 실패에 쿨해질 수 있다. 내 케이크가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었든 현무암처럼 구멍이 뻥뻥 났든 장식 몇 개가 비었든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똥 될 거.


서두가 길었는데, 오늘 나는 디저트 클래스에서 티라미수를 만들고 왔다. 생크림을 휘핑하고 크림치즈를 설탕과 섞어 개고 빵 사이사이에 크림을 짜서 쌓고 코코아가루를 채로 쳐서 뿌리고 장식을(저 풀이름이 뭔지 기억이 안 난다. 뭐, 허브 중 하나겠지.) 올렸다. 이전에 만들었던 과일케이크보다 단순하지만 노동력은 훨씬 들어갔다. 크림치즈가 얼어서 마치 빨랫비누를 개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맛은 환상이다. 이걸 먹을 수 없는 빨랫비누가 불쌍해지는 맛이다.


짤주머니에 크림을 넣어 빵 위에 소용돌이 모양으로 짜는 동안 키득키득 웃는 나를 발견한다. 요리에는 단순하고 깨끗한 기쁨이 있다. 크레파스로 벽지에 낙서를 하고 놀이터의 거친 모래로 떡을 빚던 유년기의 태평한 즐거움이 찰나지만 어른의 삶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내가 만들고 있는 이 케이크는 평가의 대상도 아니고 삶의 목표와도 관련이 없다. 금전이나 건강에도 도움이 되지 않기에 실용성이 제로다. 그렇기에 나는 휘핑크림을 짜는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취미가 베이킹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왜 하고많은 취미 중 베이킹인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베이킹은 이미 존재하는 재료를 섞어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면에서 예술과 같다. 그러나 요리법이 정립되어 있기에 정해진 과정을 따라가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창작활동을 닮았으면서도 단순하다. 글은 발표한 순간 그 수명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운이 좋다면(혹은 재수가 없다면) 내가 죽은 이후 수대에 거쳐 회자되기도 한다. 그 가능성이 짜릿하면서도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든 마들렌의 수명은 채 삼일도 되지 않는다. 망한 쿠키를 친구에게 떠넘기지 않는 한 결과물로 욕을 먹을 걱정도 없다. 부담 없는 일시적이고 달콤한 창조다.


이런 추측을 하고 있는 이유는 나 또한 글쟁이이기 때문이다. 늘 결과에 대한 부담을 느낀다. 새로운 걸 생각해 내야 한다는 집착이 피곤하다. 정해진대로 따라만 가도 그럴듯한 결과물이 뚝딱 나왔으면 좋겠다. 즐겁게 수고하고 달콤한 결과물을 얻고 싶다. 글쓰기로 그걸 얻기는 힘들어졌다. 직업이 되었으니까. 내 이상과 정체성, 생활이 달려있으니까. 요리는 노동자 예술가가 잠시 쾌락의 나라로 떠날 수 있는 창조적인 외유다.


문자 써가며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 케이크가 완성되었다. 나는 그것을 포대기에 싼 아기처럼 조심스럽게 품고 집에 왔다. 집에 돌아오니 9시. 다이어트와 혈당을 동시에 의식하게 된 나이이기에 얌전히 양철케이스에 담아서 냉동실에 넣었다. 사 등분을 했다. 절제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나흘간 한 조각씩 행복할 것이다. 먹보인 나에게는 상당히 뿌듯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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