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대학 졸업 후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었다. 2개월 무위도식해 보니 그것도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과 함께 자신의 쓸모에 대한 강한 회의가 들어 근처 초등학교에 방과 후 미술 강사로 취업을 했다. 같은 학교에는 대학 동기 E도 일하고 있었는데 둘은 퇴근길에 만나 수다를 떨곤 했다.
"내일이 벌써 주말이네. 주말인데 할 일도 없고. 넌 뭐 해?"
J가 심드렁하게 묻자 친구 E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주말에 내 남자친구 만나는데 같이 갈래? 안 그래도 괜찮은 사람 없냐고 물어봤거든. 괜찮은 후배가 있다고"
J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고, 그 후배란 사람이 괜찮은 사람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그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어디서 만나?"
그렇게 J는 '괜찮은 후배'라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약속한 토요일 오후 3시, J와 E는 진해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붐비는 시내 한복판 커피숍 겸 레스토랑 파우스트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커피숍 이름치고는 너무 예술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J가 아르바이트했던 커피숍 이름은 세잔느였고 나름 유명한 돈가스 가게 이름은 오델로와 돈키호테였다. 해군, 해병대, 해군사관학교, 군대 3종세트를 모두 가지고 있고 5분 거리에 바다가 있는 도시의 커피숍 이름이 '마린', '네이비', '봄 바다'가 아닌 괴테, 셰익스피어의 작품 제목과 인상주의 화가의 이름이라니 말이다.
E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김해 공항에서 공군 조종사로 근무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J는 군인을 만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군인을 남자 친구로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해 왔다. J의 아버지는 군무원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주변에 볼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군인, 군무원, 해군 장교였으니 익숙함이 지루함으로 변했고, 고등학생인 J에게 시간 있냐, 펜팔 하자는 흰소리를 하는 수병의 모습을 보고 자란 터라 군인에 대한 인상이 좋지는 않았다.
E의 남자 친구와 '괜찮은 후배'가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J는 친구 E의 남자친구를 뒤따라 들어오는 H를 유심히 살폈다. 키는 큰 편이었고 하얗고 작은 얼굴에 살짝 올라간 눈썹은 비교적 연했고 눈은 살짝 쳐져서 순박해 보였다. 콧날이나 입매가 날카롭지 않고 동글동글한 편이라 유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J는 첫눈에 반할만한 멋진 외모는 아니지만 좋은 사람일 거라는 공식적인 착각을 갖게 하는 인상을 가진 H가 나쁜 사람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안녕, 여기는 H, 내 직속 후배야."
E의 남자친구는 H를 짧게 소개하고는 여유 있는 목소리와 시종일관 웃음기 띈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희끗희끗 보이는 새치와 비교적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자신감 있고 화려한 언변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달변가였다. J는 친구 E가 왜 그와 만나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J는 H의 손 아래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난 상처를 보았다. 찰과상이 심해 상처가 나고 그 위에 딱지가 듬성듬성 앉았지만 여전히 아플 것 같았다.
"팔은 어쩌다가 다친 거예요?"
"축구하다가 다쳤어요. 너무 열심히 뛰다가 그만 넘어졌거든요."
J는 왠지 모르게 H의 상처가 신경이 쓰였다. H는 J가 자신의 상처에 물어보는 게 관심처럼 느껴졌는지기분이 좋아 보였다.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부산 광안리로 갈까요?"
E의 남자친구는 지금 당장 광안리로 가자고 재촉했다.
"그러죠."
진해에 살고 있는 J가 광안리로 가려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해서 2시간은 족히 걸렸다. 계획에 없던 광안리 바다를 본다는 생각에 J는 문득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