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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아의 경지 Sep 01. 2024

어중간한 나의 여정(5)

녀석의 딱지

자전거 종주길을 찾는건 어렵지 않았다. 중간에 일반도로를 지난 적도 있었지만 구간이 길지 않았고 차도 많이 없어 불편함이 없었다. 첫 여정이어서 어떤 길이 나올지 편의점등과 같은 보급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채 내비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달렸다. 어떻게 보면 과거 내가 걸어온 길과 비슷하다. 

문득 아예 다른길로 빠지지 않을거면 왜 남들처럼 정해진 길을 충실히 가지 않았을까하는 후회가 들었다.

오래된 번화가를 지나 해안가에 도착했다. 어선들도 보이는 풍경이 바다에 가깝지만 강물과 섞여 그런지 특유의 바다냄새는 나지 않았다. 

동해안 종주를 계획하며 상상했던 바다를 보며 달리는 라이딩의 맛보기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남들은 열심히 앞으로 나아갈때 나는 낙오되어 뒤쳐지는게 아닌가 하는 찝찝한 기분과 동시에 서둘러야 한다는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건거이-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를 '건거이'라고 불렀다. 나의 기억에 그는 나와 동갑이였고 약간 고집스러웠던 아이였다. 

혜림학교 운동장이 우리들의 놀이터 였으나 때때로 일반아이들의 출입을 금지하기도 했었다. 

그럴때면 우리들의 놀이터는 학교 정문앞의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그날 우리는 그 공간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바닥에 놓인 상대방 딱지를 뒤집기 위해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날 건거이 기세는 대단했다. 일말의 자비도 없이 우리들의 딱지를 다 뒤집어 버렸다. 

상대방의 딱지를 향해 수직으로 힘껏 내려쳐 뒤집는게 일반적이었지만 체구가 작은 그는 딱지의 측면을 향해 던져 뒤집는 기술을 주로 사용했다. 우리는 그것을 개구리치기라 불렀다. 

딱지 측면으로 정확하게 던져야 하는 기술로 아직어린 우리들에게는 상당한 난이도가 요구되었다.


한창 열을 올리고 있던 중 제일상회 앞으로 잡화를 실어나르는 트럭한대가 멈춰섰다. 

트럭 아저씨는 차에서 내려 서둘러 물건들을 제일상회로 옮기기 시작했다. 

물건들을 다 옮기고 나서도 얼른 떠나지 못하고 주인 할아버지와 옥신각신하느라 시간을 지체하였다.


높은 성공률을 자랑하던 녀석의 개구리치기는 딱 한번 표적을 벗어나 트럭 뒤바퀴 쪽으로 날아 들어가 버렸다. 트럭아저씨와 주인 할아버지의 실랑이가 끝날 무렵이었다. 

트럭밑으로 기어 들어가는 녀석을 말렸는지 종용했는지 방관했는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곧이어 트럭 아저씨는 서둘러 후진했고 순식간에 뒤바퀴가 녀석의 허리에 올라타 버렸다.

그 광경을 목격한 우리들은 소리를 지르며 차를 마구 두드렸고 놀란 트럭 아저씨는 전진 기어를 넣어 버렸다. 다시 한번 녀석의 허리를 역과해 버린 것이었다. 뒤이어 어른들이 뛰쳐 나왔고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뛰쳐나온 그의 어머니를 어른들이 막아섰다. 엠블런스가 축 늘어진 그를 데려갔고 경찰차가 트럭 아저씨를 데려갔다. 깡마른 몸집과 달리 그가 떠난 시멘트 바닥은 붉은 선혈로 뒤덮혔다. 

그 흔적을 확인한 그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열악한 생활 환경 탓인지 사회적 분위기 덕분인지 나를 포함한 그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한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대단한 것을 본 것처럼 서로의 기억을 언어로 표현했다


동네 어른들은 남은 유가족을 위로 하면서도 뒤에서는 토속적인 믿음에 근거하여 수근거리기도 했다.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그의 어머니를 딱 한번 동네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이고 천천히 동네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떠났다. 일부 어른들은 보상금을 받아 아파트로 이사했다며 부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학창 시절 어느 윤리 선생님께서 살아가는 궁극적인 이유는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사고가 나던 해 우리는 여섯살 이었다. 이후 나의 40년은 얼마나 행복했나?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불행하진 않았지만 명확한 건 행복한 기억보다 그 반대가 더 많다.

물론 인간의 뇌가 고통을 더 깊이 각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하지만 어쨌든 결과론적으로 나의 40년은 불행이 더 많이 차지한다. 미래는 늘 불안한 것이기에 행복을 가져다줄 리 없다. 


나의 입장에서 녀석의 사고는 그에게 불운이라 없고 옆에 있던 나는 요행이라 없다.

인연과 운명은 수학적으로 계산하기 힘든 확률로 일어난다. 

우리는 그것들을 거스를 힘이 없다. 녀석은 인연이 닿아 이세상에 나왔으며 그날 사고로 운명을 다한 것이다. 이는 불행도 그 반대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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