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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의 경지 Sep 02. 2024

어중간한 나의 여정(6)

악필

맛보기 지점에서 네비를 따라 30분가량 라이딩하여 영일대라는 포항 해수욕장에 도착했다. 여기서 부터 실질적인 동해안 자전거 종주길이 시작되며 파란색 종주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한달전 포항근방의 조그마한 수산물 가공업체에 장비를 설치하러 온 적이 있었다. 탁 트인 동해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으며 예상치 못한 풍경과 평화로운 분위기에 적지 않은 행복 호르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종주를 나서며 그때의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오래동안 가만히 바다만 바라보며 그때의 감정을 느끼고자 했지만 마음먹고 나선 길이라 그런지 눈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는 의외로 담담했다. 




-악필-

나에게 싫어하는 것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다. 오늘날 수기로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거의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쩌다 한번씩 손글씨를 작성해야 하는 일이 생겨 필기구를 손에 쥐면 엄지와 검지에 쥐가 날 정도로 힘이 들어간다. 그리다시피한 활자들은 알아보기도 힘들며 그 자태를 보고 있으면 실망감이 밀려든다.

나의 어머니는 육형제 장녀로서 국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일이 많아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무척 강했다. 하필 그때 우리집 형편이 괜찮은 상태였고 공부에 취미가 없는 나에게 과외를 붙였다. 때는 내가 국민학교 1학년 매번 0점에 가까운 받아쓰기를 점수를 자랑할 때였다.


그녀는 시골에서 태어나 동네 근방에서 자취를 하며 대학교를 다니는 여성이었다. 나는 그녀를 동희이모라 불렀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을 한 그녀에게 어머니는 나의 조기교육을 당부했다. 그녀 또한 어머니 못지 않게 교육열이 강했으나 당연하게도 나의 학습속도와 태도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오래전 '활자중독'이라는 단어를 접한 적이 있다. 무언가를 하지 않을때는 글자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확하게 그 반대에 속한다. 최대 30분 이상 글자를 읽으면 잡생각들이 머리속으로 들어오든지 잠이 쏟아지든지 둘중에 하나이다.  


그녀는 숙제를 너무 많이 내어 주었다. 최소 교과서 1페이지를 공책에 써오라고 하였다. 

최대한 나의 수준을 배려하여 결정이지만 문제는 애초에 그녀의 학구는 다른 세계 수준이었다. 

숙제를 못해가거나 받아쓰기를 잘 못한 댓가로 담임이나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는건 이미 습관화 되어 아무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진심어린 실망의 눈빛과 표정은 외면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약속을 어기면 상대방이 얼마나 슬퍼하고 실망하는지 명확하게 습득하였다. 


숙제를 하는 시간은 고통 그 자체였다. 어떻게든 주어진 숙제를 빨리 끝내려다보니 연필을 쥐어잡은 검지와 엄지에 온 힘이 집중 되었다. 속도는 붙었지만 필체는 점점 돌아오기 힘든 방향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국민학교 1학년이 끝날즈음 한글을 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선척적으로 활자를 싫어하는 내가 책을 더욱 멀리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 내내 나는 공부에 취미가 붙지 않았다.

그때 과외를 받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나의 필체는 지금 보다 좋아졌을까?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계단식 논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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