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

조직검사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아

by 리인

깊고 얕은 노랑으로 물든 가을 자작나무를 그리기 시작한 건 뜨거운 여름이었습니다.

올해 봄 '봄의 자작나무'를 완성하고는 사계절 자작나무 시리즈를 완성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지요. 모네의 수련처럼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연두, 초록, 노랑, 주황, 갈색 자작나무 잎의 색감을 표현하는 것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처음 그리기 시작한 7월 30일부터 11월 17일까지 거의 넉 달 동안 캔버스 안의 샛노란 자작나무 숲에 들어가 숲과 함께 공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을 자작나무 숲을 완성하던 날, 화실에 가기 전에 병원을 들러야 했습니다.

전날 건강검진으로 했던 유방 초음파에서 이상한 것이 발견되어 조직검사를 해야 했습니다. 처음엔 별일 없겠지 하고 검사를 취소했다가 올해 유방암 수술을 하신 엄마가 떠올라서 마음을 고쳐 먹었지요.

조직검사는 연필심 정도 두께의 바늘을 피부에 찔러 조직을 채취해 내는 것인데 조직을 채취할 때마다 장난감 총의 방아쇠를 당길 때처럼 탕탕 소리가 났습니다. 채취는 총 5번 정도 이루어졌는데 마취가 잘 되어 아프지는 않지만 바늘이 내 몸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이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습니다. 채취한 조직은 지우개만 한 식염수 통에 담겼는데 꼭 새우젓 통에 담긴 새우 같았습니다. 간호사가 통에 담긴 조직을 내 눈앞에 가져와서 보여주는데 통 안의 조직들이 유유히 유영하는 듯 보였습니다.


검사를 끝내니 간호사가 처방전을 쥐어 줬습니다. 이것도 검사라고 항생제에 소염제까지 먹어야 했습니다. 나의 마이크로바이옴 균형을 깨는 항생제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아까 유영하던 나의 조직들이 갑자기 미워졌습니다. 검사결과는 4일 뒤에 나온다고 했습니다.


화실 예약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약을 위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식당을 찾았습니다. 우렁 된장 비빔밥이라는데 상추 줄기 끝은 갈색으로 변해 있고 오이와 덜 익은듯한 콩나물이 밥 위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비빔밥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나물이었지만 약 먹으려면 억지로라도 먹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입에 꾸역꾸역 집어넣었습니다. 그때 매장에서 나오는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바보같이 눈물이 나요.~~"

20년 전 들어봄직한 슬픈 발라드였습니다. 노래가사가 슬퍼서인지 비빔밥이 퍽퍽해서인지 갑자기 목이 메어 왔습니다. 억지로 물을 마시면서 밥을 꿀꺽 삼켰는데 눈에서 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습니다. 얼른 휴지로 눈에 남은 물기를 닦았는데 물기는 마르지 않고 계속 생겼습니다.


화실에 도착해 평온한 가을 자작나무 숲 앞에 앉았습니다. 그날은 혼자 있고 싶은데 집에 가기는 싫고 누구를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이야기는 하고 싶은 기분이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자작나무의 노란빛에 음영을 더 넣었습니다. 갈색빛, 초록빛, 주황빛을 만난 노랑을 채워 넣으며 그림을 정리했습니다. 앞에 있는 자작나무 기둥은 더 밝은 흰빛으로 뒤에 있는 자작나무는 더 어두운 회색으로 세밀한 부분을 마무리 지으며 가을 자작나무 숲을 완성했습니다.


자작나무를 그리면서 자작나무를 보러 많이 다녔지요. 특히 화담숲에 있던 자작나무숲은 내가 그린 깊은 가을 속 노란 자작나무 숲은 아니었지만 초가을 단풍이 주황으로 살짝 들기 시작한 푸릇푸릇한 감성을 채운 곳이라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3시간 정도 그림을 그리다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더군요. 혹시 모를 걱정과 불안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평온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는 곳에서 힘든 일을 마주하게 되지요.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게 됩니다.

'검사 결과가 안 좋으면 어떡하지? '

나도 이런 걱정을 할 수 있었지요. 중요한 것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는 건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만 낭비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통제할 수 있다면 그 걱정을 없애기 위해 행동하면 되고,

통제할 수 없다면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 먹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4일 동안 걱정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 이미 일어난 일을 인정해라.

◆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라.

◆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


- 책 <걱정이 취미세요?> -


남편은 5일 동안 장기 출장을 갔고 그날 저녁에 집에 온 아들에게

"아들~ 엄마 오늘 약간 울적한 일 있었어. 엄마 오늘 조직검사받았거든."

하고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아들이 괜찮을 거라고 위로를 해줬습니다.

다음 날 저녁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녀석이 저에게

"엄마,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제가 하나 사줄게요. 뭘 살까 생각해 봤는데 마땅한 게 없네요."

"우리 아들 말이라도 고마워. 괜찮아."

사춘기 때 입도 닫고 방문도 꾹 닫고 지내던 녀석이 언제 이렇게 다정하게 변했는지 대견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온 날 남편과 함께 병원을 방문해 조직검사에서 이상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쉬는 시간에 전화하려던 참이었다며 무척 좋아했습니다.

가족에게 얘기 안 하고 혼자서 조용히 넘어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저는 그런 성격은 못 되나 봅니다. 가족들과 이야기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았거든요. 힘들 때 곁에서 지켜주고 위로해 주는 가족들이 있어 든든하고 행복했습니다.


어젯밤에 아들에게 또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지금 00에 나와 있는데 디스커버리 플리스 잠바가 괜찮은 것 같아요. 엄마 사줄까요?

아들은 검사 결과가 괜찮다고 해도 뭐라도 사주고 싶은가 봅니다.

"아니, 엄마 플리스 잠바 있어. 그래도 우리 아들 최고다."


가을 자작나무 숲을 그리며 4개월 동안 참 행복했지만 마지막 그림을 완성하던 날, 걱정을 잊게 해 준 힐링의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잎이 꽃이 되는 가을은 두 번째 봄이다(알베르 까뮈)

어제 나의 노란 자작나무잎은 향기 나는 아름다운 꽃이 되어 나를 품어 주었습니다. 가을을 그렸지만 내 마음속 세상에서는 두 번째 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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